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9-16 19:49
이슬람에 대하여
 글쓴이 : …
조회 : 588  
1.이슬람에 대한 오해

주지하고 있는 바와같이 이슬람교는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오해와 왜곡, 심지어 능멸을 당하는 종교다.
이러한 오해의 주된 원인은 피해의식에서 오는 배타성이나  외부세계의 비이성주의적 발상과 행태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과 행태의  진원지는 대부분 유럽과 유럽인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동양과 동양인들에게서는 이슬람에 대한 백안시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의도적인면과  더불어 선의의 무지도 한 요인이  되어왔다.




이슬람에대한  낭설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한 손엔는 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다.

이  말이 마치 이슬람의  징표인 양 오인되고 있다.
그러나 말아닌 이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한
이태리 스꼴라철학의 대부격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74)로 알려져있다.




원래 이슬람은 그 어의(語意)가 말해주듯, 또 경전에 누누이 강조되듯,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로서

애당초 신앙을 "검"으로 강요하지 않으며 관용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왔다.

또한 전후 여섯차례나 전쟁이  발발한 중동을 "세계의 화약고"로, "전쟁다발지대"로 간주하면서

그 근원을 종교갈등에서 찾으려고 하는데,이것은 한낱 허사에 불과하다.




본래 중동지역도 다른 지역과 다를 바 없어 역사의 순리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전쟁도 있었지만 평화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던 곳이 갑자기 '화약고'로 변모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냉전기류가 이곳을 강타하면서부터다.

느닷없는 냉전기류는 그나마 평온하던 중동에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와 민족주의간의 대립,그리고 석유자원의 국제화와
민족화 간의 갈등이라는 상극의 난세를  몰고와 불화와  반목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그간 있었던 중동전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주범은 정치이지 결코 종교가 아님을 간파할 수 있다.
8년간의 이란-이라크전쟁을 놓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이 전쟁이 일어난 원인의 하나로 이슬람교 내의 종파적 분쟁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종교적으로 이란은 이슬람교 2대 종파의 하나인 쉬어파에 속하기는 하나 ,이라크도 인구의 과반수(참전 이라크군의  반수)가
이 교파의 신봉자들이며 그곳에는 쉬어파의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이슬람국가 사이에는 전쟁을 일으킬 만큼 종파적 갈등이 있을 수 없다.
기실 영토분쟁과 지역패권다툼이란  정치적 요인이 전쟁 발발의 주원인이었다.




숱한 오해와 능멸을  받아온 이스람을 이해하기 위한 문화상대론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문화만 우수한 것으로 믿고
자기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관점에서 타 문화를 부정하거나 비하하는 이른바 문화국수주의, 또는 자문화 중심주의를 철저히 지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의 서구문화 중심주의가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불러왔다는 역사의 경험을  감안할 때,
문화상대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계속)

 

2.이슬람, 이슬람 문명




아랍어로 "순종"과 "평화"의 뜻을 담고있는 이슬람(al-Islam)이란 말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하여 이슬람 문명과 그 권역인 이슬람 문명권(이슬람세계)이 독자적으로 형성되면서 이슬람 문명전반에 대한 범칭으로 쓰이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슬람 이라고 하면 이슬람교와 그에 바탕을 둔 이슬람 문명 및 이슬람 세계를 두루 일컫는 말이라고 할수있다.

이슬람 문명은 7세기 초반 이슬람교의 출현과 함께 형성되었다.
교조 "무함마드"(570?-632)가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한 이후 칼리파 시대에 대정복을 전개하여 아라비아반도는 물론, 그 주변국들이 점차 이슬람화 함으로서 이슬람 문명권의 기반을 구축했고 그 뒤를 이은 우마위조(661-750)를 거쳐 아랍인과 비아랍인이 이슬람교와 이슬람 문명 이라는 공통된 이념에 기초하여 이슬람제국(압바스조 750-1258)을 건설함으로서 마침내 범 지역적인 문명공동체로서 이슬람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무슬림의 지역분포를 보면 80%가 아시아에 편재해있고(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인도네시아,말레이지아,필립핀 등)게다가 이슬람의 발원지가 서아시아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슬람의 주역은 아시아 무슬림 들이며 이슬람교는 다름아닌 아시아 종교라고 말할수 있다.




이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종교인 이슬람교와 그를 바탕으로한 문화복합체인 이슬람 문명의 실체와 그 권역인 이슬람 문명권(이슬람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가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윤리를 사회생활의 전반,즉 문명의 여러 영역을 총 망라한 인간의 생존양식이며 종교와 세속 쌍방을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이다


종교라고 하면 무릇 세속의 삶보다 내세를 더 강조하고 인간생활의 육체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는데 반해 이슬람은 내세와 현세를 똑같이 여기고 현세의 삶을 중시하면서 사회생활의 여러분야에서 고유이념과 원리,제도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여타 종교와 종교문명에서 찾아볼수없는 이슬람 만의 독특한 점이다. (계속)



3.문명사에서의 이슬람의 기여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문명을 요람으로하여 태어난 이슬람문명은 아랍의 전통문명과 고대 오리엔트 문명,
그리스-로마문명,페르시아 문명 등 여러 외래문명이 융화하여 창출된 새로운 문명으로서 서로 다른 문명영역을 갈무리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단지 여러문명을 계승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시대적 요청에 맞게 한층 더 발전시켜 특유의 중세문화를 꽃피움으로서 고대문명과 근세문명을 순리적으로 이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문명의 가장 큰 세계사적 공헌이다.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공헌 때문에 우리는 이슬람문명을 통해 사라진 고대문명을 추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문명을 비롯한 근.현대문명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문명을 잉태하고 출산해 키워낸 요람은 이른바 고대 4대 문명가운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두 문명,즉 오리엔트문명이다.
그리하여 이슬람문명에서는 이 두 문명이 남겨놓은 흔적이 역력하며 ,그러한 흔적을 추적함으로서 인류문명의 여명을 밝힌 오리엔트문명의 실체를 알아낼 수 있다.

문명사에서 이슬람의 기능과 영향력은 유럽문명의 사활이 걸린 일련의 문제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원래 선사시대의 몽매에 허덕이던 지중해 중심의 유럽은 고대 오리엔트문명을 받아들임으로서 비로소 문명시대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른바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문명이 싹텃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고대 오리엔트문명을 그들의 문명사 첫머리에 억지로 앉혀놓는 것이다.

한편 이슬람은 처음부터 그리스-로마문명을 적극 수용하여 자신의 문명으로 융화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발전시켜 중세에 이르러서는 유럽에 재수출함으로서 자칫 영영 멸절될 뻔한 유럽의 고전문명을 다행히도 르네쌍스(renaissance-재탄생,부흥)시켰다.




유럽에 중세 암흑기가 엄습하여 일세를 풍미하던 그리스-로마문명이 한창 내동댕이 쳐진 7-8세기부터 무슬림들은
그리스-로마문명에서 철학,학문,기술 모두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플라톤(B.C.427-347)이나 아리스토텔레스(B.C.64경-A.D.21경)의 철학서,유클리드의 기하학서,스트라본의 지리서 등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은 빠짐없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외래문명을 받아들여 자신을 살찌운 이슬람 선진문명은 13세기를 전후하여 빈혈에 허덕이던 유럽에 수혈되기 시작했다.
아랍어 서적들이 유럽으로 역출(譯出)되고 이슬람의 지리학,천문학,의학,수학이 유럽 대학에서 교재로 읽히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유럽은 잃었던 문명의 전통을 바야흐로 되찾기 시작했으며,그를 발판으로 하여 르네쌍스의 전기를 맞아 급기야 근대의 기선(機先)을 잡는데 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유럽사의 서술체계에서 이슬람사회는 유럽 중세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둔갑되어 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중세 유럽문명에 대한 이슬람의 기여와 영향을 방증해주며, 이슬람문명을 떠나서 유럽의 중세문명,특히 그 부흥을 말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설파한다.




이슬람은 동서문명의 교류에도 특출한 기여를 했다.지정학적으로 이슬람세계의 심장부는 동서양의 중간지대.완충지대에 자리하고 있어서 동서문명교류의 가교 구실뿐만 아니라,문명의 산파역 까지 맡았다.
일찍이 이슬람문명의 요람인 서아시아 일원은 페르시아문명을 비롯한 오리엔트문명과 그리스-로마문명이 접합하는 곳이어서, 여기에서 사상 처음으로 동서문명을 한 그릇에 담아낸 헬레니즘문화가 꽃피었다.
 
기원전 4세기에 단행된 마케도니아 왕 알레산더(알레산드로스)의 동정(東征,B.C. 334-323)으로 출현한
헬레니즘 제국(알레산더제국)은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대륙을 아우른 미증유의 대제국으로서
그 판도내에는 그리스문명과 고대 오리엔트문명,페르시아문명,인도문명 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다양한 문명이 망라되었다.




종전에는 여러왕조간의 격페로 인해 이러한 문명들의 상호교류가 차단되어왔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동정과 더불어 대제국이 출현함으로써 이러한 차단요인이 일시에 제거되었으며
제국의 광할한 판도내에서 초유의 동서문명교류가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동서문명의 첫 모형이자 융합체인 헬레니즘이 출현했다.


그런데 어떤이는 이러한 동서문명의 융합체인 헬레니즘을 순수한 유럽문명으로 착각한 나머지 기독교의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정통 유럽문명의 2대 근간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동양문명의 2대 근간인 유교와 불교에 대응시키는데,이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중세에 와서 이슬람제국은 동방의 중화제국과 함께 세계사의 쌍벽을 이루어 동서문명교류의 주역을 담당했다.
이슬람제국은 중국을 비롯한 동방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을 뿐만아니라, 후진 유럽에 전파하기도 했다.
인도가 발견한 영(Zero)개념을 받아들여 수학의 혁명을 일으킨 무슬림들은 '영'을 포함한 숫자(아라비아숫자)를
유럽인들에게 가르쳐주었으며 중국의 4대 발명품(종이,화약,목판인쇄술,나침판)을 비롯한 동방 특산물도 대부분
아랍-무슬림인들이 유럽에 전해주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 이슬람세계의 중심부인 중동은 시종 서구열강의 세력각축장이 되었다.
그것은 중동을 다스리면 세계를 다스린다는 역사적 경험이 그들에게는 불변의 진리처럼 인식되어져왔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오늘날에도 이 지역은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힌 각축장이 되고 있는 현실에 있다.(계속)




4.지하드




'지하드'(jihad)는 아랍어로 '자하드'(jahada)의 동명사로서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함'이란 뜻이다.
지하드는 곧 이슬람을 위해(이슬람을 위한 정도에서)헌신 분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드를 행하는 사람을 '무자히드'라고 한다.




지하드에는 자신을 순화하기 위한 개인적인 신앙차원의 노력과 이슬람영역의 발전이나  방어를 위한 집단적인 공헌 차원의 분투라는 두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전자는 내면적이고 평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후자는 다분히 외향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종종 후자의 전투적 성격이 확대 과장되어 지하드는 마치 그것뿐인 것으로 오인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서구식 '성전'(聖戰, 영어로 holy war)으로  오해되고,급기야는 그렇게 의역(意譯)되고 말았다.

그 영향은 한자문명권까지 미쳐 결국 그대로 한자역(漢字譯)되었다.


앞서 말한것처럼 이슬람적 '지하드'에는 신앙차원의 노력과 공헌차원의 분투(전쟁)라는 두 가지 내용이 있기 때문에
지하드 일반을 '성전'으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일 수 밖에 없다.
 
지하드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의미와 역할 때문에 이슬람에서는 그것을 무슬림이 수행해야 할 종교적 실천의무로 규정할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고 한다.

소수파인 쉬어파는 지하드를 실천의무로 간주해야 한다고 하면서 오늘날 까지도 그 수행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수파인 쑤니파는 지하드를 격려하면서도 원래 실천의무는 개인차원의 의무사항이기 때문에,개인차원과
집단차원의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무슬림들이 꼭 수행해야 할  의무도 아닌 지하드를
일반 무슬림들의 종교적 실천의무의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다수 정통파의 주장을 따라 이슬람의 종교적  실천의무는 다섯가지(신앙증언,예배,종교부금,금식,성지순례) 로만 한정하고 지하드는 의무에서 제외되어 있다.




지하드는 이슬람의 종교적 신앙을  정화하고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지하드는 신성시되고 그 수행자 무자히드는 전사하면 순교자로 추서되어 '천국의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

지금 이러한 지하드가 전쟁과 폭력으로만 왜곡되어 이슬람의 호전성을 대변하는 징표인양 알려져 있다.


한편, 이슬람세계에서는 지하드의  이름 아래 음양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운동과 투쟁,전쟁이 벌어지고 단체와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오늘도  그 양상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개중에는 지하드 본연에 충실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것도 있다.
지하드란 이름을 걸고 지하드와는 무관한 행위들이  자행되기도 한다.
비문명적인 테러나 무모한 자폭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지하드를 합리화할 수 없다.
오늘날의 가장 큰 폐단은 지하드 본연을 망각하고 정치를 빙자한 지하드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계속)




5.이슬람의 여성관




이슬람은 여성들이 비록 남성과 동격체로서 존재하고 평등권을 행사하지만 여러가지 유별되는 점이 있어서 특혜를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각방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여성 보호는 남성과 사회에 의한 보호와 부양, 그리고 여성으로 인해 발생 가능한 문란과 패륜으로 부터의 사회 보호 등 몇가지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슬람은 여성의 육체적 연약성과 사회활동의 제약성, 그리고 여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의 필요성에서 출발하여 여성에 대한 남성과 사회의 보호를 의무화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일례가 이슬람의 여성상 하면 으례 회자되고 있는 일부다처제다.




일부다처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종 유행해온 일종의 혼인제도다.
일반적으로 일부다처제의 발생동인은 여자의 수가 남자의 수를 능가하거나, 한 명 이상의 여성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성의 욕구, 그리고 많은 자손을 갖고자 하는 욕망 등 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사회에서 일부다처제가 발생하게 된 것은 어느 동인에 해당하며, 제도로서 장기간 존속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꾸르안(코란)에는 유일하게 일부다처제의 허용을 시사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결혼을 할 것이니
너희가 마음에 드는 여인으로 둘,셋 또는 넷을 취할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인이나 아니면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것(노비)을 취할 것이다.
그것이 너희가 부정을 범하지 아니할 최선의 길이다"(4:3)




이 구절은 이슬람 초창기 두 번의 힘겨운 전투에서 수 많은 남자 군사들이 사상(死傷)당한 후에 내려진 계시다.
두 차례의 전투끝에 많은 과부들과 고아들이 생겨났고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제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도는 한 남자가 여러아내를 맞아들이는 것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초기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던 직접적인 동인이다.
요컨대 여성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는 발생론적으로 보면 여성 보호를 포함한 사회연대라는 윤리적 요청에 부응하여 출현한 것이다.




이와같이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출현한 제도지만, 그 제도를 확립하고 유지하는데는 거의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단서가 붙어있다.
전술한 경전구절에서 보다시피 남편은 아내들을 편애없이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
이 공평성이 지켜지지 않을때 이 제도는 성립할 수 없으며, 설령 결혼했어도 아내의 합법적인 이혼조건이 된다.

일부다처제를 지탱해주는 이러한 공평성의 주요한 내용으로는 아내를 공동거주,공정부양,공평상속 등이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성차심리를 가진 여인들에 대해 이러한 불편부당한 공평성이 지켜지겠는가 하는 것이 상식적인 의문으로 제기되지 않을수 없다.


이에 대해 경전은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하기는 어려울 것' 이나, 그렇다고 하여 다른 아내들을 무시하고
한 아내만을 편애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과 더불어 한 남편이 여러아내를 부양해야 할 부담을 감안할 때 일부다처제는 애초부터 일정한 조건에서만 허용되고 또 가능한 혼인제도로 결코 당위성이나 편재성을 띈 혼인제도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오늘에 와서 이 제도의 존속 여부를 놓고 의론이 일고 있으며 이슬람 나라들은 법적으로 금지하거나(튀니지,터키 등), 그대로 존속하거나(모로코,이집트 등), 재판소의 허락 등 조건부적으로 허용하는(시리아,파키스탄 등)절충적 방법을 모색하는 등 제각기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이 제도는 점차 유명무실화 하고 있다.(계속)



6.이슬람의 통과의례




이슬람에는 평생 한번은 통과해야 할 통과의례가 몇가지 있다. 우선 출생 의레다.
아기가 태어나면 첫 의식으로 아기의 오른쪽 귀에 대고 '아잔'(사원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면서 예배를 촉구하는 낭송)을, 왼쪽귀에 대고는 '이까마' 즉 예배 전에 염송하는 경전구절을 읽어준다.
가장 신성한 알라의 소리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이때부터 아기는 무슬림이 된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전을 주머니에 넣어 메카 쪽을 향해 걸어놓는다.
출생이후 이레째 되는 날에는 작명(作名)하는 '아끼까'의식을 치르는데 축복받은 데 대한 보답으로 양을 잡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친척 부인들이 아기를 보러 오는데  올 때 액땜으로 소금을 뿌린다.
그녀들은 흉안(凶眼)의 시기를 두려워해 아기를 보고 예쁘다는 말을 하지않는다.
또한 이날 아기의 머리카락을 모두 깎아 그 무게만큼의 금이나 동등한 가치를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희사한다.


이름은 대체로 현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데 남자의 경우 교조 무함마드의 이름이 가장 많다.                                               
 

남자는 꼭 할레를 하는데 생후 일곱번째 날이나 7-12세 때 행하는 것이 관례다.
할레는 남성다움과 용감성의 상징이며 공동체의 성원임을 확인하는 절차다.
그리하여 할레는 축제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아이는 돌아다니면서 어른들께 인사하고 주위에서는 축하하고 격려해준다.


아직까지 수단이나 요르단 그리고 사막의 부족들 속에 남아있는 여아의 할레 풍습은 음핵절제로
혼전 성관계를 방지하고 순결을 유지하기위한 방편이라고 하나 대부분의 이슬람 법학자들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




6.이슬람의 통과의례




이슬람에는 평생 한번은 통과해야 할 통과의례가 몇가지 있다. 우선 출생 의레다.
아기가 태어나면 첫 의식으로 아기의 오른쪽 귀에 대고 '아잔'(사원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면서 예배를 촉구하는 낭송)을, 왼쪽귀에 대고는 '이까마' 즉 예배 전에 염송하는 경전구절을 읽어준다.
가장 신성한 알라의 소리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이때부터 아기는 무슬림이 된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전을 주머니에 넣어 메카 쪽을 향해 걸어놓는다.
출생이후 이레째 되는 날에는 작명(作名)하는 '아끼까'의식을 치르는데 축복받은 데 대한 보답으로 양을 잡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친척 부인들이 아기를 보러 오는데  올 때 액땜으로 소금을 뿌린다.
그녀들은 흉안(凶眼)의 시기를 두려워해 아기를 보고 예쁘다는 말을 하지않는다.
또한 이날 아기의 머리카락을 모두 깎아 그 무게만큼의 금이나 동등한 가치를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희사한다.


이름은 대체로 현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데 남자의 경우 교조 무함마드의 이름이 가장 많다.                                               
 

남자는 꼭 할레를 하는데 생후 일곱번째 날이나 7-12세 때 행하는 것이 관례다.
할레는 남성다움과 용감성의 상징이며 공동체의 성원임을 확인하는 절차다.
그리하여 할레는 축제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아이는 돌아다니면서 어른들께 인사하고 주위에서는 축하하고 격려해준다.


아직까지 수단이나 요르단 그리고 사막의 부족들 속에 남아있는 여아의 할레 풍습은 음핵절제로
혼전 성관계를 방지하고 순결을 유지하기위한 방편이라고 하나 대부분의 이슬람 법학자들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



7.이슬람의 교제문화




외향적인 의식구조를 가진 무슬림들의 교제문화는 상당히 발달했다.
우선 만나는 인사부터 무척 화려하다. 원래 상극관계가 지배적인 유목사회에서 인사는 서로에게 적의가 없음을 표명하고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행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슬람공동체가 결성되면서 상생(相生)을 실현하고 유대를 강화하려는 종교적 이념에서 인사는 하나의 중요한 교제수단으로 중시되면서 다양한 방법을 취하게 되었다.
 
'꾸르안'은 "그대가 인사를 받을때 더 나은 말로 하거나 아니면 그와 동등한 말로 답하라"(4:86)고 하고, "말하기 전에 인사부터 하라"
 "그 누구도 인사를 할 때까지 식사에 초대하지 말라"고 인사의 중요성과 방법까지 역설하고 있다.

인사방법으로는 인사말이나 악수,입맞춤,포옹,웃어른의 손에 입맞춤하는 것 등이 유행이다.
간혹 손을 가슴이나 입술,이마에 가져다대기도 하는데 이것은 상대가 자신의 마음이나 말,생각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친절의 표시다.

특히 장황하리만치 긴 인사말이 아주 인상적이다.


인사말 가운데는 알라와 결부된 말이 빠지지 않는다.
좋은 일에'함둘 릴라'(알라께 찬미를!), 여행의 안전을 비는 말은 '알라 마흐카'(알라께서 당신과 함께하기를!),
축하하는 자리에서는 '알라 유바리르카'(알라께서 당신을 축하하시길!),
병 문안 시 에는 '알라 유슈피카'(알라께서 당신을 치유해 주시길!) 등

좋은일에 대한 인사말은 꼭 알라와 연관시킨다.
알라에 대한 믿음이 투철한 사람들 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인사에는 순서가 있다. 일상에서 장유유서 개념이 우리와 못지않은 무슬림들은 꼭 어른에게 먼저 인사를 올린다.
말 탄 자가 걷는자 에게, 걷는자가 앉은자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

남자가 먼저 여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지만 여자는 화답하지 않아도 무례가 아니다.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결례로 삼가야 한다.


가령 보편적인 인사말은 언제 어디서나 하는 '앗쌀람 알라이 쿰'(평화가 당신에게!), 대답은 '알라이 쿰 쌀람' 으로
('당신에게도 평화를' 이라는 뜻 - 우리의 '안녕하십니까'에 해당),
'아흘란 와 싸흘란'(한 집안 사람으로 여기고 편의를 제공하겠읍니다), 대답은 같은 말로 반복.
(우리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에 해당)이란 말이다.




무슬림들은 손님에 대한 환대를 미덕으로 생각하고 친절히 접대한다. 차린음식을 많이 먹어주는 것이 환대에 대한 보답이자 주인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 여겨 기뻐한다.
선물은 선호하는 편인데 반드시 오른손으로 주고 받아야 한다.
대화할 때는 상대와 1미터 이내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접대용 커피나 차는 즐겁게 소리내어 마심으로써 만족을 표해야 한다.
다만 주인의 소유물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는 것이 좋다.
관심을 보인면 달라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다.
또 윗사람 앞에서는 흡연을 삼가고 이야기를 나눌 때 발바닥을
상대방에게 향하는 것을 큰 모욕으로 여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계속)




8.이슬람의 경전 "꾸르안"(코란)




불경이나 성경은 부처와 모세,예수 같은 성인이나  종교 창시자들이 직접 기록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 기록에 관해 서술한 내용들을 집성한 것이다.
이에 반해 경전으로서의 꾸르안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절대신에게서 받은 계시를 그대로 기록한 것일뿐, 무함마드 자신이나 어느 삼자의 개입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꾸르안의 특이한 점이다.




그리고 꾸르안은 아랍어 '까리아'(qaraa.읽다)의 동명사 '꾸르안'(quran.읽기)에서 연유한 것으로서, 이 동명사가 이슬람의 경전명으로 승화된것이다.
왜냐하면 꾸르안은 '읽기'라는 어원에서 말해주듯이 단순히 종교적 신앙의 기록물이 아니라 소리내어 읽으면서 그 뜻을 새기는 송독물(誦讀物)이 때문에(경전의 각 구절이 '읽어라'는 말부터 시작)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코란'이라는 말은 읽기라는 뜻이 전혀 없기때문에 반드시 꾸르안으로 발음하여야 한다고 한다.




꾸르안은 같은 유일신교인 유대교나 기독교 경전들에 비해 알라의 유일성을 더욱 강조하고 우상숭배를 강도 높게 배격한다.
나아가 구약성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각종 종교적 계율도 엄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슬람교에서는 유대교나 여호와나 기독교의 하느님 같은 다른교의 유일신을 배척하거나 차별시하지는 않는다.
다 같은 유일신인만큼 숭배하라고 권한다.즉 타 종교에 대한 관용성이 타 종교에서는 찾아볼수없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알라는 낳지도 낳아지지도 않았으며 형태도 모양도 없는 무형의 절대신이므로 어떠한 공물이나 제물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상을 숭배하거나 여러신을 섬기는 다신교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기독교의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속성과 이슬람교의 알라의 속성은 엄연히 구별된다.
                                       
꾸르안의 특색은, 기독교의 성서는 원본이 거의 소실되어 현존하는 것은 거의 다  번역물이고 불교의 불경 또한 석존의 말을 근본으로 하여
후세에 개인이나 교단이 기록,편집한 것인데 비해 꾸르안은 무함마드 사후 곧바로 수집,정리하기 시작하여 약 20년 후에는 정본으로 집성하였으며 그 정본이 오로지 하나의 이름하에 유일본으로 오늘날까지 1400여년 동안 통일적으로  보존돼왔다.

전술한 바와 같이 꾸르안은 알라의 말이 누구(무함마드)에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얼마만큼이나 전해졌다는 사실정(史實性)이 명백하다.


경전의  언어면에서도 꾸르안의 일관성은 유례가 없다.
현행 불경이나 성서는 모두가 역서(譯書)로서 원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꾸르안은 오늘날까지 처음 씌어진 원어(아랍어)가 그대로 보존되어오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하루 다섯번의 일상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일상예배는 해뜨기 전 한 시간 반부터 해 뜰 때까지 사이에 2궤배를 하는 새벽예배.정오를 15분쯤  지나서 4궤배를 하는 정오예배,정오예배부터 3시간 지나서 4궤배를 하는 오후예배,일몰후 5분에서 1시간 사이에 3궤배를 하는 저녁예배,저녁예배후 1시간 반부터 심야 사이에 잠들기 전 4궤배를 하는 밤예배로 이루어진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다섯번의 일상예배를 의무로 하고 있다.




어떤사람들은 분초를 쪼개 사는 현대인들에게 하루 다섯번 씩이나 예배를 할 여유가 어디 있냐고 반문하기도 하고 이것을 이유로 일상예배를 시대에 뒤떨어진 구태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무슬림인들은 "담배 한 대 피울 사이면 되는 일인데" 라고 넌지시 되받아 친다.

사실 4궤배에 걸리는 시간은 기껒해야 10분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원래가 느긋한 사람들이라 누가 뭐라고 해도 별로 아랑곳하지 않고 꼬박 꼬박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대다수 무슬림들의 모습이다.




이슬람국가에서는 어디에 가도 하루 다섯 번씩 인근 사원의 뾰족탑에서 울려퍼지는 낭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예배시간을 알리는 이른바 "아잔"이다. 그 주인공을 '무앗진'(예배하러 오라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또한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한 달 동안은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먹거나 마시는 것이 일체 금지된다. 담배를 피워도 안되고 부부관계도 금기사항이다. 대낮에 기온이 섭씨 40-5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에서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는 것은 언뜻 보아 끔직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무이기는 하지만 ,역시 이슬람 특유의 융통성과 관용성을 반영하여 임산부나 
해산모,생리중인 여인,노약자,환자,어린이 등은 금식에서 제외된다.
요약하면 금식이야말로 무슬림들에게 필요한 정신적 훈련이며 사회적 훈련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금식은 개인의 의지를 강화하는 도덕적 훈련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자제력을 키우고 굶주림과 목마름 등을 이겨내는 육체적 훈련이기도 하다.


앞서도 말한바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신진대사를 촉진한다는 등 금식이 가져오는 의학적인 효과도 빼놓지 않는다. 
요컨대 금식은 여러모로 유용한 정신적 및 육체적 훈련이다.불교나 기독교 등 여러종교 들에서 많은 고승 대덕들이 이와 유사한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이치에서일 것이다.(계속)




9.이슬람의 혼인문제




이슬람은 혼인문제 에서도 여성보호에 세심한 배려를 돌린다.
예컨대 남편이 지불하는 '마흐르'는 보통 결혼서약을 할 때 결정하고 지불하는데, 결혼하기전에 파혼하게 되면 그 절반을 신부가 차지하며, 만일 약혼남자가 사망하면 마흐르는 물론,남자의 상속권마저도 약혼녀가 취득하게 된다.


그리고 가정의 안정과 여성의 권익보호를 위해 이혼을 '알라가 허용하는 일 중에서 가장 혐오하는 일' 로 낙인하여 가급적이면 억제하고 이혼권은 아내에게도 부여된다.

이혼에 신중을 기하기위해 이혼을 선언한 후 3개월간의 이른바 '잇다'  즉 '대기기간' 을 설정하고 재결합을 권유하며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도 한다.
이 기간에 재혼은 금지된다. 이러한 보호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남성과 사회의 부양을 의무로 하고 있다.




마흐르와 함께 나파까(부양)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일차적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데, 만일 남편이 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아내는 법적으로 부양청권을 발동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것을 이유로 이혼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슬람에서 여성보호는 사회보호와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여성들의 히자브 관행이 그 일단을 설명해주고 있다.




'히자브' 는 아랍어로 '가리개'  '씌우개'  '가로막기'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가리기 위해 착용하는 겉옷이나 너울 등을 통칭한다.
여성의 생활관습 으로서의 히자브는 여성을 보호하고 또 여성의 노출로 인해 생겨날수 있는 사회적 문란과 비리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관행으로 해석한다.

사실 이러한 관행은 무슬림 여성들 뿐만아니라, 동서고금 여러 나라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히자브는 여성과 사회보호의 차원에서 비롯된 일종의 관행이지 결코 어떤 구속력을 가진 제도나 규정은 아니다.
그리하여 오늘 이슬람 나라들에서는 그 착용에 대해 폐지하거나 고수하거나,자유에 맡기는 등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계속)




10.무슬림들의 의식구조




무슬림들의 의식구조에서 근본은 유일신 알라에 대한 믿음과 복종이다.
이로부터 출발하여 그들의 삶에대한 태도,즉 인생관이 수립된다.
무슬림들의 인생관은 한마디로 성선설(性善說)에서오는 적극적인 인생관이다.
인간에게는 애당초 원죄가 있다고 보는 기독교는 성악설(性惡說) 일 수밖에 없고 불교는 인간의 속성을 두카(duhkha),즉 고행으로  보기 때문에 고행설을 주장한다.




이에 비해 이슬람은 알라의 창조에 의해 착한 속성을 타고난 인간이기에 삶을 낙천적으로,적극적으로 영위하라고 격려한다.
교조 무함마드 의 언행록인 "하디스"에는 "인간은 순수하게 태어난다"
"오래살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최상의 인간이다" 라고 찬미하고 ,
오래 살아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으니 "죽음을 원하지 말라,범죄자도 죽음을 원하지 말라" 고 무모한 죽음을 경고한다.




무슬림들의 중용적인 의식구조는 관용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관용성은 그들의 종교의무 수행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바 예를 들면,
매해 한 달씩 행하는 금식에 병이 있으면 금식하지 않아도 무방하고,먹을것이 없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면
종교적으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먹어도 된다.




요즘 무슬림들의 'IBM' 에 골탕먹은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들여오는데 "I"는 '인샬라'(In Shal Llah).
B는 '부크라'(bukrah), M은 '마 알라이쉬'(Ma alaish)라는 아랍어 단어의 첫 자모음이다.
'인샬라'는 '알라가 원한다면', '부크라'는 '내일', '마 알라이쉬'는 '괜찮아,무얼 그러느냐'라는 뜻이다.
이 세 글자의 합성은 그야말로 멋진 삼박자 화음이다.




어떤 고객이 일주일 후에 제품을 인수하기로 계약서를 쓰고 도장까지 찍고는 아랍인 화주(貨主)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거듭 강조하니, 화주는 "인샬라"라고 대답한다. 낯선 고객은 굳은 서약인 줄 알고 안심한다.
약속한 날짜에 찾아간 고객은 제품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에 화를 내자 화주는 태연하게 "부크라"라고 응수한다.

다음날  다시 찾아갔더니 또 마련되지 않았다고 한다. 홧김에 심하게 추궁하니 화주는 여전히 덤덤하게 "마 알라이쉬"라고 능청을 부린다. 알고 보니 이것이 그들의 'IBM' 관행이다. 지레짐작해야 한다.
전지전능하신 알라가 함께하고 새털같은 세월이 있는데 무얼 그리 서두르냐는 여유작작함과 자신감,
그리고 조급한 세태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응일 수도 있다.
 
정녕 '인샬라'(盡人事待天命)는 그들만의 전유물인 성싶다. 
'인샬라'를 두고 노력보다 운에 맡기는 게으른 타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간과 일정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긴박한 현실에 쪼들리지 않는 마음의 넉넉함을 말해준다고도 볼 수 있다.

흔히들 무슬림들의 언행을 놓고 '다언요설(多言饒舌)', 즉 말이 많고 수다스럽다고들  한다. 그것도 어지간히 높은 목소리로 말이다.


그들은 한잔의 농차(濃茶)를 앞에 놓고 이야기(싸하르,夜話)로 하룻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아마 이 세상에 '천일야화(千一夜話)'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랍-무슬림들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다양한 몸짓은 또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긍정하면 머리를 조금 끄덕이면서 두 눈을 깜박거리고 부정하면 입술을 내밀거나 두 눈썹을 치떠올리고 감사나 사양할 때는 오른손을 왼가슴에 대고 머리를 약간 숙이고, 의기투합하면 서로 손바닥을 마주친다.

부를 때는 손과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는데,손가락 하나를 위로 올려 부르는 것은 공격적인 의미이니 주의해야 한다. 
눈짓, 손짓, 얼굴표정, 전신동작  등 모든것이 다 동원된다.
이를테면 비언어적 의사소통인데, 웬만한 것은 다 통한다. 실로 표현의식이 강한 사람들이다.(계속)




11.이슬람의 여성관(2)




이슬람의 생활문화에서 늘 주목을 끄는 것은 여성들의 삶이다.
여성을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남성에 대한 타자(other)로, 그리고 불완전하고 우연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여성관이
지난 시기 문명권을  지배해왔다.

당초 여성을 '악마의 통로' 로 저주해온 기독교문화나, 순종을 여성의  미덕으로 추구해온 유교문화,
'여신불성불(女身不成佛)'로 여성을 도외시행온 불교문화를 막론하고 이른바 제도종교가 샤마니즘과 같은 확산종교 보다도 더 심한 여성차별제도를 고수해왔다는 것이 종래 학계의 중론이다.

그래서 역사는 여성차별의 역사라고 까지 말하는 것이다.


제도종교로서의 이슬람도  과연  그러할까.
조건부로 허용된 '일부다처제'가 미개시대의 그것과 동일시되고,  보호차원에서 관행이 된 여성들의  남성 외면이나 히자브 관습이 후궁들을 환관의 감시에 격리하기 위해 만든 동로마시대의 '하렘제도(후궁격리제도)'와
일맥상통한 것으로 오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근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지막지한 탈레반 정권이 시행한 비이슬람적 여성차별시책을 보고
마치 그것이 이슬람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슬람은 단순히 권리와 의무에서 남녀간 평등이라는 보편개념을 초월하여 인격적 차원에서 여성과 남성을 동격시 한다.
하나의  영혼에서 창조된 남성과 여성은 동종의 인류로서 동등하게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슬람은 남녀에게
서로 보호자요 관리자요 협력자임을 자임케 한다.




경전 꾸르안은 이러한 동격체격인 상부상조의  관계를 "여성은 남성의 옷이고, 남성은 여성의 옷"이란 간결한 말로서 표현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숙명적인 상관성으로  말미암아 남녀는 공동으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가정을 꾸려나가야 할  의무를 함께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녀가 보호자, 협력자의 입자에서 서로  결합해, 즉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이슬람에서 결혼은 사회적  의무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무이기도 하다.
결혼은 남녀 당사자와  알라  간의 엄숙한 약속으로서 그 의의를 말하자면 개인이 수행하는 종교적 의무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결혼을  신성시하고 의무로 여겨 적극 권장하지 패륜으로 기피하거나  죄악시 하지 않는다.
이에 결혼부정관이나  혐오관, 독신주의,그리고  남존여비와 부창부수,삼종지도 와  칠거지악 같은 여성 기피나
비하의  윤리도덕은 이슬람사회의 혼인제도나 부부관계에서는 양립할  수 없다.




초기 기독교는 결혼을  부정하고 독신주의를 권장했다.
바울은 음행이 성행하니 할 수 없이 남녀가 결합하기는 하는데 최선책은 약혼녀 마저도 결혼하지 않는것(고란도전서  7:38)이라고 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부부간의  쾌락은 용서 가능한  죄이며 여성의 영혼은  소중하나 그 육체는 '적으로 증오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다행히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결혼을 긍정하게 되고 성서적 의도가 복원되어 '독신주의'가 부정되어다.

   

혼인문제에 있어서도 여성은 자기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여성을  남자의 청혼을 거절할  수  있으며,남자로  부터 받는 마흐르(mahr, 신부값)는 전적으로  신부가 소유한다. 
비록 의무로 되어있지만, 신부의 소신에 따라 마흐르를 사양할 수도 있다.
 
마흐르란  남녀간의 합법적 결합의  상징으로서 남자가 약혼녀에게 지불한다.
이것은 결혼할  때 신부가 지참하는 지참금과는 다르다.
마흐르는 "여인들에게 마흐르를  선물로 줄지어다" (4:4)라는 경전의 계시에 따라 의무가 되었다.
마흐르 뿐만아니라 남편은 부인의 모든 사유재산에 간여할 권리가 없다.
결혼후 부인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취성관행도 없다. 흔한일은 아니지만 남편이 가족부양 등 소정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아내가 주도적으로 이혼을 제기할  수 있다.


이와같이 혼인문제에서 무슬림 여성들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다른 전통사회보다 월등하다고 말해도 좋다.

여성의 동격성과 자립성을 확보하는 데서 재산권과 상속권의  보장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슬람법에 의해 여성은 자신의 사유재산에 대해 절대적인 권리를 행사한다.
성년이  된 여성은 부친이나 형제,남편,자식,그리고 그 누구와의  상의 없이 재산을  자의로 처리할 권리를  갖는다.

재산의  취득기회도 남성과 동등한바, 상속이나  증여,본인의 노력에 의해 재산을 임의로 취득,축적할  수 있다.
이러한 권리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공인,보장된 여성 본연의 권리로서 결코 타인(예컨대 남편)과의 어떤 계약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 초기부터 요지부동의 법규로 굳어져서 실천해온 이러한 무슬림여성의 권리 행사는 근세까지 여성을 '행위무능자'로 규정하여 아내의 재산권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던 서구의 여성상과는 분명하게 대조적이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평등.박애라는 인권선언을 했지만,남녀의 성적평등에는 지극히 인색했다.
시민은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 양분되고, 후자에 속하는 무재산의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나폴레온의 민법전에도 아내의 재산권과 소송권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런것들이  바로 근세에 와서 유럽에서 여권운동이나 남녀평등권 운동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계속)



12.이슬람의 여성관(3)




이슬람은 여성의 재산권과 더불어 상속권도 꾸르안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경전 꾸르안은 "남자에게는 부모와 가까운친척이 남긴 재산의 몫이 있으며,여자에게도 부모와 가까운 친척이 남긴 재산의 몫이 있나니, 각자에게는 적건 많건간에 규정된 몫이 차려지리라"(4:7)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 밖에도 상속인과 상속액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은 남녀가 모두 알라의 피조물로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동격체이지만 생물적,사회적,문화적,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역할과 책임이나 기능이 꼭 같을 수는, 즉  공평할 수는 없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법제나 관행상에서 남녀간에 구별이 있게 마련이며, 여성에게는 특별한 배려나 혜택이 돌아가는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믿는다.

요컨대 남녀가  경쟁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이고 공동체적인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서로간의 평등과  공평이 무조건 동일시 될수없어 유별(有別)이 불가피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별관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이슬람의 에 대한 많은 오해와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
                       
경전속의 관련계시가 오해되는가 하면 상속액에서 남녀간에 차이가 나고 남편이 아내를 부양하는 것이 남성우월주의와 남존여비로 비쳐지고,마흐르로 치러지는 혼인이 구래의 매매혼으로 매도되며,유별이 불평등이나 불공평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슬람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고 따르며 남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을 여성의 미덕으로 본다.
이의  반대급부로 남성은 '알라께서 대단히 유익한  존재로 되게한' 여성을  친절히 대하고 미워하지 말것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경전에는 "여인들을 친절히 대하라.만약 너희들이 그녀들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알라께서 대단히 유익한  존재로 되게하신 것을 미워하는 것과 같을 지니라"(4:19)라고 씌어있다.
그러나 아내가 이러한 미덕을 저버리고 남편을 공경하지  않으며 여성으로서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경우에는 먼저 충고를  하고 안되면 집안에서 별거생활을 하다가 그것마저고 안되면 가볍게 상처가 나지 않을 정도로 때려 준다.                   
만일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양측의 친척중에서 각각 한 명씩의 중재자를 내어 절충을 시도한다.
이것마저도 실패하면 그제야 이혼을 공식화한다. 이러한 수준은 경전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 남편에 대한 아내의 공경문제나 그를 에워싸고 발생하는 분규의 해결책은
남녀 유별에서 오는 남성의 지위나 권리 행사이지 결코 가부장적인 남성일방주의는 아니다.
이슬람의 여성 유별관은 여성에 대한 여러가지 특혜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슬람은 부모에 대한  효도를 알라의 지고한 명령으로 받아들이며 인간행위의 규범중에서 의무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꾸르안에는 "..부모에게 선행을 베풀고,부모중의 한분이나  두 분 모두가 늙으시면 절대로 싫다거나 비난하는 말을 하지말고 좋은 말만 할지어다"(17:23)라고 부모에대한  효도를 명하고 있다.
부모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우대와 효도는 각별하다고할 수 있다.

교조는 누구를 잘  보살펴야 하는가 하는 한 신자의 물음에 답하면서 "천국은 어머니의  발 밑에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래서 자식이 품고있는 애정의  4분의 3은 어머니의 것이고 나머지 4분의 1은 아버지의 것이라는 경모(敬母)의 속담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렇듯 보살핌이 강조된는 이슬람에서  여성은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다.

                                             

 생리기간이나 출산전후에는 종교의무를  면제받고 금요일 집단예배에는 임의의 참여권이 부여되며 
마흐르는 아내의 전속물이다. 또한 가족부양의 책임은 전적으로 남편의 몫이어서 여성이 가족부양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으며,  여자는 딸이면 아버지의, 누이동생이면 오빠의 부양을 받는다.(계속)






13.한국과 이슬람: 신라와 이슬람의 만남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255년경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원나라 헌종에게 파견한 사신 뤼브뤽이 그의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까우레'라고 한마디한 것이 한국에 관해 유럽에 알려진 첫 소식으로,그리고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해온 스페인 선교사 세스뻬데스가 1593년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에 도착한 것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행으로 알려져왔다.




또한 1627년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한 네덜란드 상선 오우베르케르크호가 한국 해역에 나타난 최초의 이양선 이라고 여겨져왔다.
이처럼 한국과 서양의 만남이 뒤늦게 이루어지다 보니 근세에 이르러 서구인들이 눈에 비친 한국은 세상이 알지못하고,또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이른바 '은둔국'의 모습이었다.
 
한국에 은둔국이란 이름 아닌 이름을 붙인 사람은 미국의 동양학자이며 목사인 그린피스다.
그는 일본 도오꾜대학 교수로 있을 때인 1871년 한국에 처음왔다. 모든 것이 금시초견이고 초문이라서 의아스럽기만  하였다.
돌아간 다음해에 그는 "은둔의 나라 한국" 이란 책을 펴냈다.                                 
그가 한국을 일컬어 '은둔국'이라고 한 것은 세상을 등지고 어디엔가 숨어살아온 한국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뜻에서였다.

2년후 한국에 온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도 "한국역사"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 하였다.
 그러면 과연 한국은 그네들이 빈정대듯이 호젓하고 닫힌 나라였는가? 서구인들의 주장처럼 그들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확답은 역사에서 주어지고 있다.


뤼브뤽 보다 4-5백년,세스뻬데스 보다는 무려 7-8백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무슬림들이 오갔을 뿐만아니라,정착까지 하였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귀중한 사료가 중세 아랍 문헌 속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자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만방에 소개한 사람은 다름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무슬림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만치 1천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중세 무슬림 학자들은 자신들의 견문이나 연구 및 기타 여행가들의 견문 등을 토대로  하여 신라에 관한 여러 가지 지견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기술하였다. 

                         

신라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첫 기록을 남긴 사람은  쑬라이만이란 아랍 상인이다.
그는 현지체험기인 "중국과  인도 소식"(851)에서 신라가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후 아불 피다 같은 지리학자는 신라의 경도와 위도까지도 상세히 기술하였다.

이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지리관념이 타파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이 첨가되었다.
10세기 이후 신라에 관한 그들의 지식은 한층 세밀해졌다.
특히 중세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씨가 작성한 세계지도에는 신라를 중국 동남해상에 위치한 섬의 나라로 명기하였다.
이것은 서방의 세계지도에 처음 한국이 등장한 벨호의 지도(1562)보다도 무려 408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서
한국명(신라)이 기입된 현존 세계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아랍-무슬림들로서는 수려한 자연환경과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는 신라가 비록 멀기는 하지만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방면에 관한 여러 가지 생생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지리학자 마끄디시가 "창세와 역사서"(966)에서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고 하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뿐만 아니라,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라고 기술한 것이 그 한 예다.
저술자들은 또한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특히 황금이 풍부하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문자 그대로 '황금의 나라'였다.




최초로 신라를  세계지도에 명기한 이드리씨는 "그곳(신라)을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데 있다.
그  가운데 서도 금은 너무나 흔한바,심지어 그곳 주민들은 개의 목을 묶는 줄도 금으로 만든다"라고 기상천외의 놀라움을 토로했다.
만인이 그토록 선호하고 귀중히 여기는 황금이 신라땅에서는 개줄에서 가옥의 단장에 이르기 까지 그토록 흔하게 쓰이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못내 놀랍고 부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렇게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넉넉한 부의 혜택을 누리는 신라인들의 생활상은 한마디로 이상향적이었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의 나라다.
그곳에서는 불구자를 볼수 없다.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의 향기가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말끔히 치유된다." 
이것이 중세 아랍-무슬림들의 눈에 비친 신라인들의 생활모습이다.

또한 그들은 신라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며 '양순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바로 이것이 외래인들이 신라를 찾아갔다가 떠나려 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이렇듯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으로 선망하였기 때문에 아랍-무슬림들이 신라에 오갔을 뿐만 아니라,정착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신라의  대표적 향가이자 설화인 처용설화의 주인공 처용의 정체문제는 흥미있는 주제가 아닐수 없다.
이 설화의 최초 저본인 삼국사기는 처용 일행을 어느 날 동해가에 나타난,모양과 의상이 괴이한 4명의 자연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보다 약400년 후에 씌어진 삼국유사에는 느닷없이 처용이 동해 용의 한 아들로 둔갑하면서 신비와 주술이 함께하는 설화로 윤색,가공되어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때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5년(879)3월,장소는 개운포(오늘의 울산)다.
그러면 그 무렵 신라의 최대 국제무역항인 울산에 나타날 수 있는 낯선 외방인이라면 과연 누구였을까?
서구인들이 나타나기에는 아직 500년이나 이른 시기이고 보면 분명히 당시 지중해로부터 홍해와 인도양,
 서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남해 전역을 무대로 누비던 아랍-무슬림들 중 몇몇 사람이라고 추정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랍-무슬림들이 범선을 타고 사나운 파도를 가르던 그 바닷길을 따라 일찍이 아랍 땅에 찾아간 한국인도 있었으니,그가 바로 신라의 대덕고승 혜초이다. 그는 727년경 구법차 천축(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식(아랍)을 역방하였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물론,중국을 포함한 한자문명문명권 내에서도 처음으로 아랍 현지를 방문하고 유명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이 견문록은 8세기의 서역에 관한 기록 중에서 단연 으뜸가는 진서로 공인되고 있다.




신라와 아랍간에는 교역도 진행되고 있었음이 아랍 문헌에 의해 확인된다.
아랍-무슬림들의 신라 왕래에 관한 첫 기록을 남긴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는 역사지리서 "제도로 및 제왕국기"(845)에서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황금의 산출,그리고 아랍인들의 왕래에 관해 기술한 다음 신라에서 수입한 물품으로 비단,검,사향,침향,말안장,초피,도기,범포,육계(肉桂) 등을 나열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반도에서도 아랍을 비롯한 서역계의 유물이 다수 발굴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향과 안식향(安息香)을 비롯한 아랍산 향료,신라 고분과 사찰에서 출토된 각종 유리기구,
일반 서민들까지도 애용한 슬슬(서역산 보석)이나 구슬 같은 기호품,단검이나 토용 등이다.
그리고 신라인들은 서역에서 수입한 침향이나 육계,낙타  등을 일본에 재수출하는 중개무역의 지혜도 발휘하였다.
                                       
경주에서 남쪽으로 얼마쯤 가면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이른다.
신라고분군과는 좀 동떨어진 이곳에 원성왕(8세기)의 능으로 짐작되는 괘릉이 자리하고 있다.
제왕의 성역에 이색적인 용모와 복장을 한 장구(長軀)의 무인석상 한 쌍이 능을 수호하고 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길게 드리운 구레나룻,움푹 패인 큰 눈과 우뚝 선 매부리코,
우람한 몸통,어느 모로 보나 전형적인 중세 서역(오늘의 중앙아시아와 중동지방)인의 모습이다.



안강의 흥덕왕(9세기)능에도 이와 비슷한 무인석상이 있다.
신성한 묘역에 이례적으로 이러한 석상을 세운 것은 서역인의 장대한 기골과 이색적인 용모에서 오는 수호적 기능을 노린 것으로 사료된다.
이 요지부동한 무인석상이야말로 신라인들의 높은 지혜를,그리고 그들과 서역인들 간에 있었던 어울림과
만남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오면서 오늘도 무언가를 더 증언하려는 성싶다.(계속)




14.이슬람에 대하여:고려와 이슬람




한국과 이슬람세계 간의 교류상을 감안할 때, 한국은 결단코 은자의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
그러기에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신라에 이어 고려와 조선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왔던 것이다.

고려시대는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의 역사에서 새 장이 열린시대다.
이 시대의 초엽에는 아랍 상인들이 대거 몰려왔고,말엽에는 주로 이슬람을 적극 수용하고 십분 활용한 원제국(몽고)을 통해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영내에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으로나마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의 여러문헌에 의하여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고려사' 나 '고려사 절요' 같은 서적을 펼쳐보면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回回)' 나 무슬림을 일컫는 '회회인(回回人)'에 관한 기사가 간간히 보인다. 모두가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들이다.




'고려사' 의 기록에 의하면 1024년과 1025년,1040년에 열라자,하선,보나합을 비롯한 아랍 상인들이
100여명씩이나 무리를 지어 수은,물약,소목 같은 방물을 가지고 상역차 개경에 찾아왔다.
고려왕은 그들에게 개관까지 마련하여 후대하고,돌아갈 때는 금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동방예의지국다운 처사이며 두 이질문명간의 화목한 만남이다.


고려말에 이르러서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는데,그것은 몽골초원에서 달려온 기마유목민과 통칭 '색목인'이라는,그들의 문화교수인 서역 무슬림들이 주도하였다.
원제국에서 색목인들은 몽골인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제국의 내정은 물론 원정을 비롯한 대외관계에서도 두뇌역할을  수행하였다.

원대 조정에서 '문화교수'의 특수한 입지를 갖고 있던 무슬림들은 타의반으로 원제국의 고려 정략에 동참하여
사신,역관,서기,근위병,시종무관 등 여러 직분으로 고려에 공식 파견되었다.
그밖에 상인이나 민간인들도 다수 고려에 왔다.




그들중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고려에 잔류하여 귀화하고 동화한 자들도 있었다. 
이 무슬림들은, 특히 귀화무슬림들은 중세 한반도 무슬림들의 비조가 되고 이슬람의 정초자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일례가 삼가(三哥)장순룡(張舜龍)이다.




삼가는 1274년 고려 충렬왕의 몽골비(妃)인 제국(齊國)공주(원 세조의 딸)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다.
원래 삼가는 원나라에 있을때도 고관직을 제수받은 인물로,비록 공주의 사속인으로 고려에 왔지만
곧바로 벼슬이 낭장에서 장군을 거쳐 첨의참리까지 올랐다.

그는 덕수현(德水縣  ,현 북한 개성직할지 개풍군)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고려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남기고 44세에 별세하였는데, 후손들은 본관을 덕수로 하고 그를 덕수 장씨의 시조로 모셨다.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선위하고 순룡의  자택에 이사와서 기거하며 그 집을 덕자궁(德慈宮)으로 불렀다고 하니
순룡에 대한 왕의 두터운 신임과 그가 누렸을 권세를 가히 짐잘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12종파 25대로 이어져내려온 덕수 장씨의 문중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많은 명인들을 배출하였다.
순룡의 맏아들 양(良)은 판사(判事)를 지냈고,8대손인 정(珽)은 연산군 때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했다.
특히 12대손인 장유(張維)는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우의정까지 올라 명성을 날렸으며,'계곡집(谿谷集)'같은 명문집을 남겼다.


지금도 명문대가로 그 후예들이 선조의 종묘가 모셔져 있는 평택을 중심으로 하여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삼가의 귀화후 일족의 신앙생활은 밝혀진바 없으나, 적어도 몇세대까지는 무슬림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덕수장씨의 후예들은 남한에만 총 4554가구에 1만 9366명이 살고있다.


무슬림으로 고려 충렬왕 때 귀화하여 서임된 이로는 삼가외에 민보(閔甫)가 있다.
 벼슬이 대장에 까지 이른 그는 매를 가지고 다섯번이나 원나라에 사행하고 충선왕 때에는 평양부윤이 되어 존무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삼가나 민보 보다는 좀 뒤늦게 고려에 와 귀화하고 관직에 있었던 무슬림으로는 경주 설씨의 시조인 위구르 출신의 설손이 있다.
원래 그는 원나라 순제 때 황태자에게 경전을 가르칠 정도로 문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지방에 좌천되자 교분이 있던 공민왕을 찾아 고려로 와서는 봉후(封侯)되고 전답까지 하사받았으며
고려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설씨 일가는 여말선초의 명문가로서 조선조 개국시 명나라에 여덟차례나 사행한 장자 장수(長壽)를  비롯하여 여러 명인들을 배출하였다. 



태조때 장수가 연산부원군에 봉해지자 계림(鷄林)을 하사받아 본관을 경주로 정했다. 경제기획원의 같은 조사에 따르면, 현재 경주 설씨는 남한에 총 442가구에 인구 1952명이 살고 있다.
설씨 일가와  비슷한 경륜을 가진 가문으로는 임천(林川) 이씨가 있었다.




이와같이 몽골 통치시기에 '준 몽골인'으로 고려를 찾은 무슬림들,귀화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전파와 정착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회에서 상당한 권력도 행사하였다.
회회인들은 신전(新殿)에서 왕을 위해 향연을 베풀고 때때로 왕을 자신들의 연회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충혜왕은 피륙을 회회가에 나누어주어 그 이익을 취하게 하였으며,매일 그들로부터 15근의 쇠고기를  상납받았다.
몽골풍에 젖은 우왕은 한  무슬림 가정의 아들과 딸을 데려다가 시종케 하였으며, 매를 관리하는 응방(鷹坊)에는
많은 무슬림들이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즈음에 고려의 개경에는 이미 무슬림들의 공동생활체가 형성되어 하나의 사회경제적 세력으로서 고려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에 이르는 약 150년간에 원나라에서 유입된 무슬림들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에서 취락을 이루고 집단거주하며 고유의 생활양식과 종교의식을 유지하였다.




무슬림들의 도래와 더불어 그들의 음식문화도 들어왔는바 실례로 송도 설씨가 만든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적(薛炙)은 소고기나 소의 내장을 고명하여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인데,오늘날까지유행하고 있는 중동의 케밥이나 동남아의 사떼와 흡사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덕수 장씨는 명문가로서 그 세가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손들은 가문의 안녕과 길복을 빌기 위해 대대로 '장말도 당굿'을 벌인다.
'장말'은 '장(張)마을'의 준말로 덕수 장씨가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지금도 경기도 부천시 중동에 사는 약 40여호의 장씨 후손들은 매년 10월 1박 2일간 굿과 제사가 혼합된 장말도당굿을 지낸다.
원래 이마을 장씨들은 평택에서 살았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음식문화에서 또 한가지는 소주로서, 한국의 이 소주는 그 연원이 고려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내침한 몽골군이 가죽 술병에 넣고 다니면서 마시는 아락주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것이 바로 증유주인 소주다.
그런데 원래 이 소주는 유목민인 몽골인들의 것이 아니라 몽골서정군이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을
공략할 때 농경민인 서아시아인들에게서 그 양주법을 배워온 것이다. 세번 고아내린 증유주라 하여 이름 붙여진 소주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뒤 소주는 중동지역에서 줄곧 전승되어왔다. 한국에서 소주는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일본원정을  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한후 원정군의  본영이던 개성과  전진기지가 있던 안동과 제주도 등지에서 처음으로 빚어졌다.

 문명간의 만남은 서로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두 문명의  만남과 교류는  보다시피 대부분 제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는 퍽 미숙한 상태였다.
당대 고려에 관한 대표적인 이슬람 문헌기록으로는 라쉬듯 딘의 세계통사 '집사'가 있는데, 이 책에서  이러한 실상을 찾아볼수 있다.
라쉬듯 딘은 저서에서 이슬람학자로서는 최초로 한국을 신라가 아닌 카올리(Kao-li)라고 칭하면서 고려를 원의 12개성 중 한개 성(제3성)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고려의 왕권정치를  지적하고 동골과의 혼인관계도 언급하고 있다.
모두가 사실과는 어긋남이 없으나 극히 소략한 기술에 머물고 있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은 주로 몽골의 내침과 간섭이란 역사적 배경에서 어찌보면 단향적(單向的)으로 이루어 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만남이었기에 이슬람의 전파나 수용은 역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길지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영향은 자못 심각해 후대인 조선시대와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다.(계속)




15.이슬람에 대하여:조선과 이슬람




'조선왕조실록' 을 비롯한 여러 사적에는 전대의 문헌기록과 마찬가지로 회회인들의 정착 내지는 회활동과 지위에 관하여 누누이 언급돼 있다.
실록에 따르면 1407년에 회회교의 이맘인 '도로'가 처자를 데리고 내조하자 태종은  집을  주어 살게 하고서는 그에게  여러가지 특전을 베풀었다.
그러던 태종이 국가재정이 어려워지자 왜인과 회회인들에게 주던 녹을 줄이라고 하명하였다.


회회인들에게 주는 녹을 줄여서 국고를 충당할 정도라면 녹을 받은 회회인들이 수적으로도 많거니와  그들의  직위 또한 상당히 높았음을 시사해준다.\r\n또한 세종실록을 보면 당시 무슬림들은 조정의 특별한 배려속에 살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회회노인(무슬림 원로)과 회회승도들은 그들 나름의 이색적인 복식을  하고 근정전에서 거행되는 신년하례의식이나 동지 망궐례(望闕禮)같은 각종 궁정행사와 의식에 신하들과 함께 꼭꼭 참석하곤 하였다.
임금에 대한 그들의 하례는 당대 무슬림들이 누리고 있는 사회적 위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편, 인화와 상술에 능한 무슬림들은 조정과의 관계에 각별한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회회사문 도로가 태종에게 모자에 다는 수정구슬을 방물로 진상하자 왕은  보답으로 쌀 5석을 하사하고
금강산과 순흥,김해등지에서 수정을 채집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도로는 마침내 300근이나 되는 수정을 채집해 태종에게 헌상하였다.

이러한 조정의 배려속에서 선초까지도 무슬림들은  그들 특유의 복장을 하고 이슬람식으로 궁정의례를 치렀으며,불승들과 동등한 서열로 조정하례에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이 이미 한화(韓化)되어 여느 백성과 다를 바 없게  되자 세종대에 와서는 무슬림들의 이방적인 행태를 금하도록 하였다.
세종대왕은 회회인들의 의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백성이 아니라고 하며 혼인하기를 꺼리므로
이미 백성이 된 이상 한식 복장을 따르고 이슬람식 송축예법도 폐지해야 한다는 예조의 상주를  듣고 곧 그렇게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슬람교는 조정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무슬림들은  평등하고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역법과 관련이 있는 천문기상학과 천문관측기기의 제작에서도 이슬람천문학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아직 연구가 미흡하여  구체적으로 밝힐단계는 아니지만 조선조에 제작,정비된 대소 간의(簡儀)나 혼천의(渾天儀),
해시계인 '앙부일구',물시계인 자격루,태양과 별의 운행시간을 관측하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 여러가지 천문관측기기들은 원대 중국에 도입되었던 동류의 이슬람 천문기기들과 구조나 기능에서 대동 소이하다.

그중 자격루에 맞먹는 소리나는 물시계가 이슬람에서는 이미 8세기에 만들어져 프랑크 국왕에게 선물로 보내지기 까지 하였다.


이와  더불어 공예기술 면에서도 이슬람문명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중 하나가 도자기의 청색안료인 회청(回靑,혹은 회회청-muslim blue)의 도입이다.
원래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지역에서  산출되던 이 안료는
무슬림 상인들을 통해 중국과 한국(조선조)에 수출되었다. 

이 새로운 안료를 사용하여 15~16세기경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청색무늬를 넣은 독특한 청화백자가 출현하였다.
조선조에서는 세종 때까지 백자가 자기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세조 때에 와서 중국에서 회청이 들어오자 화려한 청화백자가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료의 수입이 어려워서 생산량은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국내산 안료가 개발됨에 따라 청화 백자는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한국에 관한 기록을 남긴  무슬림학자는 오스만 터키 출신의 알리 아크바르이다.
그는 1500년대 초 오아시스 육로로 호탄(현 위구르 자치주)을 거쳐 중국을 방문하고 나서 1516년에 페르시아어로
중국여행기 "키타이서"를 저술하였다. 
저술시기는 조선시대이지만 그 내용은 고려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여행기에서 카올리,즉 고려는 12개 중국 행정지역의 하나로(제 9지역)로서 소규모의 영세상인들조차도
15만 시르의 자금을 갖고 있을 정도로 굉장히 부유한 지역이며,그곳에서 생산되는 아마포는 품질이 우수하다고 하면서 카올리 상인들에게서 은화로 여러가지 상품을 구입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시대.특히 그 말엽부터 조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 동안 진행된 이슬람과의 만남은 여러모로 상승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대내외 정세에 밀려 이러한 상승세에 제동이 걸려 급기야  그후 수세기간의 단절기,공백기를 겪게 되었다.


우선 대외적으로 그간 한국에 대한 이슬람의 '공급원'역할을 해오던 원나라가 망하고, 한국에 대한 이슬람의 관문역할을  해오던 중국이 해금(海禁),관금(關禁) 등 대외폐쇄정책을 실시(명조)한 데 이어 무슬림들에 대한 심한 탄압정책을 자행(청조)하였음며, 이에  더해 서세동점의 새로운 국제정세하에서 무슬림들이 제해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모든 객관적 정세로 인하여 이슬람의 동방진출이 전반적으로 퇴조되고 한반도로의 이슬람 유입 루트가 소멸,차단되었던 것이다.
그후 무슬림들이 집단적으로 한반도에 이주해 자그만한 공동체를 이루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부터다.
그들 대부분은 1917년 러시아 볼세비끼혁명 이후의 투르크계 망명자들로서 만주를 거쳐 일제 치하의 한국에  들어왔다. 
약 200명으로 추산되는 그들은 신의주,혜산,평양,흥남,서울,천안,대전,대구,부산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일제의 비호하에 각종 생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서울에 학교와 사원을  세우고 경전 꾸르안을 출간하여 이슬람교육과 종교의례를 계속하였고,
홍제동 부근에 무슬림 전용묘지까지 마련하여 전통을 지켜나갔다.
그러다가 1945년 한반도 광복과 1950년의 한국전쟁이란 잇따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대부분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말았다.



한편,그들이 경영하는 점포에서 일하던 몇몇 한국인들이 그들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는데,그들을 현대 한국 무슬림의 비조라고 할 수 있다.

그뒤, 우리들이 잘 아시다 시피 여단 규모의 터키군이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한국 무슬림공동체가 형성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후방에서 '앙카라학교'를 세워놓고 전쟁고아들을 양육하였으며,종전 후에는 군 이맘 압둘가푸르가 직접
대민선교에 나서서 현대 한국 무슬림의 제 1세대를 탄생시켰다.
그의 인도하에 1세대들은 1955년 드디어 첫 이슬람공동체인 '한국이슬람협회'를 결성하여 이슬람 정착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후 여러 이슬람국가들과 국제이슬람단체들의 형제애적인 지원과 한국무슬림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해 한국 무슬림공동체는 점차 구색을 갖추고 의젓이 자라나, 마침내 서울 중앙사원을 비롯해 전국에 5개의 사원을 건립하고 약 4만명의 신도를 구성원으로 갖게  되었으며,
범 세계적 이슬람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