:: 글답변 ::
이 름
패스워드
이메일
홈페이지
제 목
> > > 1.이슬람에 대한 오해 > > 주지하고 있는 바와같이 이슬람교는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오해와 왜곡, 심지어 능멸을 당하는 종교다. > 이러한 오해의 주된 원인은 피해의식에서 오는 배타성이나 외부세계의 비이성주의적 발상과 행태에 있다. > 그리고 이러한 발상과 행태의 진원지는 대부분 유럽과 유럽인이라는 사실이다. > > 이에 반해 동양과 동양인들에게서는 이슬람에 대한 백안시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 이러한 의도적인면과 더불어 선의의 무지도 한 요인이 되어왔다. > > > > > 이슬람에대한 낭설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한 손엔는 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다. > > 이 말이 마치 이슬람의 징표인 양 오인되고 있다. > 그러나 말아닌 이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한 > 이태리 스꼴라철학의 대부격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74)로 알려져있다. > > > > > 원래 이슬람은 그 어의(語意)가 말해주듯, 또 경전에 누누이 강조되듯,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로서 > > 애당초 신앙을 "검"으로 강요하지 않으며 관용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왔다. > > 또한 전후 여섯차례나 전쟁이 발발한 중동을 "세계의 화약고"로, "전쟁다발지대"로 간주하면서 > > 그 근원을 종교갈등에서 찾으려고 하는데,이것은 한낱 허사에 불과하다. > > > > > 본래 중동지역도 다른 지역과 다를 바 없어 역사의 순리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전쟁도 있었지만 평화가 절대적이었다. > 그러던 곳이 갑자기 '화약고'로 변모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냉전기류가 이곳을 강타하면서부터다. > > 느닷없는 냉전기류는 그나마 평온하던 중동에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와 민족주의간의 대립,그리고 석유자원의 국제화와 > 민족화 간의 갈등이라는 상극의 난세를 몰고와 불화와 반목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 > > > > 그간 있었던 중동전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주범은 정치이지 결코 종교가 아님을 간파할 수 있다. > 8년간의 이란-이라크전쟁을 놓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이 전쟁이 일어난 원인의 하나로 이슬람교 내의 종파적 분쟁을 들고 있는데, >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 > > > > 종교적으로 이란은 이슬람교 2대 종파의 하나인 쉬어파에 속하기는 하나 ,이라크도 인구의 과반수(참전 이라크군의 반수)가 > 이 교파의 신봉자들이며 그곳에는 쉬어파의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 따라서 이 두 이슬람국가 사이에는 전쟁을 일으킬 만큼 종파적 갈등이 있을 수 없다. > 기실 영토분쟁과 지역패권다툼이란 정치적 요인이 전쟁 발발의 주원인이었다. > > > > > 숱한 오해와 능멸을 받아온 이스람을 이해하기 위한 문화상대론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문화만 우수한 것으로 믿고 > 자기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관점에서 타 문화를 부정하거나 비하하는 이른바 문화국수주의, 또는 자문화 중심주의를 철저히 지양하는 것이다. > > 이러한 유의 서구문화 중심주의가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불러왔다는 역사의 경험을 감안할 때, > 문화상대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계속) > > > > 2.이슬람, 이슬람 문명 > > > > > 아랍어로 "순종"과 "평화"의 뜻을 담고있는 이슬람(al-Islam)이란 말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하여 이슬람 문명과 그 권역인 이슬람 문명권(이슬람세계)이 독자적으로 형성되면서 이슬람 문명전반에 대한 범칭으로 쓰이는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이슬람 이라고 하면 이슬람교와 그에 바탕을 둔 이슬람 문명 및 이슬람 세계를 두루 일컫는 말이라고 할수있다. > > 이슬람 문명은 7세기 초반 이슬람교의 출현과 함께 형성되었다. > 교조 "무함마드"(570?-632)가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한 이후 칼리파 시대에 대정복을 전개하여 아라비아반도는 물론, 그 주변국들이 점차 이슬람화 함으로서 이슬람 문명권의 기반을 구축했고 그 뒤를 이은 우마위조(661-750)를 거쳐 아랍인과 비아랍인이 이슬람교와 이슬람 문명 이라는 공통된 이념에 기초하여 이슬람제국(압바스조 750-1258)을 건설함으로서 마침내 범 지역적인 문명공동체로서 이슬람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 > > > > 무슬림의 지역분포를 보면 80%가 아시아에 편재해있고(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인도네시아,말레이지아,필립핀 등)게다가 이슬람의 발원지가 서아시아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슬람의 주역은 아시아 무슬림 들이며 이슬람교는 다름아닌 아시아 종교라고 말할수 있다. > > > > > 이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종교인 이슬람교와 그를 바탕으로한 문화복합체인 이슬람 문명의 실체와 그 권역인 이슬람 문명권(이슬람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을 말한다. >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가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윤리를 사회생활의 전반,즉 문명의 여러 영역을 총 망라한 인간의 생존양식이며 종교와 세속 쌍방을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이다 > > > 종교라고 하면 무릇 세속의 삶보다 내세를 더 강조하고 인간생활의 육체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는데 반해 이슬람은 내세와 현세를 똑같이 여기고 현세의 삶을 중시하면서 사회생활의 여러분야에서 고유이념과 원리,제도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 이것이 여타 종교와 종교문명에서 찾아볼수없는 이슬람 만의 독특한 점이다. (계속) > > > > 3.문명사에서의 이슬람의 기여 > > > > >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문명을 요람으로하여 태어난 이슬람문명은 아랍의 전통문명과 고대 오리엔트 문명, > 그리스-로마문명,페르시아 문명 등 여러 외래문명이 융화하여 창출된 새로운 문명으로서 서로 다른 문명영역을 갈무리하고 있다. > > > > > 무슬림들은 단지 여러문명을 계승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시대적 요청에 맞게 한층 더 발전시켜 특유의 중세문화를 꽃피움으로서 고대문명과 근세문명을 순리적으로 이어주었다. > 이것이 바로 이슬람문명의 가장 큰 세계사적 공헌이다. >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공헌 때문에 우리는 이슬람문명을 통해 사라진 고대문명을 추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 유럽문명을 비롯한 근.현대문명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 > > > 이슬람문명을 잉태하고 출산해 키워낸 요람은 이른바 고대 4대 문명가운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두 문명,즉 오리엔트문명이다. > 그리하여 이슬람문명에서는 이 두 문명이 남겨놓은 흔적이 역력하며 ,그러한 흔적을 추적함으로서 인류문명의 여명을 밝힌 오리엔트문명의 실체를 알아낼 수 있다. > > 문명사에서 이슬람의 기능과 영향력은 유럽문명의 사활이 걸린 일련의 문제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 원래 선사시대의 몽매에 허덕이던 지중해 중심의 유럽은 고대 오리엔트문명을 받아들임으로서 비로소 문명시대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른바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문명이 싹텃다. > > > 그래서 유럽인들은 고대 오리엔트문명을 그들의 문명사 첫머리에 억지로 앉혀놓는 것이다. > > 한편 이슬람은 처음부터 그리스-로마문명을 적극 수용하여 자신의 문명으로 융화했을 뿐만 아니라, > 오히려 더욱 발전시켜 중세에 이르러서는 유럽에 재수출함으로서 자칫 영영 멸절될 뻔한 유럽의 고전문명을 다행히도 르네쌍스(renaissance-재탄생,부흥)시켰다. > > > > > 유럽에 중세 암흑기가 엄습하여 일세를 풍미하던 그리스-로마문명이 한창 내동댕이 쳐진 7-8세기부터 무슬림들은 > 그리스-로마문명에서 철학,학문,기술 모두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 플라톤(B.C.427-347)이나 아리스토텔레스(B.C.64경-A.D.21경)의 철학서,유클리드의 기하학서,스트라본의 지리서 등 >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은 빠짐없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 > 이렇게 외래문명을 받아들여 자신을 살찌운 이슬람 선진문명은 13세기를 전후하여 빈혈에 허덕이던 유럽에 수혈되기 시작했다. > 아랍어 서적들이 유럽으로 역출(譯出)되고 이슬람의 지리학,천문학,의학,수학이 유럽 대학에서 교재로 읽히게 되었다. > 이를 계기로 유럽은 잃었던 문명의 전통을 바야흐로 되찾기 시작했으며,그를 발판으로 하여 르네쌍스의 전기를 맞아 급기야 근대의 기선(機先)을 잡는데 까지 이르렀다. > > > 바로 이러한 까닭에 유럽사의 서술체계에서 이슬람사회는 유럽 중세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둔갑되어 있다. > 이것은 역설적으로 중세 유럽문명에 대한 이슬람의 기여와 영향을 방증해주며, 이슬람문명을 떠나서 유럽의 중세문명,특히 그 부흥을 말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설파한다. > > > > > 이슬람은 동서문명의 교류에도 특출한 기여를 했다.지정학적으로 이슬람세계의 심장부는 동서양의 중간지대.완충지대에 자리하고 있어서 동서문명교류의 가교 구실뿐만 아니라,문명의 산파역 까지 맡았다. > 일찍이 이슬람문명의 요람인 서아시아 일원은 페르시아문명을 비롯한 오리엔트문명과 그리스-로마문명이 접합하는 곳이어서, 여기에서 사상 처음으로 동서문명을 한 그릇에 담아낸 헬레니즘문화가 꽃피었다. > > 기원전 4세기에 단행된 마케도니아 왕 알레산더(알레산드로스)의 동정(東征,B.C. 334-323)으로 출현한 > 헬레니즘 제국(알레산더제국)은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대륙을 아우른 미증유의 대제국으로서 > 그 판도내에는 그리스문명과 고대 오리엔트문명,페르시아문명,인도문명 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다양한 문명이 망라되었다. > > > > > 종전에는 여러왕조간의 격페로 인해 이러한 문명들의 상호교류가 차단되어왔다. > 그러나 알렉산더의 동정과 더불어 대제국이 출현함으로써 이러한 차단요인이 일시에 제거되었으며 > 제국의 광할한 판도내에서 초유의 동서문명교류가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 이리하여 동서문명의 첫 모형이자 융합체인 헬레니즘이 출현했다. > > > 그런데 어떤이는 이러한 동서문명의 융합체인 헬레니즘을 순수한 유럽문명으로 착각한 나머지 기독교의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정통 유럽문명의 2대 근간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동양문명의 2대 근간인 유교와 불교에 대응시키는데,이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 > > 중세에 와서 이슬람제국은 동방의 중화제국과 함께 세계사의 쌍벽을 이루어 동서문명교류의 주역을 담당했다. > 이슬람제국은 중국을 비롯한 동방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을 뿐만아니라, 후진 유럽에 전파하기도 했다. > 인도가 발견한 영(Zero)개념을 받아들여 수학의 혁명을 일으킨 무슬림들은 '영'을 포함한 숫자(아라비아숫자)를 > 유럽인들에게 가르쳐주었으며 중국의 4대 발명품(종이,화약,목판인쇄술,나침판)을 비롯한 동방 특산물도 대부분 > 아랍-무슬림인들이 유럽에 전해주었다. > > > > 근.현대에 들어와서 이슬람세계의 중심부인 중동은 시종 서구열강의 세력각축장이 되었다. > 그것은 중동을 다스리면 세계를 다스린다는 역사적 경험이 그들에게는 불변의 진리처럼 인식되어져왔기 때문이다. > 이로인해 오늘날에도 이 지역은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힌 각축장이 되고 있는 현실에 있다.(계속) > > > > > 4.지하드 > > > > > '지하드'(jihad)는 아랍어로 '자하드'(jahada)의 동명사로서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함'이란 뜻이다. > 지하드는 곧 이슬람을 위해(이슬람을 위한 정도에서)헌신 분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드를 행하는 사람을 '무자히드'라고 한다. > > > > > 지하드에는 자신을 순화하기 위한 개인적인 신앙차원의 노력과 이슬람영역의 발전이나 방어를 위한 집단적인 공헌 차원의 분투라는 두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 전자는 내면적이고 평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후자는 다분히 외향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 > > > > 그런데 종종 후자의 전투적 성격이 확대 과장되어 지하드는 마치 그것뿐인 것으로 오인되고 있다. > 다시 말해서 서구식 '성전'(聖戰, 영어로 holy war)으로 오해되고,급기야는 그렇게 의역(意譯)되고 말았다. > > 그 영향은 한자문명권까지 미쳐 결국 그대로 한자역(漢字譯)되었다. > > > 앞서 말한것처럼 이슬람적 '지하드'에는 신앙차원의 노력과 공헌차원의 분투(전쟁)라는 두 가지 내용이 있기 때문에 > 지하드 일반을 '성전'으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일 수 밖에 없다. > > 지하드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의미와 역할 때문에 이슬람에서는 그것을 무슬림이 수행해야 할 종교적 실천의무로 규정할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고 한다. > > 소수파인 쉬어파는 지하드를 실천의무로 간주해야 한다고 하면서 오늘날 까지도 그 수행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 > > 그러나 다수파인 쑤니파는 지하드를 격려하면서도 원래 실천의무는 개인차원의 의무사항이기 때문에,개인차원과 > 집단차원의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무슬림들이 꼭 수행해야 할 의무도 아닌 지하드를 > 일반 무슬림들의 종교적 실천의무의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 >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다수 정통파의 주장을 따라 이슬람의 종교적 실천의무는 다섯가지(신앙증언,예배,종교부금,금식,성지순례) 로만 한정하고 지하드는 의무에서 제외되어 있다. > > > > > 지하드는 이슬람의 종교적 신앙을 정화하고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 그리하여 지하드는 신성시되고 그 수행자 무자히드는 전사하면 순교자로 추서되어 '천국의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 > > 지금 이러한 지하드가 전쟁과 폭력으로만 왜곡되어 이슬람의 호전성을 대변하는 징표인양 알려져 있다. > > > 한편, 이슬람세계에서는 지하드의 이름 아래 음양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운동과 투쟁,전쟁이 벌어지고 단체와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오늘도 그 양상은 계속되고 있다. > > 물론 개중에는 지하드 본연에 충실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것도 있다. > 지하드란 이름을 걸고 지하드와는 무관한 행위들이 자행되기도 한다. > 비문명적인 테러나 무모한 자폭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지하드를 합리화할 수 없다. > 오늘날의 가장 큰 폐단은 지하드 본연을 망각하고 정치를 빙자한 지하드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계속) > > > > > 5.이슬람의 여성관 > > > > > 이슬람은 여성들이 비록 남성과 동격체로서 존재하고 평등권을 행사하지만 여러가지 유별되는 점이 있어서 특혜를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각방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슬람의 여성 보호는 남성과 사회에 의한 보호와 부양, 그리고 여성으로 인해 발생 가능한 문란과 패륜으로 부터의 사회 보호 등 몇가지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 > > > > 이슬람은 여성의 육체적 연약성과 사회활동의 제약성, 그리고 여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의 필요성에서 출발하여 여성에 대한 남성과 사회의 보호를 의무화하고 있다. > 그 대표적인 일례가 이슬람의 여성상 하면 으례 회자되고 있는 일부다처제다. > > > > > 일부다처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종 유행해온 일종의 혼인제도다. > 일반적으로 일부다처제의 발생동인은 여자의 수가 남자의 수를 능가하거나, 한 명 이상의 여성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성의 욕구, 그리고 많은 자손을 갖고자 하는 욕망 등 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 > 그렇다면 이슬람사회에서 일부다처제가 발생하게 된 것은 어느 동인에 해당하며, 제도로서 장기간 존속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 > > > > 꾸르안(코란)에는 유일하게 일부다처제의 허용을 시사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결혼을 할 것이니 > 너희가 마음에 드는 여인으로 둘,셋 또는 넷을 취할것이다. > 그러나 그녀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인이나 아니면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것(노비)을 취할 것이다. > 그것이 너희가 부정을 범하지 아니할 최선의 길이다"(4:3) > > > > > 이 구절은 이슬람 초창기 두 번의 힘겨운 전투에서 수 많은 남자 군사들이 사상(死傷)당한 후에 내려진 계시다. > 두 차례의 전투끝에 많은 과부들과 고아들이 생겨났고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 이제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도는 한 남자가 여러아내를 맞아들이는 것 뿐이었다. > 이것이 바로 초기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던 직접적인 동인이다. > 요컨대 여성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 따라서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는 발생론적으로 보면 여성 보호를 포함한 사회연대라는 윤리적 요청에 부응하여 출현한 것이다. > > > > > 이와같이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출현한 제도지만, 그 제도를 확립하고 유지하는데는 거의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단서가 붙어있다. > 전술한 경전구절에서 보다시피 남편은 아내들을 편애없이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 > 이 공평성이 지켜지지 않을때 이 제도는 성립할 수 없으며, 설령 결혼했어도 아내의 합법적인 이혼조건이 된다. > > 일부다처제를 지탱해주는 이러한 공평성의 주요한 내용으로는 아내를 공동거주,공정부양,공평상속 등이 있다. > 그런데 서로 다른 성차심리를 가진 여인들에 대해 이러한 불편부당한 공평성이 지켜지겠는가 하는 것이 상식적인 의문으로 제기되지 않을수 없다. > > > 이에 대해 경전은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하기는 어려울 것' 이나, 그렇다고 하여 다른 아내들을 무시하고 > 한 아내만을 편애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 > 이와같은 사실과 더불어 한 남편이 여러아내를 부양해야 할 부담을 감안할 때 일부다처제는 애초부터 일정한 조건에서만 허용되고 또 가능한 혼인제도로 결코 당위성이나 편재성을 띈 혼인제도는 아님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오늘에 와서 이 제도의 존속 여부를 놓고 의론이 일고 있으며 이슬람 나라들은 법적으로 금지하거나(튀니지,터키 등), 그대로 존속하거나(모로코,이집트 등), 재판소의 허락 등 조건부적으로 허용하는(시리아,파키스탄 등)절충적 방법을 모색하는 등 제각기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 시대의 발전에 따라 이 제도는 점차 유명무실화 하고 있다.(계속) > > > > 6.이슬람의 통과의례 > > > > > 이슬람에는 평생 한번은 통과해야 할 통과의례가 몇가지 있다. 우선 출생 의레다. > 아기가 태어나면 첫 의식으로 아기의 오른쪽 귀에 대고 '아잔'(사원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면서 예배를 촉구하는 낭송)을, 왼쪽귀에 대고는 '이까마' 즉 예배 전에 염송하는 경전구절을 읽어준다. > 가장 신성한 알라의 소리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이때부터 아기는 무슬림이 된다. > > > > > 일부 지역에서는 경전을 주머니에 넣어 메카 쪽을 향해 걸어놓는다. > 출생이후 이레째 되는 날에는 작명(作名)하는 '아끼까'의식을 치르는데 축복받은 데 대한 보답으로 양을 잡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 > > 그리고 친척 부인들이 아기를 보러 오는데 올 때 액땜으로 소금을 뿌린다. > 그녀들은 흉안(凶眼)의 시기를 두려워해 아기를 보고 예쁘다는 말을 하지않는다. > 또한 이날 아기의 머리카락을 모두 깎아 그 무게만큼의 금이나 동등한 가치를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희사한다. > > > 이름은 대체로 현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데 남자의 경우 교조 무함마드의 이름이 가장 많다. > > > 남자는 꼭 할레를 하는데 생후 일곱번째 날이나 7-12세 때 행하는 것이 관례다. > 할레는 남성다움과 용감성의 상징이며 공동체의 성원임을 확인하는 절차다. > 그리하여 할레는 축제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 아이는 돌아다니면서 어른들께 인사하고 주위에서는 축하하고 격려해준다. > > > 아직까지 수단이나 요르단 그리고 사막의 부족들 속에 남아있는 여아의 할레 풍습은 음핵절제로 > 혼전 성관계를 방지하고 순결을 유지하기위한 방편이라고 하나 대부분의 이슬람 법학자들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 > > > > > 6.이슬람의 통과의례 > > > > > 이슬람에는 평생 한번은 통과해야 할 통과의례가 몇가지 있다. 우선 출생 의레다. > 아기가 태어나면 첫 의식으로 아기의 오른쪽 귀에 대고 '아잔'(사원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면서 예배를 촉구하는 낭송)을, 왼쪽귀에 대고는 '이까마' 즉 예배 전에 염송하는 경전구절을 읽어준다. > 가장 신성한 알라의 소리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이때부터 아기는 무슬림이 된다. > > > > > 일부 지역에서는 경전을 주머니에 넣어 메카 쪽을 향해 걸어놓는다. > 출생이후 이레째 되는 날에는 작명(作名)하는 '아끼까'의식을 치르는데 축복받은 데 대한 보답으로 양을 잡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 > > 그리고 친척 부인들이 아기를 보러 오는데 올 때 액땜으로 소금을 뿌린다. > 그녀들은 흉안(凶眼)의 시기를 두려워해 아기를 보고 예쁘다는 말을 하지않는다. > 또한 이날 아기의 머리카락을 모두 깎아 그 무게만큼의 금이나 동등한 가치를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희사한다. > > > 이름은 대체로 현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데 남자의 경우 교조 무함마드의 이름이 가장 많다. > > > 남자는 꼭 할레를 하는데 생후 일곱번째 날이나 7-12세 때 행하는 것이 관례다. > 할레는 남성다움과 용감성의 상징이며 공동체의 성원임을 확인하는 절차다. > 그리하여 할레는 축제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 아이는 돌아다니면서 어른들께 인사하고 주위에서는 축하하고 격려해준다. > > > 아직까지 수단이나 요르단 그리고 사막의 부족들 속에 남아있는 여아의 할레 풍습은 음핵절제로 > 혼전 성관계를 방지하고 순결을 유지하기위한 방편이라고 하나 대부분의 이슬람 법학자들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 > > > > 7.이슬람의 교제문화 > > > > > 외향적인 의식구조를 가진 무슬림들의 교제문화는 상당히 발달했다. > 우선 만나는 인사부터 무척 화려하다. 원래 상극관계가 지배적인 유목사회에서 인사는 서로에게 적의가 없음을 표명하고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행하는 일이었다. > 그러나 이슬람공동체가 결성되면서 상생(相生)을 실현하고 유대를 강화하려는 종교적 이념에서 인사는 하나의 중요한 교제수단으로 중시되면서 다양한 방법을 취하게 되었다. > > '꾸르안'은 "그대가 인사를 받을때 더 나은 말로 하거나 아니면 그와 동등한 말로 답하라"(4:86)고 하고, "말하기 전에 인사부터 하라" > "그 누구도 인사를 할 때까지 식사에 초대하지 말라"고 인사의 중요성과 방법까지 역설하고 있다. > > 인사방법으로는 인사말이나 악수,입맞춤,포옹,웃어른의 손에 입맞춤하는 것 등이 유행이다. > 간혹 손을 가슴이나 입술,이마에 가져다대기도 하는데 이것은 상대가 자신의 마음이나 말,생각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친절의 표시다. > > 특히 장황하리만치 긴 인사말이 아주 인상적이다. > > > 인사말 가운데는 알라와 결부된 말이 빠지지 않는다. > 좋은 일에'함둘 릴라'(알라께 찬미를!), 여행의 안전을 비는 말은 '알라 마흐카'(알라께서 당신과 함께하기를!), > 축하하는 자리에서는 '알라 유바리르카'(알라께서 당신을 축하하시길!), > 병 문안 시 에는 '알라 유슈피카'(알라께서 당신을 치유해 주시길!) 등 > > 좋은일에 대한 인사말은 꼭 알라와 연관시킨다. > 알라에 대한 믿음이 투철한 사람들 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 > > > 인사에는 순서가 있다. 일상에서 장유유서 개념이 우리와 못지않은 무슬림들은 꼭 어른에게 먼저 인사를 올린다. > 말 탄 자가 걷는자 에게, 걷는자가 앉은자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 > > 남자가 먼저 여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지만 여자는 화답하지 않아도 무례가 아니다. >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결례로 삼가야 한다. > > > 가령 보편적인 인사말은 언제 어디서나 하는 '앗쌀람 알라이 쿰'(평화가 당신에게!), 대답은 '알라이 쿰 쌀람' 으로 > ('당신에게도 평화를' 이라는 뜻 - 우리의 '안녕하십니까'에 해당), > '아흘란 와 싸흘란'(한 집안 사람으로 여기고 편의를 제공하겠읍니다), 대답은 같은 말로 반복. > (우리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에 해당)이란 말이다. > > > > > 무슬림들은 손님에 대한 환대를 미덕으로 생각하고 친절히 접대한다. 차린음식을 많이 먹어주는 것이 환대에 대한 보답이자 주인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 여겨 기뻐한다. > 선물은 선호하는 편인데 반드시 오른손으로 주고 받아야 한다. > 대화할 때는 상대와 1미터 이내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 접대용 커피나 차는 즐겁게 소리내어 마심으로써 만족을 표해야 한다. > 다만 주인의 소유물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는 것이 좋다. > 관심을 보인면 달라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다. > 또 윗사람 앞에서는 흡연을 삼가고 이야기를 나눌 때 발바닥을 > 상대방에게 향하는 것을 큰 모욕으로 여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계속) > > > > > 8.이슬람의 경전 "꾸르안"(코란) > > > > > 불경이나 성경은 부처와 모세,예수 같은 성인이나 종교 창시자들이 직접 기록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 기록에 관해 서술한 내용들을 집성한 것이다. > 이에 반해 경전으로서의 꾸르안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절대신에게서 받은 계시를 그대로 기록한 것일뿐, 무함마드 자신이나 어느 삼자의 개입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꾸르안의 특이한 점이다. > > > > > 그리고 꾸르안은 아랍어 '까리아'(qaraa.읽다)의 동명사 '꾸르안'(quran.읽기)에서 연유한 것으로서, 이 동명사가 이슬람의 경전명으로 승화된것이다. > 왜냐하면 꾸르안은 '읽기'라는 어원에서 말해주듯이 단순히 종교적 신앙의 기록물이 아니라 소리내어 읽으면서 그 뜻을 새기는 송독물(誦讀物)이 때문에(경전의 각 구절이 '읽어라'는 말부터 시작)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 따라서 '코란'이라는 말은 읽기라는 뜻이 전혀 없기때문에 반드시 꾸르안으로 발음하여야 한다고 한다. > > > > > 꾸르안은 같은 유일신교인 유대교나 기독교 경전들에 비해 알라의 유일성을 더욱 강조하고 우상숭배를 강도 높게 배격한다. > 나아가 구약성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각종 종교적 계율도 엄하게 규정하고 있다. > > 그렇다고 이슬람교에서는 유대교나 여호와나 기독교의 하느님 같은 다른교의 유일신을 배척하거나 차별시하지는 않는다. > 다 같은 유일신인만큼 숭배하라고 권한다.즉 타 종교에 대한 관용성이 타 종교에서는 찾아볼수없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 > > > 또한 알라는 낳지도 낳아지지도 않았으며 형태도 모양도 없는 무형의 절대신이므로 어떠한 공물이나 제물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 여기에 우상을 숭배하거나 여러신을 섬기는 다신교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 이 점만 보더라도 기독교의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속성과 이슬람교의 알라의 속성은 엄연히 구별된다. > > 꾸르안의 특색은, 기독교의 성서는 원본이 거의 소실되어 현존하는 것은 거의 다 번역물이고 불교의 불경 또한 석존의 말을 근본으로 하여 > 후세에 개인이나 교단이 기록,편집한 것인데 비해 꾸르안은 무함마드 사후 곧바로 수집,정리하기 시작하여 약 20년 후에는 정본으로 집성하였으며 그 정본이 오로지 하나의 이름하에 유일본으로 오늘날까지 1400여년 동안 통일적으로 보존돼왔다. > > 전술한 바와 같이 꾸르안은 알라의 말이 누구(무함마드)에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얼마만큼이나 전해졌다는 사실정(史實性)이 명백하다. > > > 경전의 언어면에서도 꾸르안의 일관성은 유례가 없다. > 현행 불경이나 성서는 모두가 역서(譯書)로서 원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 그러나 꾸르안은 오늘날까지 처음 씌어진 원어(아랍어)가 그대로 보존되어오고 있다. > > > > > 이슬람에서는 하루 다섯번의 일상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 일상예배는 해뜨기 전 한 시간 반부터 해 뜰 때까지 사이에 2궤배를 하는 새벽예배.정오를 15분쯤 지나서 4궤배를 하는 정오예배,정오예배부터 3시간 지나서 4궤배를 하는 오후예배,일몰후 5분에서 1시간 사이에 3궤배를 하는 저녁예배,저녁예배후 1시간 반부터 심야 사이에 잠들기 전 4궤배를 하는 밤예배로 이루어진다. > 경전에서는 이러한 다섯번의 일상예배를 의무로 하고 있다. > > > > > 어떤사람들은 분초를 쪼개 사는 현대인들에게 하루 다섯번 씩이나 예배를 할 여유가 어디 있냐고 반문하기도 하고 이것을 이유로 일상예배를 시대에 뒤떨어진 구태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 그럴 때면 무슬림인들은 "담배 한 대 피울 사이면 되는 일인데" 라고 넌지시 되받아 친다. > > 사실 4궤배에 걸리는 시간은 기껒해야 10분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 원래가 느긋한 사람들이라 누가 뭐라고 해도 별로 아랑곳하지 않고 꼬박 꼬박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대다수 무슬림들의 모습이다. > > > > > 이슬람국가에서는 어디에 가도 하루 다섯 번씩 인근 사원의 뾰족탑에서 울려퍼지는 낭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이것은 예배시간을 알리는 이른바 "아잔"이다. 그 주인공을 '무앗진'(예배하러 오라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 > > > > 또한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한 달 동안은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먹거나 마시는 것이 일체 금지된다. 담배를 피워도 안되고 부부관계도 금기사항이다. 대낮에 기온이 섭씨 40-5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에서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는 것은 언뜻 보아 끔직한 일이 아닐수 없다. > > > 그러나 종교적인 의무이기는 하지만 ,역시 이슬람 특유의 융통성과 관용성을 반영하여 임산부나 > 해산모,생리중인 여인,노약자,환자,어린이 등은 금식에서 제외된다. > 요약하면 금식이야말로 무슬림들에게 필요한 정신적 훈련이며 사회적 훈련이라는 것이다. > > 여기에 더해 금식은 개인의 의지를 강화하는 도덕적 훈련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자제력을 키우고 굶주림과 목마름 등을 이겨내는 육체적 훈련이기도 하다. > > > 앞서도 말한바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신진대사를 촉진한다는 등 금식이 가져오는 의학적인 효과도 빼놓지 않는다. > 요컨대 금식은 여러모로 유용한 정신적 및 육체적 훈련이다.불교나 기독교 등 여러종교 들에서 많은 고승 대덕들이 이와 유사한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이치에서일 것이다.(계속) > > > > > 9.이슬람의 혼인문제 > > > > > 이슬람은 혼인문제 에서도 여성보호에 세심한 배려를 돌린다. > 예컨대 남편이 지불하는 '마흐르'는 보통 결혼서약을 할 때 결정하고 지불하는데, 결혼하기전에 파혼하게 되면 그 절반을 신부가 차지하며, 만일 약혼남자가 사망하면 마흐르는 물론,남자의 상속권마저도 약혼녀가 취득하게 된다. > > > 그리고 가정의 안정과 여성의 권익보호를 위해 이혼을 '알라가 허용하는 일 중에서 가장 혐오하는 일' 로 낙인하여 가급적이면 억제하고 이혼권은 아내에게도 부여된다. > > 이혼에 신중을 기하기위해 이혼을 선언한 후 3개월간의 이른바 '잇다' 즉 '대기기간' 을 설정하고 재결합을 권유하며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도 한다. > 이 기간에 재혼은 금지된다. 이러한 보호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남성과 사회의 부양을 의무로 하고 있다. > > > > > 마흐르와 함께 나파까(부양)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일차적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데, 만일 남편이 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아내는 법적으로 부양청권을 발동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것을 이유로 이혼을 제기할 수도 있다. > 이슬람에서 여성보호는 사회보호와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 여성들의 히자브 관행이 그 일단을 설명해주고 있다. > > > > > '히자브' 는 아랍어로 '가리개' '씌우개' '가로막기'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가리기 위해 착용하는 겉옷이나 너울 등을 통칭한다. > 여성의 생활관습 으로서의 히자브는 여성을 보호하고 또 여성의 노출로 인해 생겨날수 있는 사회적 문란과 비리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관행으로 해석한다. > > 사실 이러한 관행은 무슬림 여성들 뿐만아니라, 동서고금 여러 나라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원래 히자브는 여성과 사회보호의 차원에서 비롯된 일종의 관행이지 결코 어떤 구속력을 가진 제도나 규정은 아니다. > 그리하여 오늘 이슬람 나라들에서는 그 착용에 대해 폐지하거나 고수하거나,자유에 맡기는 등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계속) > > > > > 10.무슬림들의 의식구조 > > > > > 무슬림들의 의식구조에서 근본은 유일신 알라에 대한 믿음과 복종이다. > 이로부터 출발하여 그들의 삶에대한 태도,즉 인생관이 수립된다. > 무슬림들의 인생관은 한마디로 성선설(性善說)에서오는 적극적인 인생관이다. > 인간에게는 애당초 원죄가 있다고 보는 기독교는 성악설(性惡說) 일 수밖에 없고 불교는 인간의 속성을 두카(duhkha),즉 고행으로 보기 때문에 고행설을 주장한다. > > > > > 이에 비해 이슬람은 알라의 창조에 의해 착한 속성을 타고난 인간이기에 삶을 낙천적으로,적극적으로 영위하라고 격려한다. > 교조 무함마드 의 언행록인 "하디스"에는 "인간은 순수하게 태어난다" > "오래살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최상의 인간이다" 라고 찬미하고 , > 오래 살아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으니 "죽음을 원하지 말라,범죄자도 죽음을 원하지 말라" 고 무모한 죽음을 경고한다. > > > > > 무슬림들의 중용적인 의식구조는 관용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 이러한 관용성은 그들의 종교의무 수행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바 예를 들면, > 매해 한 달씩 행하는 금식에 병이 있으면 금식하지 않아도 무방하고,먹을것이 없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면 > 종교적으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먹어도 된다. > > > > > 요즘 무슬림들의 'IBM' 에 골탕먹은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들여오는데 "I"는 '인샬라'(In Shal Llah). > B는 '부크라'(bukrah), M은 '마 알라이쉬'(Ma alaish)라는 아랍어 단어의 첫 자모음이다. > '인샬라'는 '알라가 원한다면', '부크라'는 '내일', '마 알라이쉬'는 '괜찮아,무얼 그러느냐'라는 뜻이다. > 이 세 글자의 합성은 그야말로 멋진 삼박자 화음이다. > > > > > 어떤 고객이 일주일 후에 제품을 인수하기로 계약서를 쓰고 도장까지 찍고는 아랍인 화주(貨主)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거듭 강조하니, 화주는 "인샬라"라고 대답한다. 낯선 고객은 굳은 서약인 줄 알고 안심한다. > 약속한 날짜에 찾아간 고객은 제품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 이에 화를 내자 화주는 태연하게 "부크라"라고 응수한다. > > 다음날 다시 찾아갔더니 또 마련되지 않았다고 한다. 홧김에 심하게 추궁하니 화주는 여전히 덤덤하게 "마 알라이쉬"라고 능청을 부린다. 알고 보니 이것이 그들의 'IBM' 관행이다. 지레짐작해야 한다. > 전지전능하신 알라가 함께하고 새털같은 세월이 있는데 무얼 그리 서두르냐는 여유작작함과 자신감, > 그리고 조급한 세태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응일 수도 있다. > > 정녕 '인샬라'(盡人事待天命)는 그들만의 전유물인 성싶다. > '인샬라'를 두고 노력보다 운에 맡기는 게으른 타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 다른 한편으로 시간과 일정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긴박한 현실에 쪼들리지 않는 마음의 넉넉함을 말해준다고도 볼 수 있다. > > 흔히들 무슬림들의 언행을 놓고 '다언요설(多言饒舌)', 즉 말이 많고 수다스럽다고들 한다. 그것도 어지간히 높은 목소리로 말이다. > > > 그들은 한잔의 농차(濃茶)를 앞에 놓고 이야기(싸하르,夜話)로 하룻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 아마 이 세상에 '천일야화(千一夜話)'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랍-무슬림들밖에 없을 것이다. > > 여기에 다양한 몸짓은 또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 긍정하면 머리를 조금 끄덕이면서 두 눈을 깜박거리고 부정하면 입술을 내밀거나 두 눈썹을 치떠올리고 감사나 사양할 때는 오른손을 왼가슴에 대고 머리를 약간 숙이고, 의기투합하면 서로 손바닥을 마주친다. > > 부를 때는 손과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는데,손가락 하나를 위로 올려 부르는 것은 공격적인 의미이니 주의해야 한다. > 눈짓, 손짓, 얼굴표정, 전신동작 등 모든것이 다 동원된다. > 이를테면 비언어적 의사소통인데, 웬만한 것은 다 통한다. 실로 표현의식이 강한 사람들이다.(계속) > > > > > 11.이슬람의 여성관(2) > > > > > 이슬람의 생활문화에서 늘 주목을 끄는 것은 여성들의 삶이다. > 여성을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남성에 대한 타자(other)로, 그리고 불완전하고 우연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여성관이 > 지난 시기 문명권을 지배해왔다. > > 당초 여성을 '악마의 통로' 로 저주해온 기독교문화나, 순종을 여성의 미덕으로 추구해온 유교문화, > '여신불성불(女身不成佛)'로 여성을 도외시행온 불교문화를 막론하고 이른바 제도종교가 샤마니즘과 같은 확산종교 보다도 더 심한 여성차별제도를 고수해왔다는 것이 종래 학계의 중론이다. > > 그래서 역사는 여성차별의 역사라고 까지 말하는 것이다. > > > 제도종교로서의 이슬람도 과연 그러할까. > 조건부로 허용된 '일부다처제'가 미개시대의 그것과 동일시되고, 보호차원에서 관행이 된 여성들의 남성 외면이나 히자브 관습이 후궁들을 환관의 감시에 격리하기 위해 만든 동로마시대의 '하렘제도(후궁격리제도)'와 > 일맥상통한 것으로 오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 게다가 근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지막지한 탈레반 정권이 시행한 비이슬람적 여성차별시책을 보고 > 마치 그것이 이슬람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 이슬람은 단순히 권리와 의무에서 남녀간 평등이라는 보편개념을 초월하여 인격적 차원에서 여성과 남성을 동격시 한다. > 하나의 영혼에서 창조된 남성과 여성은 동종의 인류로서 동등하게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슬람은 남녀에게 > 서로 보호자요 관리자요 협력자임을 자임케 한다. > > > > > 경전 꾸르안은 이러한 동격체격인 상부상조의 관계를 "여성은 남성의 옷이고, 남성은 여성의 옷"이란 간결한 말로서 표현하고 있다. > 바로 이러한 숙명적인 상관성으로 말미암아 남녀는 공동으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 사회와 가정을 꾸려나가야 할 의무를 함께 지니고 있다. >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녀가 보호자, 협력자의 입자에서 서로 결합해, 즉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 > 이슬람에서 결혼은 사회적 의무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무이기도 하다. > 결혼은 남녀 당사자와 알라 간의 엄숙한 약속으로서 그 의의를 말하자면 개인이 수행하는 종교적 의무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본다. > > > 그리하여 결혼을 신성시하고 의무로 여겨 적극 권장하지 패륜으로 기피하거나 죄악시 하지 않는다. > 이에 결혼부정관이나 혐오관, 독신주의,그리고 남존여비와 부창부수,삼종지도 와 칠거지악 같은 여성 기피나 > 비하의 윤리도덕은 이슬람사회의 혼인제도나 부부관계에서는 양립할 수 없다. > > > > > 초기 기독교는 결혼을 부정하고 독신주의를 권장했다. > 바울은 음행이 성행하니 할 수 없이 남녀가 결합하기는 하는데 최선책은 약혼녀 마저도 결혼하지 않는것(고란도전서 7:38)이라고 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부부간의 쾌락은 용서 가능한 죄이며 여성의 영혼은 소중하나 그 육체는 '적으로 증오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 다행히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결혼을 긍정하게 되고 성서적 의도가 복원되어 '독신주의'가 부정되어다. > > > > 혼인문제에 있어서도 여성은 자기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 여성을 남자의 청혼을 거절할 수 있으며,남자로 부터 받는 마흐르(mahr, 신부값)는 전적으로 신부가 소유한다. > 비록 의무로 되어있지만, 신부의 소신에 따라 마흐르를 사양할 수도 있다. > > 마흐르란 남녀간의 합법적 결합의 상징으로서 남자가 약혼녀에게 지불한다. > 이것은 결혼할 때 신부가 지참하는 지참금과는 다르다. > 마흐르는 "여인들에게 마흐르를 선물로 줄지어다" (4:4)라는 경전의 계시에 따라 의무가 되었다. > 마흐르 뿐만아니라 남편은 부인의 모든 사유재산에 간여할 권리가 없다. > 결혼후 부인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취성관행도 없다. 흔한일은 아니지만 남편이 가족부양 등 소정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아내가 주도적으로 이혼을 제기할 수 있다. > > > 이와같이 혼인문제에서 무슬림 여성들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다른 전통사회보다 월등하다고 말해도 좋다. > > 여성의 동격성과 자립성을 확보하는 데서 재산권과 상속권의 보장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 이슬람법에 의해 여성은 자신의 사유재산에 대해 절대적인 권리를 행사한다. > 성년이 된 여성은 부친이나 형제,남편,자식,그리고 그 누구와의 상의 없이 재산을 자의로 처리할 권리를 갖는다. > > 재산의 취득기회도 남성과 동등한바, 상속이나 증여,본인의 노력에 의해 재산을 임의로 취득,축적할 수 있다. > 이러한 권리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공인,보장된 여성 본연의 권리로서 결코 타인(예컨대 남편)과의 어떤 계약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 > > > > 이슬람 초기부터 요지부동의 법규로 굳어져서 실천해온 이러한 무슬림여성의 권리 행사는 근세까지 여성을 '행위무능자'로 규정하여 아내의 재산권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던 서구의 여성상과는 분명하게 대조적이다. > 프랑스 혁명은 자유.평등.박애라는 인권선언을 했지만,남녀의 성적평등에는 지극히 인색했다. > 시민은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 양분되고, 후자에 속하는 무재산의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 나폴레온의 민법전에도 아내의 재산권과 소송권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 이런것들이 바로 근세에 와서 유럽에서 여권운동이나 남녀평등권 운동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계속) > > > > 12.이슬람의 여성관(3) > > > > > 이슬람은 여성의 재산권과 더불어 상속권도 꾸르안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 경전 꾸르안은 "남자에게는 부모와 가까운친척이 남긴 재산의 몫이 있으며,여자에게도 부모와 가까운 친척이 남긴 재산의 몫이 있나니, 각자에게는 적건 많건간에 규정된 몫이 차려지리라"(4:7)라고 명시하고 있다. > > 그 밖에도 상속인과 상속액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 > > 이슬람은 남녀가 모두 알라의 피조물로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동격체이지만 생물적,사회적,문화적,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역할과 책임이나 기능이 꼭 같을 수는, 즉 공평할 수는 없다고 간주한다. > 따라서 법제나 관행상에서 남녀간에 구별이 있게 마련이며, 여성에게는 특별한 배려나 혜택이 돌아가는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믿는다. > > 요컨대 남녀가 경쟁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이고 공동체적인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 서로간의 평등과 공평이 무조건 동일시 될수없어 유별(有別)이 불가피 하다는 것이다. > 이러한 유별관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이슬람의 에 대한 많은 오해와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 > > 경전속의 관련계시가 오해되는가 하면 상속액에서 남녀간에 차이가 나고 남편이 아내를 부양하는 것이 남성우월주의와 남존여비로 비쳐지고,마흐르로 치러지는 혼인이 구래의 매매혼으로 매도되며,유별이 불평등이나 불공평으로 > 여겨지기도 한다. > > > > > 이슬람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고 따르며 남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을 여성의 미덕으로 본다. > 이의 반대급부로 남성은 '알라께서 대단히 유익한 존재로 되게한' 여성을 친절히 대하고 미워하지 말것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 > 경전에는 "여인들을 친절히 대하라.만약 너희들이 그녀들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알라께서 대단히 유익한 존재로 되게하신 것을 미워하는 것과 같을 지니라"(4:19)라고 씌어있다. > 그러나 아내가 이러한 미덕을 저버리고 남편을 공경하지 않으며 여성으로서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경우에는 먼저 충고를 하고 안되면 집안에서 별거생활을 하다가 그것마저고 안되면 가볍게 상처가 나지 않을 정도로 때려 준다. > 만일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양측의 친척중에서 각각 한 명씩의 중재자를 내어 절충을 시도한다. > 이것마저도 실패하면 그제야 이혼을 공식화한다. 이러한 수준은 경전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다. > > > 여기에서 보다시피 남편에 대한 아내의 공경문제나 그를 에워싸고 발생하는 분규의 해결책은 > 남녀 유별에서 오는 남성의 지위나 권리 행사이지 결코 가부장적인 남성일방주의는 아니다. > 이슬람의 여성 유별관은 여성에 대한 여러가지 특혜에서 나타나고 있다. > 이슬람은 부모에 대한 효도를 알라의 지고한 명령으로 받아들이며 인간행위의 규범중에서 의무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 > > 꾸르안에는 "..부모에게 선행을 베풀고,부모중의 한분이나 두 분 모두가 늙으시면 절대로 싫다거나 비난하는 말을 하지말고 좋은 말만 할지어다"(17:23)라고 부모에대한 효도를 명하고 있다. > 부모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우대와 효도는 각별하다고할 수 있다. > > 교조는 누구를 잘 보살펴야 하는가 하는 한 신자의 물음에 답하면서 "천국은 어머니의 발 밑에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그래서 자식이 품고있는 애정의 4분의 3은 어머니의 것이고 나머지 4분의 1은 아버지의 것이라는 경모(敬母)의 속담까지 나오게 되었다. > 이렇듯 보살핌이 강조된는 이슬람에서 여성은 각종 > > 혜택을 누리고 있다. > > > > 생리기간이나 출산전후에는 종교의무를 면제받고 금요일 집단예배에는 임의의 참여권이 부여되며 > 마흐르는 아내의 전속물이다. 또한 가족부양의 책임은 전적으로 남편의 몫이어서 여성이 가족부양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으며, 여자는 딸이면 아버지의, 누이동생이면 오빠의 부양을 받는다.(계속) > > > > > > > 13.한국과 이슬람: 신라와 이슬람의 만남 > > > > >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255년경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원나라 헌종에게 파견한 사신 뤼브뤽이 그의 여행기에서 > '섬의 나라 까우레'라고 한마디한 것이 한국에 관해 유럽에 알려진 첫 소식으로,그리고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해온 스페인 선교사 세스뻬데스가 1593년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에 도착한 것이 >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행으로 알려져왔다. > > > > > 또한 1627년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한 네덜란드 상선 오우베르케르크호가 한국 해역에 나타난 최초의 이양선 이라고 여겨져왔다. > 이처럼 한국과 서양의 만남이 뒤늦게 이루어지다 보니 근세에 이르러 서구인들이 눈에 비친 한국은 세상이 알지못하고,또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이른바 '은둔국'의 모습이었다. > > 한국에 은둔국이란 이름 아닌 이름을 붙인 사람은 미국의 동양학자이며 목사인 그린피스다. > 그는 일본 도오꾜대학 교수로 있을 때인 1871년 한국에 처음왔다. 모든 것이 금시초견이고 초문이라서 의아스럽기만 하였다. > 돌아간 다음해에 그는 "은둔의 나라 한국" 이란 책을 펴냈다. > 그가 한국을 일컬어 '은둔국'이라고 한 것은 세상을 등지고 어디엔가 숨어살아온 한국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뜻에서였다. > > 2년후 한국에 온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도 "한국역사"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 하였다. > 그러면 과연 한국은 그네들이 빈정대듯이 호젓하고 닫힌 나라였는가? 서구인들의 주장처럼 그들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확답은 역사에서 주어지고 있다. > > > 뤼브뤽 보다 4-5백년,세스뻬데스 보다는 무려 7-8백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무슬림들이 오갔을 뿐만아니라,정착까지 하였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귀중한 사료가 중세 아랍 문헌 속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 요컨대 한자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만방에 소개한 사람은 다름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무슬림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만치 1천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 중세 무슬림 학자들은 자신들의 견문이나 연구 및 기타 여행가들의 견문 등을 토대로 하여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지견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기술하였다. > > > > 신라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첫 기록을 남긴 사람은 쑬라이만이란 아랍 상인이다. > 그는 현지체험기인 "중국과 인도 소식"(851)에서 신라가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음을 밝혔다. > 그후 아불 피다 같은 지리학자는 신라의 경도와 위도까지도 상세히 기술하였다. > > 이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지리관념이 타파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이 첨가되었다. > 10세기 이후 신라에 관한 그들의 지식은 한층 세밀해졌다. > 특히 중세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씨가 작성한 세계지도에는 신라를 중국 동남해상에 위치한 섬의 나라로 명기하였다. > 이것은 서방의 세계지도에 처음 한국이 등장한 벨호의 지도(1562)보다도 무려 408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서 > 한국명(신라)이 기입된 현존 세계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 > > > > 아랍-무슬림들로서는 수려한 자연환경과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는 신라가 비록 멀기는 하지만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 그리하여 그들은 이 방면에 관한 여러 가지 생생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 지리학자 마끄디시가 "창세와 역사서"(966)에서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고 하는 나라가 있는데, >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뿐만 아니라,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라고 기술한 것이 그 한 예다. > 저술자들은 또한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특히 황금이 풍부하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 있다. >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문자 그대로 '황금의 나라'였다. > > > > > 최초로 신라를 세계지도에 명기한 이드리씨는 "그곳(신라)을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데 있다. > 그 가운데 서도 금은 너무나 흔한바,심지어 그곳 주민들은 개의 목을 묶는 줄도 금으로 만든다"라고 기상천외의 놀라움을 토로했다. > 만인이 그토록 선호하고 귀중히 여기는 황금이 신라땅에서는 개줄에서 가옥의 단장에 이르기 까지 그토록 흔하게 쓰이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못내 놀랍고 부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 > 이렇게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넉넉한 부의 혜택을 누리는 신라인들의 생활상은 한마디로 이상향적이었다. >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의 나라다. > 그곳에서는 불구자를 볼수 없다.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의 향기가 풍긴다고 한다. >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말끔히 치유된다." > 이것이 중세 아랍-무슬림들의 눈에 비친 신라인들의 생활모습이다. > > 또한 그들은 신라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며 '양순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바로 이것이 외래인들이 신라를 찾아갔다가 떠나려 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 > > > > 이렇듯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으로 선망하였기 때문에 아랍-무슬림들이 신라에 오갔을 뿐만 아니라,정착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 이 대목에서 신라의 대표적 향가이자 설화인 처용설화의 주인공 처용의 정체문제는 흥미있는 주제가 아닐수 없다. > 이 설화의 최초 저본인 삼국사기는 처용 일행을 어느 날 동해가에 나타난,모양과 의상이 괴이한 4명의 자연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 그러나 이 책보다 약400년 후에 씌어진 삼국유사에는 느닷없이 처용이 동해 용의 한 아들로 둔갑하면서 신비와 주술이 함께하는 설화로 윤색,가공되어버렸다. > > > > > 기록에 따르면 때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5년(879)3월,장소는 개운포(오늘의 울산)다. > 그러면 그 무렵 신라의 최대 국제무역항인 울산에 나타날 수 있는 낯선 외방인이라면 과연 누구였을까? > 서구인들이 나타나기에는 아직 500년이나 이른 시기이고 보면 분명히 당시 지중해로부터 홍해와 인도양, > 서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남해 전역을 무대로 누비던 아랍-무슬림들 중 몇몇 사람이라고 추정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 > > > > 아랍-무슬림들이 범선을 타고 사나운 파도를 가르던 그 바닷길을 따라 일찍이 아랍 땅에 찾아간 한국인도 있었으니,그가 바로 신라의 대덕고승 혜초이다. 그는 727년경 구법차 천축(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식(아랍)을 역방하였다. >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물론,중국을 포함한 한자문명문명권 내에서도 처음으로 아랍 현지를 방문하고 유명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 이 견문록은 8세기의 서역에 관한 기록 중에서 단연 으뜸가는 진서로 공인되고 있다. > > > > > 신라와 아랍간에는 교역도 진행되고 있었음이 아랍 문헌에 의해 확인된다. > 아랍-무슬림들의 신라 왕래에 관한 첫 기록을 남긴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는 역사지리서 "제도로 및 제왕국기"(845)에서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황금의 산출,그리고 아랍인들의 왕래에 관해 기술한 다음 신라에서 수입한 물품으로 비단,검,사향,침향,말안장,초피,도기,범포,육계(肉桂) 등을 나열하고 있다. > > > > > 이와 더불어 한반도에서도 아랍을 비롯한 서역계의 유물이 다수 발굴되고 있다. > 그 대표적인 것이 유향과 안식향(安息香)을 비롯한 아랍산 향료,신라 고분과 사찰에서 출토된 각종 유리기구, > 일반 서민들까지도 애용한 슬슬(서역산 보석)이나 구슬 같은 기호품,단검이나 토용 등이다. > 그리고 신라인들은 서역에서 수입한 침향이나 육계,낙타 등을 일본에 재수출하는 중개무역의 지혜도 발휘하였다. > > 경주에서 남쪽으로 얼마쯤 가면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이른다. > 신라고분군과는 좀 동떨어진 이곳에 원성왕(8세기)의 능으로 짐작되는 괘릉이 자리하고 있다. > 제왕의 성역에 이색적인 용모와 복장을 한 장구(長軀)의 무인석상 한 쌍이 능을 수호하고 있다. >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길게 드리운 구레나룻,움푹 패인 큰 눈과 우뚝 선 매부리코, > 우람한 몸통,어느 모로 보나 전형적인 중세 서역(오늘의 중앙아시아와 중동지방)인의 모습이다. > > > > 안강의 흥덕왕(9세기)능에도 이와 비슷한 무인석상이 있다. > 신성한 묘역에 이례적으로 이러한 석상을 세운 것은 서역인의 장대한 기골과 이색적인 용모에서 오는 수호적 기능을 노린 것으로 사료된다. > 이 요지부동한 무인석상이야말로 신라인들의 높은 지혜를,그리고 그들과 서역인들 간에 있었던 어울림과 > 만남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오면서 오늘도 무언가를 더 증언하려는 성싶다.(계속) > > > > > 14.이슬람에 대하여:고려와 이슬람 > > > > > 한국과 이슬람세계 간의 교류상을 감안할 때, 한국은 결단코 은자의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 > 그러기에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신라에 이어 고려와 조선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왔던 것이다. > > 고려시대는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의 역사에서 새 장이 열린시대다. > 이 시대의 초엽에는 아랍 상인들이 대거 몰려왔고,말엽에는 주로 이슬람을 적극 수용하고 십분 활용한 원제국(몽고)을 통해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영내에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으로나마 형성되었다. > > > 이러한 사실은 당대의 여러문헌에 의하여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 > '고려사' 나 '고려사 절요' 같은 서적을 펼쳐보면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回回)' 나 무슬림을 일컫는 '회회인(回回人)'에 관한 기사가 간간히 보인다. 모두가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들이다. > > > > > '고려사' 의 기록에 의하면 1024년과 1025년,1040년에 열라자,하선,보나합을 비롯한 아랍 상인들이 > 100여명씩이나 무리를 지어 수은,물약,소목 같은 방물을 가지고 상역차 개경에 찾아왔다. > 고려왕은 그들에게 개관까지 마련하여 후대하고,돌아갈 때는 금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 > 동방예의지국다운 처사이며 두 이질문명간의 화목한 만남이다. > > > 고려말에 이르러서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는데,그것은 몽골초원에서 달려온 기마유목민과 통칭 '색목인'이라는,그들의 문화교수인 서역 무슬림들이 주도하였다. > 원제국에서 색목인들은 몽골인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제국의 내정은 물론 원정을 비롯한 대외관계에서도 두뇌역할을 수행하였다. > > 원대 조정에서 '문화교수'의 특수한 입지를 갖고 있던 무슬림들은 타의반으로 원제국의 고려 정략에 동참하여 > 사신,역관,서기,근위병,시종무관 등 여러 직분으로 고려에 공식 파견되었다. > 그밖에 상인이나 민간인들도 다수 고려에 왔다. > > > > > 그들중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고려에 잔류하여 귀화하고 동화한 자들도 있었다. > 이 무슬림들은, 특히 귀화무슬림들은 중세 한반도 무슬림들의 비조가 되고 이슬람의 정초자가 되었다. > 그 대표적인 일례가 삼가(三哥)장순룡(張舜龍)이다. > > > > > 삼가는 1274년 고려 충렬왕의 몽골비(妃)인 제국(齊國)공주(원 세조의 딸)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다. > 원래 삼가는 원나라에 있을때도 고관직을 제수받은 인물로,비록 공주의 사속인으로 고려에 왔지만 > 곧바로 벼슬이 낭장에서 장군을 거쳐 첨의참리까지 올랐다. > > 그는 덕수현(德水縣 ,현 북한 개성직할지 개풍군)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고려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남기고 44세에 별세하였는데, 후손들은 본관을 덕수로 하고 그를 덕수 장씨의 시조로 모셨다. > > >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선위하고 순룡의 자택에 이사와서 기거하며 그 집을 덕자궁(德慈宮)으로 불렀다고 하니 > 순룡에 대한 왕의 두터운 신임과 그가 누렸을 권세를 가히 짐잘할 수 있다. > > 오늘날까지 12종파 25대로 이어져내려온 덕수 장씨의 문중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많은 명인들을 배출하였다. > 순룡의 맏아들 양(良)은 판사(判事)를 지냈고,8대손인 정(珽)은 연산군 때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했다. > 특히 12대손인 장유(張維)는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우의정까지 올라 명성을 날렸으며,'계곡집(谿谷集)'같은 명문집을 남겼다. > > > 지금도 명문대가로 그 후예들이 선조의 종묘가 모셔져 있는 평택을 중심으로 하여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 > 삼가의 귀화후 일족의 신앙생활은 밝혀진바 없으나, 적어도 몇세대까지는 무슬림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덕수장씨의 후예들은 남한에만 총 4554가구에 1만 9366명이 살고있다. > > > 무슬림으로 고려 충렬왕 때 귀화하여 서임된 이로는 삼가외에 민보(閔甫)가 있다. > 벼슬이 대장에 까지 이른 그는 매를 가지고 다섯번이나 원나라에 사행하고 충선왕 때에는 평양부윤이 되어 존무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 > 삼가나 민보 보다는 좀 뒤늦게 고려에 와 귀화하고 관직에 있었던 무슬림으로는 경주 설씨의 시조인 위구르 출신의 설손이 있다. > 원래 그는 원나라 순제 때 황태자에게 경전을 가르칠 정도로 문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 그러다가 지방에 좌천되자 교분이 있던 공민왕을 찾아 고려로 와서는 봉후(封侯)되고 전답까지 하사받았으며 > 고려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 > 설씨 일가는 여말선초의 명문가로서 조선조 개국시 명나라에 여덟차례나 사행한 장자 장수(長壽)를 비롯하여 여러 명인들을 배출하였다. > > > > 태조때 장수가 연산부원군에 봉해지자 계림(鷄林)을 하사받아 본관을 경주로 정했다. 경제기획원의 같은 조사에 따르면, 현재 경주 설씨는 남한에 총 442가구에 인구 1952명이 살고 있다. > 설씨 일가와 비슷한 경륜을 가진 가문으로는 임천(林川) 이씨가 있었다. > > > > > 이와같이 몽골 통치시기에 '준 몽골인'으로 고려를 찾은 무슬림들,귀화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전파와 정착에 > 선도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회에서 상당한 권력도 행사하였다. > 회회인들은 신전(新殿)에서 왕을 위해 향연을 베풀고 때때로 왕을 자신들의 연회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 > > > > 충혜왕은 피륙을 회회가에 나누어주어 그 이익을 취하게 하였으며,매일 그들로부터 15근의 쇠고기를 상납받았다. > 몽골풍에 젖은 우왕은 한 무슬림 가정의 아들과 딸을 데려다가 시종케 하였으며, 매를 관리하는 응방(鷹坊)에는 > 많은 무슬림들이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 > > > > 이즈음에 고려의 개경에는 이미 무슬림들의 공동생활체가 형성되어 하나의 사회경제적 세력으로서 고려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에 이르는 약 150년간에 원나라에서 유입된 무슬림들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에서 취락을 이루고 집단거주하며 고유의 생활양식과 종교의식을 유지하였다. > > > > > 무슬림들의 도래와 더불어 그들의 음식문화도 들어왔는바 실례로 송도 설씨가 만든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적(薛炙)은 소고기나 소의 내장을 고명하여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인데,오늘날까지유행하고 있는 중동의 케밥이나 동남아의 사떼와 흡사하다. > > 앞에서 언급했듯이 덕수 장씨는 명문가로서 그 세가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 > > 후손들은 가문의 안녕과 길복을 빌기 위해 대대로 '장말도 당굿'을 벌인다. > '장말'은 '장(張)마을'의 준말로 덕수 장씨가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 지금도 경기도 부천시 중동에 사는 약 40여호의 장씨 후손들은 매년 10월 1박 2일간 굿과 제사가 혼합된 장말도당굿을 지낸다. > 원래 이마을 장씨들은 평택에서 살았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 > > > > 음식문화에서 또 한가지는 소주로서, 한국의 이 소주는 그 연원이 고려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 내침한 몽골군이 가죽 술병에 넣고 다니면서 마시는 아락주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것이 바로 증유주인 소주다. > 그런데 원래 이 소주는 유목민인 몽골인들의 것이 아니라 몽골서정군이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을 > 공략할 때 농경민인 서아시아인들에게서 그 양주법을 배워온 것이다. 세번 고아내린 증유주라 하여 이름 붙여진 소주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 > 그 뒤 소주는 중동지역에서 줄곧 전승되어왔다. 한국에서 소주는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일본원정을 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한후 원정군의 본영이던 개성과 전진기지가 있던 안동과 제주도 등지에서 처음으로 빚어졌다. > > 문명간의 만남은 서로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 > > > 그러나 고려시대의 두 문명의 만남과 교류는 보다시피 대부분 제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는 퍽 미숙한 상태였다. > 당대 고려에 관한 대표적인 이슬람 문헌기록으로는 라쉬듯 딘의 세계통사 '집사'가 있는데, 이 책에서 이러한 실상을 찾아볼수 있다. > 라쉬듯 딘은 저서에서 이슬람학자로서는 최초로 한국을 신라가 아닌 카올리(Kao-li)라고 칭하면서 고려를 원의 12개성 중 한개 성(제3성)에 포함시키고 있다. > > > > > 그리고 고려의 왕권정치를 지적하고 동골과의 혼인관계도 언급하고 있다. > 모두가 사실과는 어긋남이 없으나 극히 소략한 기술에 머물고 있다. > 이상에서 보다시피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은 주로 몽골의 내침과 간섭이란 역사적 배경에서 어찌보면 단향적(單向的)으로 이루어 졌다. >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만남이었기에 이슬람의 전파나 수용은 역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 따라서 길지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영향은 자못 심각해 후대인 조선시대와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다.(계속) > > > > > 15.이슬람에 대하여:조선과 이슬람 > > > > > '조선왕조실록' 을 비롯한 여러 사적에는 전대의 문헌기록과 마찬가지로 회회인들의 정착 내지는 회활동과 지위에 관하여 누누이 언급돼 있다. > 실록에 따르면 1407년에 회회교의 이맘인 '도로'가 처자를 데리고 내조하자 태종은 집을 주어 살게 하고서는 그에게 여러가지 특전을 베풀었다. > 그러던 태종이 국가재정이 어려워지자 왜인과 회회인들에게 주던 녹을 줄이라고 하명하였다. > > > 회회인들에게 주는 녹을 줄여서 국고를 충당할 정도라면 녹을 받은 회회인들이 수적으로도 많거니와 그들의 직위 또한 상당히 높았음을 시사해준다.\r\n또한 세종실록을 보면 당시 무슬림들은 조정의 특별한 배려속에 살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 > > > > 회회노인(무슬림 원로)과 회회승도들은 그들 나름의 이색적인 복식을 하고 근정전에서 거행되는 신년하례의식이나 동지 망궐례(望闕禮)같은 각종 궁정행사와 의식에 신하들과 함께 꼭꼭 참석하곤 하였다. > 임금에 대한 그들의 하례는 당대 무슬림들이 누리고 있는 사회적 위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 > > > > 한편, 인화와 상술에 능한 무슬림들은 조정과의 관계에 각별한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 일례로 회회사문 도로가 태종에게 모자에 다는 수정구슬을 방물로 진상하자 왕은 보답으로 쌀 5석을 하사하고 > 금강산과 순흥,김해등지에서 수정을 채집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 도로는 마침내 300근이나 되는 수정을 채집해 태종에게 헌상하였다. > > 이러한 조정의 배려속에서 선초까지도 무슬림들은 그들 특유의 복장을 하고 이슬람식으로 궁정의례를 치렀으며,불승들과 동등한 서열로 조정하례에 참석하였다. > > > 그러다가 그들이 이미 한화(韓化)되어 여느 백성과 다를 바 없게 되자 세종대에 와서는 무슬림들의 이방적인 행태를 금하도록 하였다. > 세종대왕은 회회인들의 의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백성이 아니라고 하며 혼인하기를 꺼리므로 > 이미 백성이 된 이상 한식 복장을 따르고 이슬람식 송축예법도 폐지해야 한다는 예조의 상주를 듣고 곧 그렇게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 >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슬람교는 조정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무슬림들은 평등하고 자유로이 >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 > > > > 역법과 관련이 있는 천문기상학과 천문관측기기의 제작에서도 이슬람천문학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 아직 연구가 미흡하여 구체적으로 밝힐단계는 아니지만 조선조에 제작,정비된 대소 간의(簡儀)나 혼천의(渾天儀), > 해시계인 '앙부일구',물시계인 자격루,태양과 별의 운행시간을 관측하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 여러가지 천문관측기기들은 원대 중국에 도입되었던 동류의 이슬람 천문기기들과 구조나 기능에서 대동 소이하다. > > 그중 자격루에 맞먹는 소리나는 물시계가 이슬람에서는 이미 8세기에 만들어져 프랑크 국왕에게 선물로 보내지기 까지 하였다. > > > 이와 더불어 공예기술 면에서도 이슬람문명의 흔적이 엿보인다. > 그중 하나가 도자기의 청색안료인 회청(回靑,혹은 회회청-muslim blue)의 도입이다. > 원래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지역에서 산출되던 이 안료는 > 무슬림 상인들을 통해 중국과 한국(조선조)에 수출되었다. > > 이 새로운 안료를 사용하여 15~16세기경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청색무늬를 넣은 독특한 청화백자가 출현하였다. > 조선조에서는 세종 때까지 백자가 자기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세조 때에 와서 중국에서 회청이 들어오자 화려한 청화백자가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 그러나 원료의 수입이 어려워서 생산량은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국내산 안료가 개발됨에 따라 청화 백자는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 > > > > 조선시대에 한국에 관한 기록을 남긴 무슬림학자는 오스만 터키 출신의 알리 아크바르이다. > 그는 1500년대 초 오아시스 육로로 호탄(현 위구르 자치주)을 거쳐 중국을 방문하고 나서 1516년에 페르시아어로 > 중국여행기 "키타이서"를 저술하였다. > 저술시기는 조선시대이지만 그 내용은 고려에 관한 것이다. > 저자는 여행기에서 카올리,즉 고려는 12개 중국 행정지역의 하나로(제 9지역)로서 소규모의 영세상인들조차도 > 15만 시르의 자금을 갖고 있을 정도로 굉장히 부유한 지역이며,그곳에서 생산되는 아마포는 품질이 우수하다고 하면서 카올리 상인들에게서 은화로 여러가지 상품을 구입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 > > > >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시대.특히 그 말엽부터 조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 동안 진행된 이슬람과의 만남은 여러모로 상승일로를 걷고 있었다. > 그러나 급변하는 대내외 정세에 밀려 이러한 상승세에 제동이 걸려 급기야 그후 수세기간의 단절기,공백기를 겪게 되었다. > > > 우선 대외적으로 그간 한국에 대한 이슬람의 '공급원'역할을 해오던 원나라가 망하고, 한국에 대한 이슬람의 관문역할을 해오던 중국이 해금(海禁),관금(關禁) 등 대외폐쇄정책을 실시(명조)한 데 이어 무슬림들에 대한 심한 탄압정책을 자행(청조)하였음며, 이에 더해 서세동점의 새로운 국제정세하에서 무슬림들이 제해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 > > > > 이 모든 객관적 정세로 인하여 이슬람의 동방진출이 전반적으로 퇴조되고 한반도로의 이슬람 유입 루트가 소멸,차단되었던 것이다. > 그후 무슬림들이 집단적으로 한반도에 이주해 자그만한 공동체를 이루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부터다. > 그들 대부분은 1917년 러시아 볼세비끼혁명 이후의 투르크계 망명자들로서 만주를 거쳐 일제 치하의 한국에 들어왔다. > 약 200명으로 추산되는 그들은 신의주,혜산,평양,흥남,서울,천안,대전,대구,부산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 일제의 비호하에 각종 생업에 종사하였다. > > 그들은 서울에 학교와 사원을 세우고 경전 꾸르안을 출간하여 이슬람교육과 종교의례를 계속하였고, > 홍제동 부근에 무슬림 전용묘지까지 마련하여 전통을 지켜나갔다. > 그러다가 1945년 한반도 광복과 1950년의 한국전쟁이란 잇따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대부분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말았다. > > > > 한편,그들이 경영하는 점포에서 일하던 몇몇 한국인들이 그들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는데,그들을 현대 한국 무슬림의 비조라고 할 수 있다. > > 그뒤, 우리들이 잘 아시다 시피 여단 규모의 터키군이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한국 무슬림공동체가 형성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그들은 후방에서 '앙카라학교'를 세워놓고 전쟁고아들을 양육하였으며,종전 후에는 군 이맘 압둘가푸르가 직접 > 대민선교에 나서서 현대 한국 무슬림의 제 1세대를 탄생시켰다. > 그의 인도하에 1세대들은 1955년 드디어 첫 이슬람공동체인 '한국이슬람협회'를 결성하여 이슬람 정착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 > > 그후 여러 이슬람국가들과 국제이슬람단체들의 형제애적인 지원과 한국무슬림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해 한국 무슬림공동체는 점차 구색을 갖추고 의젓이 자라나, 마침내 서울 중앙사원을 비롯해 전국에 5개의 사원을 건립하고 약 4만명의 신도를 구성원으로 갖게 되었으며, > 범 세계적 이슬람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끝) >
링크 #1
링크 #2
왼쪽의 글자를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