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7-0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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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支那史)와 일본사(倭史)는 한국사(韓國史)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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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支那史)와 일본사(倭史)는
한국사(韓國史)의 일부이다
○ 머리말
최근 개최되었던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공국가주석이 “한국은 실질적으로 支那의 일부였다”고 말 하여,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지역 패권사상을 노골적으로 발설하였다. 이를 들은 미국의 트럼프대통령 또한 한국과 한국역사에 무지한 듯, 왜곡된 한-중 역사를 그대로 들었다고 옮겨 말하였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새삼스럽게, 이 시대에 신제국주의 냄새에 민감해 져가고 있는 세계유식자들에게는 물론, 한국에서는 일반시민들에게 조차도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누군가가 ‘역사는 다시 쓰여 진다’고 말 하였던가. 지금 中共은 대국답지 않게 역사를 다시 쓰려하고 있으며,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끝내 부인하려는 역사왜곡을 마다하지 않음으로서 각각 신 세계제국주의와 지역패권주의의 길로 성큼 성큼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생각들이요 또한 오늘만 알고 내일을 모르는 자해 행위임이 확실하다. 그들은 정녕 모르는 걸까, ‘내일이 되면 역사는 강약이 뒤바뀌며 또 다시 새로 쓰여 질 수 있다’는 엄연한 역사정글의 법칙을.
◎ 일만 년 전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이곳 동아시아에
천손민족(天孫民族)으로 최초로 정착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일만 년 전(서기전 8000년), 지구의 기상기후와 지리적 조건이 막 오랫동안의 빙하기를 벗어나 오늘날의 그것과 비슷하게 형성되기 시작함으로서 그 동안 동서남북으로 떠돌아다니던 인류들은 대체로 위도 36도선 내외의 온대를 중심으로 정착하여 문명생활을 시작하였다. - 약 60만 년 전에 있었다는 支那 주구점의 북경원인류는 그 후의 행방을 몰라 지금 한국인 또는 중국인의 원조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
우리한민족(韓民族)의 조상들은 동아시아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무리를 이루어 정착하였는데, 지금의 만주와 동부내몽고를 지리적 머리 쪽으로 하고, 지금의 황해(당시는 사람 살던 육지)를 중심으로 동으로 한반도와 倭
열도, 서와 서남으로 화북 화중 화남일대의 저지대와 평지평원에 바람풍자형(風字形)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하여 주로 농사(단, 현 동부내몽고와 서북만주일대는 半狩半農)를 지으면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 * 류제헌의 「중국 역사 지리」 45쪽, 井上光貞 외 2인의 「日本史」 8쪽, 문정창의 「한국고대사. 상 」)
이 시기 인류역사는 여전히 모두가 전설로 시작되고 있는데 우리민족의 이 시기 역사 또한 전설로 시작된다. 즉, 우주만물을 창제하신 하느님(환인)은 지구의 조건을 예의 주시하다가 이때가 되어서 으뜸신(환웅)에게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가르침을 주어서, 이미 천손(天孫)으로 점지해 놓았던 우리민족에게 내려 보내어 신시(神市)를 열어 우리민족국가를 개천(開天)하였다(서기전 8000년 쯤). 환웅천왕은 군림과 다스림이 아닌 재세이화사상(在世理化思想)을 기조로 360여 가지의 소박한 생활편의수단(불, 의복, 그릇, 칼 등등)개발과 계몽(啓蒙)에 주력하였다. 그 후 환웅이 조천(朝天)한 뒤를 이어 환웅의 자손들과 현자들에 의하여 ‘성현(聖賢)왕들의 시대’(The Sage King's Era)가 이어지면서 우리민족의 원시공동체사회는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 5800여 년 전 치우대왕(蚩尤大王)이 동아시아패권을 장악하다
일만여 년 전부터 시작된 해빙(解氷)은 약 6000여 년 전에 이르자 드디어 안보전략환경의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우선 지금의 황해가 저지대(최하수심 140미터)로부터 바다가 되기 시작함으로서 대륙과 현 한반도와 倭열도방향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런가하면 현 섬서성 감숙성 이서와 이북지대 즉 서방(현 내외 몽골과 서역)이 크게 건조해 감으로서 그곳 주민 또한 동으로 향하여 대륙 평원평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안으로도 사회계층의 형성과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국가적 통제의 필요성에 의하여 우리의 환웅왕조가 성립(BC3898 ; 임승국역 「한단고기」와 여운건․오재성의 「우리 고대사」의 74쪽 등)되였다. 이는 支那의 고대전설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그들의 선조격인 황제(누를 黃자 黃帝 : BC2692)시대에 비해서도 1000년이 앞서고, 그들 전설상의 요순왕조시대보다 무려 1500년이 앞서는 사건이다.
그런데 이 환웅왕조 제14대에 치우대왕이 집권하였는데 이 시점에서 우리한민족(韓民族)역사테두리 안으로 支那史 시조전설의 얘기가 생겨나게 된다. 支那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우리 심학균의 「규원사화」 그리고 임승국(역)의 「한단고기」를 참고하여 支那사의 시작과 치우대왕의 ‘동아시아 패권얘기’를 간추려 보기로 한다.
우리환웅왕조통치하의 산동반도 곡부지방에 살던 헌원(軒轅)이 위와 같은 안보환경변화에 따라 시국개조를 내세워 반란을 도모하였다. 그러자 우리의 치우대왕은 이 반란을 토벌하고 헌원을 항복받아 중원일대를 장악한 뒤에 이 헌원일당을 멀리 황토고원 변방으로 축출하였다. 그 후로 이 헌원일당이 황토고원을 중심으로 서방민족 등을 규합하여 중국전설의 오제(五帝) 중 첫머리의 황제 - 황토고원지방 제왕이란 뜻의 누를 황자 黃帝 ; 支那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전설의 ‘사람 머리에 뱀의 몸’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그때만 해도 支那사람들은 미개(인간을 반쯤 이해한 상태)했다는 뜻도 된다 - 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사마천의 중국전설역사는 곧 우리전설역사의 한 부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은제국(殷帝國)이 대륙을 지배하고 서방민 족을 흡수동화하여 공동조상을 가진 광의의 우리민족으로 만들 었다
세월이 흘러 BC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안보환경이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동아시아의 기상기후는 지금의 조건보다 2~3도 올라간 상태에서 과우기(寡雨期)를 맞이하여 황해는 매년 1미터씩 바다높이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자 특히 저지대주민들의 고지대로의 이동과 서방민족들의 동방평원으로의 이동이 속도가 붙고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특히 우리평지평원주민들의 안보불안이 가중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은 BC2333년에, 환웅왕조를 대신하여 좀 더 강력한 단군세습왕조를 설립하였고, 황하와 회대지방에는 대륙분국(大陸分國)으로 남국(藍國)을 두었다. 그런데 이 분국에는 BC2000경부터 한 후국(侯國)인 상(商)을 건설하여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유명한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주인들로서 우리민족문화의 전승자들이었다. (支那사학자 부시년傅凘年의 논문『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
이들은 삼신(三神-환인 환웅과 단군, 또는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을 받들어 제사지내고, 흔히 신인공식(神人共食 ; 제사상에서 조상께 술 올리고 그리고 내려 받아 마시고, 그래서 제사 끝에도 그 밥상과 함께 그 술 마시고)으로 술에 취해 신의 경지를 즐겨하는 습성을 가진 우리민족이었다 -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러하다. - 특히 상(商)은 삼신원리종교국가화(三神原理宗敎國家化)하여 중원(中原)을 정복하고, 나아가 서방으로 멀리까지 진출하여 전설상 같은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진 하(夏 : 諸夏라고도 하며 支那의 최초국가로 기록되어 있다)를 정복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점차 알려지는바에 의하면 전설상의 하의 수도 언사(偃師 ; 낙양주변)에는 앙소문화(이리두․이리강문화 ; 夏 문화 즉 지나의 元祖문화)보다 용산문화(龍山文化 즉 상의 문화 곧 우리 민족문화)가 더 밑에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음으로서 중국의 최초 국가 ‘하’의 실존조차 의심스럽게 되었고, 그래도 있었다면 미미한 존재였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烏越憲三郞의 「古代中國と倭族」의 75~77쪽, 이근명편역의 「중국역사(상)」의 56쪽) 다시 말하면 이때 것으로 쓰여 진 중국역사는 우리역사를 빌려가 쓴 역사로 바로 우리역사의 일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우리의 평지평원원주민족(즉 東夷族)이 支那의 원조(元祖) 서방민 족을 흡수동화하였다
바로 그 우리민족국가 상(商)은 서방 깊숙한 변방(오르도스지방을 넘어)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이때 상의 한 번국(蕃國)으로 후국이었던 서방민족의 주(周)가 은의 문화로 점차 계몽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월이 흘러 BC1100년경에 이르자 이 주가 강대하게 발전하여 서방민족들을 규합, 호화·사치와 독재로 쇠퇴하는 은(殷 ; 商을 후기에 은으로 불리게 되었다)을 공격하여 타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크게 잡아 통 털어 100여만의 서방연합민족(중국민족의 원조)이 당시 3000여만의 우리 평지평원원주민족속으로 이민해 들어왔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은 이들을 흡수동화하여 광의의 우리민족 즉 조상을 공동으로 하는 우리민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기본적으로 그 이후 생성된 이들 광의의 우리민족이 활동한 支那역사는 곧 우리한민족사(韓民族史)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 춘추․전국시대, 광의의 우리민족끼리 패권 전쟁하였다.
이어서 중원중국에서는 춘추시대가 계속되는데 이는 다른 표현으로 ‘5국의 패권시대’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패권전쟁은 모두가 ‘광의의 우리민족’끼리의 전쟁이었다. 첫 패권자인 제(齊)는 우리평지평원원주민족의 중심지인 산동성에 봉건 된 국가로 짧은 기간 내 용이하게 우리원주민에게 흡수동화되었고, 특히 원주민출신의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강대국이 되었다. 두 번째 패권국인 진(晉)은 주초(周初)에 산서성 황토고원지대 분수(汾水)에 봉건 된 주의 동족국가였다. 그러나 주변에는 중국사서에 융적(戎狄)이라 불리는 반수반농(半狩半農)의 원주 우리민족(즉 부여족)이 있었는데 조기 국력배양을 위해 스스로 혼혈정책을 실시하여 흡수동화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 패권자인 초(楚) 또한 우리민족의 한 갈래인 묘족(苗族) 출신으로, 특히 이들은 원주회인(原住淮人)으로, 周초 ‘삼감의 난’(三監之難)에 동조했다가 주 왕실의 공격을 받아 남으로 피난하여 현 무한(武漢)지방에 초국(楚國)을 설립(BC 8세기경)하였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어느 다른 후국보다 우리 원주민색이 농후한데다 입국지역 일대 우리원주민까지 포섭하여 오히려 우리민족특성의 강국이 되었다. 네 번째의 송(宋)은 주지하는바와 같이 주가 우리민족국가 상(商)을 멸망시킨 뒤 왕자인 녹부(祿父 즉 武庚)를 정략적으로 상의 수도에 남겨 종묘사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녹부가 ‘삼감의 난’을 주도함으로서 처형되고 또 다른 왕자를 멀리 현 하남성으로 이주시켜 송후(宋侯)로 봉하였는데 이 후국 즉 상왕실(商王室)의 나라 송이 강대국으로 발전하여 한때 춘추시대의 패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후대 또 하나의 송은 우리 고려와 선린우호했다)
다섯 번째 패권국인 오(吳)는 주왕실의 형제 중 일부가 오태백의 지휘로 남하하여 태호북안(太湖北岸)에 이르러 주변의 왜이(倭夷=東夷의 일족)의 도움으로 자리 잡고, 19대를 지나면서 거의 원주민에 흡수동화되어 우리민족국가(BC585년)를 성립시켰으며 북으로 진출하여 우리민족들의 지지하에 제(齊)와 노(魯)를 제압하면서 패자가 되었다. 한편 바로 그 남쪽 즉 화남의 우리 원주민이 단결하여 월(越)을 세웠는데 패자인 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양자강일대를 장악한 뒤에 북으로 진출하여 이 또한 한때 패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춘추시대의 5패권국가 모두가 우리 원주민족에게 흡수동화된 민족국가들이었음으로 그 시대의 역사 또한 광의 의 우리민족역사임과 동시에 우리 한국역사(韓國歷史)의 일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닌 것이다.
◎ 우리민족국가 진 (秦)의 통일과 우리 진시황의 산동반도 추억방황
BC221년에 진은 중원제국 즉 광의의 우리민족국가들을 최초로 크게 통일하여 통일지나(支那 : China 차이나)제국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이 진과 진시황이 우리민족출신이요 우리민족국가라는 사실을 支那 자신의 역사가 부시년(傅凘年 :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의 논자)에 의해 들어보기로 한다.
“진은 원래 영성(嬴姓)이다. 회이(淮夷)는 본래 동해상(東海上 ; 필자 주-황해의 중국식 옛 이름)의 거주지에서 회수지역으로 이주해 온 종족으로서 동부평원 원주민족의 일부이며 ‘상제국(商帝國)의 구성종족’이었다. 상제국이 서북방 깊숙이 영토를 확장했을 때 주후(周侯)를 봉하고, ..... , 영성국(嬴姓國)으로 현재 고증이 가능한 것은 상 말기의 엄(奄), 회이의 서(徐), 서방의 진(秦), 조(趙), 양(梁), ... 정도다. 동방의 서(徐)와 진조(秦趙)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증거다, .... .”
이러하기에 진시황은 통일 후에 산동성과 회계(會稽 : 양자강어구지역)어간을 빈번히 순시하면서 동녘바다 속의 미지의 판타지 랜드, - 즉 옛날 자기 조상이 살았을 것으로 믿어지는 - 봉래산(蓬萊山)을 그리워하였으며 수시로 그곳에 있는 태산(泰山)에 올라 자신의 조상이요 그곳 원주민 즉 우리민족 조상들에게 제사지내고 추억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끝내 그 지방 순시도중에 죽어갔다. 다시 말하면 支那가 자랑하는 이 통일 진과 진시황의 역사 또한 곧 우리 한민족역사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민족국가출신 항우와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의 역사는 우리 한국역사의 일부이다.
BC209년, 독재국가 진왕조에 대한 진승․오광의 반란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별종(別種)이더냐’라는 단순한 세상뒤집기 민란이었기에 수도방위부대에 의해 즉시 진압되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서 초와 옛날 제(齊)․노(魯) 그리고 오월의 소주(蘇州) 지역 등 우리 원주민족특성이 짙게 배어있는 광의의 우리민족주민지역인 회대(淮岱)지방에서, 그곳 소주출신의 항우(項羽)가 주도하는 통합반란군이 역시 그곳출신의 유방(劉邦)군단을 전위부대로 하여 서안(西安 : 關中咸陽)으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이 평지평원출신통합반란군이 진왕조를 멸망시킨 뒤, 항우와 유방이 소위 초한전(楚漢戰)이라는 주도권전쟁을 치른 뒤에 유씨왕조의 한제국(漢帝國)이 성립되었다.
이 한제국의 민족구성 즉 민족특징은 바로 광의의 우리민족을 통합한데 이어 우리평지평원민족의 특성을 더 보탠 우리민족이 되었다. 이로서 중국의 기본적 민족구성은 일단 완성되고 이들을 일컬어 한민족(漢民族)이라 한다. 그러기에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국의 한민족(漢民族)은 우리조상을 공동조상으로 가진 우리민족으로서, 곧 광의의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일부이고, 그들이 엮어낸 支那역사는 바로 우리한민족역사의 일부인 것이다.
◎ 우리종주민족 대표국가인 고구려의 중국(中原國家)지배역사
○ 고구려의 건국역사
BC2333년에 개천된 단군조선이, 성립된 지 1205년만인 1128년에 문을 닫았으나 뒤이어 상당수의 우리 종주민족 열국들이 지역을 분할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개념상) 현 만리장성 안으로는 청구국(靑邱國 : 환웅왕조시대의 화북, 중원지역의 분국)의 후예들 - 광의의 우리민족보다 우리평지평원원주민특색이 여전한 남(藍)과 상(商), 서(徐), 엄(奄) 그리고 고죽국 등 - 이 할거하였다. 한편 그 북으로는 남국의 영역에다 신조선, 번(불)조선, 말조선, 부여 등이 할거하여 종주민족(宗主民族)국가의 역사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BC280년경에 있었던 소위 ‘조(朝)-연(燕)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삼조선열국 중의 하나인 번조선은 멸망의 위기에 처해지고 우리 고조선의 영역은 오늘날의 남만주의 대능하(요하보다 서쪽에 있는 강)까지 후퇴하였다. 그러나 BC210년경 진(秦)이 연을 토벌할 때 우리 신조선(辰朝鮮)은 다시 불, 말조선과 연합하여 연을 동에서 서로 샌드위치공격을 실시, 한 많았던 실지를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강성중인 흉노와 국경을 마주하였는데 당분간은 ‘힘의 균형’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BC200년경에 역시 영토문제로 모돈(冒頓)이 지휘하는 흉노의 반격을 받아, 앞서 진출해 있었던 우리 신조선연합군과 주민들은 부득이 철수하였다.
이때 이들 중 일부는 철수도중에 선비․오환산(鮮卑․烏丸山)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고향인 부여지역으로 가고 그리고 그 일부가 고주몽의 지휘하에 남으로 내려와 신조선의 수도요 우리 단군왕조의 수도였던 왕검성 즉 ‘붉은산’(赤峰) 근처의 졸본(卒本)을 근거지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 * 고구려 건국은 통설인 BC 37년 설과 그 보다 약150년 앞선 BC200년경 설이 있다. 필자는 위와 같은 근거로 BC200년 설을 지지한다)
○ 우리 종주민족국가, 신라․백제의 성립과 선비(鮮卑)․오환(烏 丸)과의 국가․민족 관계
서기전 2세기경의 우리민족열국들에는 대표적인 것이 만리장성 남북의 고구려를 필두로 발해만 연안에 위만조선(번조선계열), 중북부만주에 부여, 만주와 한반도북부에 최씨 낙랑국, 한반도에 마한이 있었고, 일본열도에는 우리민족이 벼농사문화를 가지고 건너가서 이제 막 ‘야요이문화’를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직도 이웃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인 BC109년부터 한(漢)은 우리 위만조선을 침략하였다. 4~5차에 걸친 치열한 방어전 끝에 위만조선은 군사전략․전술적으로 완전한 승리(漢은 戰後에 역사상 유례없는 군법회의로 패전을 자인하였다)를 쟁취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국가분열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체적으로 현 남만주 발해연안지대에 4~5개의 자치국(自治國 ; 중국역서는 이를 소위 한사군(漢四郡이라고 왜곡하였다)으로 분열하였다.
그런가하면 선비․오환에서 같은 이름의 우리 고조선계 국가가 성립, 점차로 발전하여 155년경에는 도전해 온 남북 흉노를 멸망시키고 동아시아 초원지대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인접하는 고구려와 동족지유대(同族之紐帶)를 다짐하면서 대외진출을 시도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대륙 황해연안의 고대한국평지평원원주민지역을 수복하고 세계화전략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다물전략(多勿戰略)을 국가안보전략 즉 국시로 정하고, 온조와 비류를 남으로 내려 보내 근거지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산동반도와 하남성, 강소성, 섬서성, 안휘성일대에 양백제(兩百濟)가 성립하였는데, 그 보다 먼저 신라가 건립되었다. 고구려는 국가성장의 동력과 기상(氣象)을 살려 서기 32년에는 먼저 후방의 우리 최씨 낙랑국을 합방하고 곧 이어서 자치공국들을 합방하였으며, 나아가 한의 본토를 공격하여 49년에는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 요동지역 일대를 점령하였다. - 고대한국의 고토를 수복하였다고도 말 할 수 있다 - 그 후 105~121년간에 있었던 요동패권전쟁(17년전쟁)에서도 완승하여 고구려는 우리 종주민족국가로서 광의의 우리민족 중원국가인 한(漢)과의 대결에서 이니시어티브를 쥐게 되었고 따라서 지역패권국가가 되었다.
특히 17년전쟁 중 118년에서 121년 어간에는 본격적으로 우리민족인 선비(鮮卑)․오환(烏丸)과 동맹하여 한(後漢)을 공격, 122년에 번조선의 위만정권의 단절을 가져왔던 자치지역 고토(소위 한사군)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이때부터 고구려와 선비․오환은 더욱 굳은 혈맹의 동족이 되었다.
○ 열국화된 선비족과 애증의 갈등, 강대국이 된 백제와의 모욕전쟁
몇 백 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선비족은 낙랑근방에 모용부(慕容部), 동몽고 열하의 단씨(段氏), 그 북방의 우문부(宇文部) 그리고 내몽고 치치하얼 남부와 귀완(歸緩)에 탁발부(拓跋部) 등으로 열국화하여 경쟁적으로 5호16국시대 패권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특히 모용부가 337년에 연(燕 : 즉 前燕)을 세워 화북의 패권을 노림으로서 고구려와 갈등하였고, 우문부는 전연을 고구려와 함께 연합공격이후 모략에 빠져 고구려와의 대외관계에 중립을 지키다가 더 뒤에는 수, 당 건국의 주체세력이 되었고, 탁발부는 고구려와 더욱 굳은 동족동맹으로 고구려의 의지와 함께 북위가 되어 중국(중원정권)을 지배하게 된다.
한편 백제는 이 지음 국력이 정점에 도달하였다. 심지어 백제의 근초고왕은 북진하여 고구려를 공격, 전연(前燕)과도 유화정책으로 흔들리던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한반도 서부연안지대를 포함하여 환황해(環黃海)제국을 건설하였다.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159쪽)
이러한 수모를 소시 적부터 경험한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심기일전하여 국가개혁(학문장려, 율령반포, 공무원제도 혁신 등)을 통해 고구려 부흥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구려의 전통적 다물사상을 세계화사상으로 승화시켰다. 때마침 티베트 계 저족(氐族)의 부견이 중원의 패권자(전진前秦)가 되고 그의 세계화 이상과 사해혼일사상(四海混一思想)을 앞세워 고구려와 동맹을 제의하자 즉시 이에 응하여 그로부터 불교(大乘佛敎)를 전달받고 이를 국가부흥의 구심국가전략사상으로 삼았다.
○ 광개토대왕의 서역정벌, 장수대왕의 동족동맹 탁발부북위 적극지원
지나의 중원(支那中原 ; 지나인들이 가진 자기네 서안-낙양정권중심전략사상에서 나온 용어)이 5호16국시대로 복잡해지자 고구려는 소수림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러한 국제안보환경을 최대로 활용 다물전략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고구려는 빛나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시대를 맞이하였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백제응징을 위한 서전을 일차 마무리하고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적시적절하게 활용하고자 395년에 고구려군의 정벌공격방향을 역회전시키고 탁발규의 북위와 연합하여 대륙의 북서방으로 진격하였다. 우선 쇠망 중인 북연을 우회하여 거란( 중 일부인 나려)과 흉노를 토벌하고 잔적을 추격하여 서역방향으로 전진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서역정벌전쟁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태행산맥서부의 평성(平城), 성락(盛樂)을 점령하고, 음산산맥(오르도스 황토고원의 북방지대)을 따라 나 있는 고래로부터의 서역-적봉지역간 실크로드를 통하여 현 감숙성 서방 즉 내몽고의 서방 끝 지역인 와룡지역의 파부산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 ; 오늘날의 돈황지역)에까지 진출하여 고구려 아니 한국민족역사상 최대강역의 그림을 그렸던 바 있다.
그리하여 미래 중원을 포함한 가능한 최대지역의 세계화를 위해 광개토대왕은 탁발부선비들을 주력으로 낙랑지역의 고구려인들 - 탁발부족들과 낙랑의 고구려인들은 이미 혼혈되어 한민족이 되어 있었다 - 을 이미 점령했던 성락(盛樂)지역으로 식민지 개척을 위해 대이동하는 것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북위는 신종(臣從)관계를 뛰어넘은 거의 완전히 세계화전략사상으로 결속된 동족동맹국관계가 되었다.
○ 통일북위(北魏)를 통한 고구려의 실질적인 支那중원 지배경영
북위는 고구려의 적극지원으로 439년에 화북통일을 완성하여 그 후 150년간 중원정부를 유지하면서 支那의 남북조시대를 영위하였다. 그 동안 고구려 장수대왕은 북위와 외손의 나라 그리고 사돈의 나라로 돈독한 친족혈맹관계를 다지면서 중원支那의 세계화를 도모함으로서 실질적으로 중원 支那를 지배경영 하였다.
특히 낙랑지역고구려출신인 북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와 그의 딸 마태후(溤太后)에 의한 사위나라로 그리고 섭정정치 등을 통해 고구려의 영향이 최대로 미치고 있었다. 이 시대 즉 북위의 세조, 태무제, 선무제시대를 계기로 고구려는 중국과 선비 그리고 고구려의 사해혼일(四海混一)전략사상으로 세계화를 추구하고, 돈황일대의 불교예술발전을 위해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문정창의 「한국고대사(상)」, 진순신의 「중국오천년(상)」, 의 324~5쪽] 이와 같이 이 시대 북위와 고구려관계사만 보드라도 중국사는 우리 한국사의 일부임이 잘 나타나 있다 하겠다.
◎ 광의의 우리한민족(漢民族)이 우리민족 선비계열의 수(隨)․당 (唐)․거란(契丹 : 즉 遼)을 흡수 동화.
○ 광의의 우리한민족(漢民族)이 수와 당을 흡수동화하다
550~7년에 고구려의 동족혈맹 탁발부선비의 북위가 고구려의 세계화전략사상에 동감하는 개화된 중앙정권의 전통계승자 북제(北齊)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선비 우문부(宇文部 ; 고구려의 옛혈맹, 그러나 그 후 중립)의 북주(北周)로 분열하였다. 그리하여 패권전쟁결과 북주가 승리하였는데 동시에 이 정권을 탈취한 양견이 수(隋 ; 선비족의 민족주의화 명분)를 수립하고 선비족의 세계화를 적극 지원한 고구려에 대해 적대하였다.
한편 수와 당은 남북을 통일한 이후 사상과 학문 그리고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특히 통일국가 유지전략면에서도, 광의의 우리민족인 한민족(漢民族)에게 흡수동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민족 선비와 혼혈선비족인 수와 당은 광의의 우리민족인 한민족(漢民族)에게 거듭 흡수동화되어 역사활동을 계속하였다.
○ 걸안(요)이 요서지역(灤河 : 난하 이서지역)의 고구려유민(주로 숙여진)을 동원, 중원을 점령 지배하다.
걸안(契丹 : 후에 遼 또는 大遼 그리고 다시 걸안)은 분열된 옛 선비부족 중 단씨계열이 주축을 이룬 부족이다. 다시 말하면 이 또한 우리 고구려와 같이 부여계 동족으로서 번조선(東胡)의 한 갈래인 것이다. (문정창의 「한국고대사(하)」의 290쪽) 그런데 이 걸안은 그 동안 소규모로 산발적으로 고구려와 중원정권에 대해 귀속과 침탈을 계속하다가 907년에 ‘야루아보기’에 의해 거란국이 세워지고 926년에는 주지하는바와 같이 부여성을 공격하여 우리 후고구려(발해)를 멸하였다. - * 참고 ; 바로 다음해 918년에 한반도에는 왕건의 고려가 성립되었다 -
그리하여 계속 성장한 걸안은 또다시 분열된 중국중원지대를 공격하여 946년에 화북을 통일하고 우리민족 후예국가인 남방통일국가 송(宋)과 한 때 남북조로 양립하여 중국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 또한 중국사가 한국민족사의 일부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우리 고구려민족 후예, 여진이 세운 금국(金國)의 중원중국 지배
○ 우리민족 여진족의 금나라 건립역사
고구려의 후예 후고구려(발해)가 거란에 의해 망하자 주민의 일부는 고려로 피난하고 남은 주민들 중 대체적으로 혼돈강 이서 유민들(거란이 임의로 ‘숙여진’으로 명명)은 거란에 협조적이었으나 그 외 대부분의 유민들(생여진으로 명명)은 부흥운동을 끊임없이 계속하였으며. - * 요 태조 야루아보기가 907년에 후고구려를 공격하고, 후고구려 전체 주민들을 여직(女直)으로 부르면서부터 여진이라는 이름이 탄생하였다. -
후고구려 부흥운동집단은 1040년경에 걸안이 강점한 부여를 다시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8대 조선(祖先 ; 황해도 평산지방의 김함보가 직접 만주로 건너 갔음)이 고려사람이었던 ‘아골타’는 후고구려 부흥군을 결집하여 1115년에 부여를 공격점령하고 금(金)을 세우면서 칭제(稱帝)하였으며, 그 10년 뒤 걸안을 멸망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이 고려를 대국(大國) 또는 부모지방(父母之邦)이라 하였으니 이는 두말할 여지없이 고구려의 후예로서 우리종주민족국가의 하나인 것이 명백한 것이다. (문정창의 「한국고대사.(하)」 의 318쪽).
○ 고구려후예 우리민족 금(金 ; 女眞)과 몽고의 중국지배
이러한 금이 드디어 걸안을 합방하고 바로 이어서 1127년에 중원중국을 침략하여 북송을 멸망시키고 피난정권 남송과 병립하면서 화북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234년 몽고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20여 년 간 지나중원을 지배하였다.
그 뒤를 이어 세계지배와 험께 支那를 지배한 몽고족의 주축 또한 걸안이었는데, 이 걸안은 이미 본바와 같이 곧 우리 선비족이요 선비족은 곧 우리 부여계 단군조선족이요 우리 고구려민족의 형제들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 또한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支那를 지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주장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 우리고구려 후예 여진이 다시 청국을 수립, 支那를 다스렸다.
. 명(明)의 명장으로 우리고려출신인 이성량(李成梁)은 만주지역 총감으로 만주지역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여진족(고구려 즉 발해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통제하는 가운데 ‘뜻이 있어’(필자가 보기에는 고구려부흥의 뜻) ‘누루하치’ - 후고구려(발해)부흥운동의 지도자로 명(明)에 의해 처형된 ‘아구’의 손자 - 에게 병력을 지원해 주면서 그를 여진족지도자가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루하치는 그 지역 우리민족의, 예나 지금이나 정통 토산품인 고려인삼과 모피산업을 성장동력으로 크게 발전하여 1616년에 ‘대금’(大金)을 세워 명으로부터 자립을 선언하였다. 그의 건국정신은 고구려의 ‘다물사상(대륙의 조선고토수복과 세계화사상)’을 국가안보전략사상의 기조로, 동아시아를 사해혼일(四海混一)하는 연합국가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들은 1636년에 세계화의 첫걸음으로 나라이름 여진을 버리고 청(淸)이라 개명하고 천하통일을 향해 남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우리민족 단군조선의 후예요 고구려의 후예 그리고 후고구려(발해)의 후예인 여진족은 이후 1912년 신해혁명에 이르기까지 268년간, 중국대륙에서 대청제국(大淸帝國)을 경영하였다. 이 청국(금)의 민족적 특성은 바로 그 아들 혼타이지(皇太極 즉 太宗)가 일지감치 우리고려에게 ‘민족종주권을 이양하라’고 요구(陳舜臣의 「中國五千年」의 289쪽)할 정도로 그들은 바로 우리민족의 후손들이었다.
또한 청국이 한창 흥성하던 시절, 옹정제는 “요순은 동이족(東夷族)이요 주 문왕은 서이족(西夷族)이었다. 그러기에 지나의 통치이념(전략사상)에 관한 문제는 덕(德은)에 있는 것이지 종족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우리민족 청의 지나지배 사실과 명분을 역사적으로 해명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우리민족국가 개천이래 우리천손의 宗主權은 언제나 우리민족에게 있었고 오늘날도 우리 대한민국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支那)의 역사는 우리한민족(韓民族)역사의 일부라고 거듭 말해도 결코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한국민은 우리역사에 자부심을 가져 마땅한 것이고, 나아가서 미래에 동아시아연합을 주도할 역사적 근거는 물론 이를 선도할 의무조차 주어져 있다고 보아야한다. 이를 일컬어 한국적 ‘소명대업사상'(昭命大業思想 - Manifest Destiny)이라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일본왕조는 비류백제가 만든 우리의 쌍둥이 왕조(국가)
◯ 쌍둥이 문화민족인 왜민족과 왜국의 기원
혈통과 피부색 그리고 외모가 같고, 같은 언어형식과 풍습을 생활화한 ‘우리 원주민족들’은 그들이 장기간에 걸쳐 이주해 간 그 지역의 풍토와 기후에 따라 수천 년 간의 정착생활을 통해 각각의 특이한 지역환경에 적응된 문화역사(주변지역민과 이주민들과도 혼혈하면서)를 전개해 온 결과 서력기원을 전후해서는 대체적으로 크게 세 형제종족으로 구별되게 되었다. 즉 우리 평지평원원주민족의 종주민족인 한민족(韓民族)과 우리 원주민족이 서방족을 흡수동화하여 생성된 한민족(漢民族), 그리고 우리 한(韓 )민족 다수가 동시이주(또는 정복)하여 동화(혼혈)한 우리의 쌍둥이 형제인 왜족(倭族)이 바로 그것이다.
이 왜족들은 왜국이라 불리는 소국들을 대륙의 양자강 이남과 화남지역 그리고 왜열도 일대에 건립해 있었다. 오늘날의 일본은 이 왜국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왜열도 원주민들(소수의 아이누족과 주류인 한반도 이주민)은 이제 막 그들이 말하는 죠몬시대(繩文時代 ; BC8000~300어간의 수렵과 어로생활위주의 채집생활문화시대)를 거쳐 야요이문화시대(彌生文化時代 ; BC300~AD300년), 즉 한반도와 대륙남부에서 많은 이민들이 열도로 건너가면서 이미 전통화된 벼농사와 ‘솟대문화’를 함께 가져감으로서 천지가 개벽되어 그때부터 일본은 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쌍둥이 민족 그리고 쌍둥이 국가로 더욱 다져진 것이다.
◯ 신화와 역사사실을 통한 왜민족과 왜국의 기원
이 지음 왜국의 역사발전을 두고 왜국의 기원시기라 하며, 동시에 일본전설상의 ‘천신강림’(天神降臨) 즉 우리민족역사의 맥을 이은 천손민족(天孫民族)의 전설이 이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즉 우리의 ‘하느님 환인(桓因)의 명을 받은 환웅주신강림(桓雄主神降臨)의 설화’와 같은 것으로 왜국의 신화는 두 가지의 천신강림설화로 설명되고 있다.
왜국개국신의 하나는, 하늘에서 물러난 ‘스사노오노미꼬또 신’(須佐之男命 神)이 한반도 신라의 우두산(牛頭山)에 와 있다가 (즉 신라 신) 어느 날 무리들을 거느리고 왜국(왜 열도)으로 건너가 ‘이즈모’(出雲)에 상륙, 그곳의 토종신(國神)을 물리치고 그 지방의 토종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신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대대로 보존되고 있었는데, 현재도 고구려인 ‘이리지’(伊利之)의 후손이 교토(京都)의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에 안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이 전설을 현실역사로 설명하면, 왜국의 ‘나라’(奈良)지방에 ‘나라’(國)를 세워 그들을 지배하였던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신라인들이었고, 이어서 한반도 신라를 점유한 고구려인들이 왜열도로 건너가 또 다시 그 곳을 정복하여 나라를 계속 운영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화는 ‘고천수봉강림설’(高千穗峯降臨說)이라는 얘기인데, 현재 왜왕가의 조상신 ‘니니기노미꼬또’(瓊瓊杵尊)의 전설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하늘(高天原)에서 하늘의 주신인 ‘아마떼라스오오미까미’(天照大神)로부터 삼종신기(거울, 칼, 옥)를 받아 사전에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확보하고 지상(고천수봉)으로 내려와 기존 지방소국들을 통합하여 통일왜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이 전설은 바로 우리민족 백제제국 중 비류백제(淡路百濟)가 이 왜국의 야마도조정(大和朝廷 - 규슈, 오사까 등지) 왕가의 조상이 되는 천손이 되어 물 건너와서(대룩과 한반도에서) 초기에는 그곳에 거점을 형성하였다가 몇 대를 지나면서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내륙으로 북동진하여 기내(畿內)로 진출해 간다는 설명과 일치한다.
위 해설 모두를 간단히 요약해 보면 먼저 왜민족의 기원과 왜국의 성립은 구별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왜민족은 죠몬시대의 채집생활 원주민족(바람풍자 문화권의 우리원주민에 극히 일부의 어쩌면 북극지방에서 왔을 지도 모르는 아이누 족)을 제치고, 같은 우리평지평원원주민족의 주류였던 대륙(화중, 화남)의 백제, 신라 그리고 왜족들이 직접 바다를 건너거나 또는 한반도 우리사람들이 열도에 와서 새로운 왜족을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한반도와 대륙에서 가져온 새로운 도작농법(稻作農法)과 함께 왜의 야요이시대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후로 열도는 야요이시대 사람들이 내륙으로 북동진해 가는 곳마다 죠몬시대 주민들을 제압하여 점령, 정착하면서 작은 지방국가들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그 후로 북방 기마민족인 부여의 후예 고구려가 앞서고 백제가 그 뒤 순서로 본격적으로 열도의 소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통일왕국과 왕조를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특히 백제가 4~5세기에 ‘야마도조정(쌍둥이 백제왕가)’을 성립시키게 된 사실은 이제 전혀 비밀이거나 전설이 아닌 ‘현제의 왜왕이 선포하는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즉 일본의 역사는 바로 우리의 쌍둥이 민족이 써 내려 온 한국역사의 일부인 것이다.
◯ 일본의 역사왜곡
그러나 이러한 일본이 근대에 들어와 제국주의열강국들의 번견국가(番犬國家)화하여 같은 아시아국가들을 침략하면서 특히 그들의 조상국가요 쌍둥이 형제국가인 한국을 합방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분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우리민족을 노예화하였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역사에 ‘한국과 대륙으로 진출하여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였으며, 특히 한국을 근대화시키는데 기여했다’고 주장하면서 소위 ‘역사왜곡’을 서슴치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를 들면, 일제시대 여자정신대와 소위 위안부라는 국가적 동원행위가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를 부정하고 있다. 심지어는 2007년에 미국의회에서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곡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역사연구가의 한 사람으로서도 같은 쌍등이국가라는 표현이 과하다는 비애조차 느끼기도 한다.
◎ 결론
○ 이 시대에 공산주의체제국가 중공(中共)은 고래의 ‘세계제패’나 ‘주변국절대지배사상’에서 한시 바삐 탈피하여야한다. 그리하여 동붕아역사왜곡의 선봉인 ‘동북공정’과 함께 중화·중원사상을 떨쳐버리고, 드넓은 동아시아와 세계인류사의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일본은 잘못하면 또한번 망하게 될지도 모를 침략역사왜곡을 종식하고 미래의 참다운 쌍둥이 형제국가(또는 통합연합국가)건설을 생각해야한다.
이 글은 중국사(支那史)나 일본사(倭史)가 한국사의 일부임을 굳이 강조하려는데 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르게 본 동아시아역사를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과 관계되는 중국(인)이나 특히 최근 ‘한국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왜곡하려는 중국정치인들에게, 그리고 이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들어주는 서양인들에게, 그리고 일본의 조직적인 역사왜곡에 관계되는 일본(인)들 그리고 이에 관심을 가진 한국(인)에게 공개함으로서, 역사관의 문제인 ‘중화주의나 중원중심역사관, 또는 일본제국주의나 자국우월주의(國粹主義)역사관’으로부터 일단 우리 모두를 해방시켜보려는 뜻에서 시도한 것임을 거듭 밝혀둔다.
지금 중공은 지나문화를 낳은 한국문화와 역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소위 ‘동북공정’은 물론 자국·영토중심의 [역사궐기]에 몰두해 있고, 일본 또한 한국을 한때나마 노예화한 과거를 망각하고 오히려 미화하려는 역사왜곡을 감행하고 있다. 그래서 그 동안 ‘호혜평등’과 ‘선린우호’를 세계만방에 선언해 왔던 ‘새 중국’이 현 시점에서 중화전략사상(中華戰略思想)으로 신제국주의국가로 나서지 않을까 우리 한국국민은 한결 갗이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또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과거망상에 사로잡혀 보통국가로 재무장하면서 또 다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게 되었다.
설마 지금 중공이 혹시 4세기중반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시대 불교배척운동과 함께 소위 ‘국사사건(國史事件)’이 있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홍위병에 의한 소위 ‘문화대혁명’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다시 쓰여 졌는지 그 사실 또한 모른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 또한 일제말기 군국주의자들의 말로가 어찌되었으며, 일본국체 또한 타에 의해 강제로 민주화되었다는 사실은 물론, 전후 60년이 넘어서도 미국의회와 세계가 위안부문제의 부도덕성을 지적하여 만천하에 공개했다는 사실을 모른다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이 동북공정 같은 역사조작을 비롯하여, 이즈음에 와서 새삼 [대한민국]조차도 [조선]이라고 호칭하면서 자국의 위성국가라고 공작·선전해 보려는 것이나, 일본이 국정교과서를 통해서 우리 한반도를 [조선반도]로 호칭하면서 새삼스럽게 그 죄악의 침략역사를 왜곡하려는 것은 우리 일반민간인들이 보드라도 무리라고 생각됨을 어찌하랴. 支那와 倭는 이제 진정한 미래 즉 [동아시아연합구상]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공동조상을 가진 ‘광의의 우리 민족’끼리 더 이상 갈등과 패권으로 가는 길로 나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한국당국과 역사가들은 중공의 새삼스런 동북공정과 일본의 침략적 역사왜곡 등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 원주민족으로서 그 뿌리 깊은 우리역사를 支那보다 더 많이 중공과 세계에 알려야 한다.
사실상 지금도 진행 중인 중공의 ‘고구려역사왜곡작업’이나 새삼스러운 ‘지나 위성국공작’은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그리고 수치스런 중국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될 것이다. 보통 상식수준에서 보드라도 이 세계에 이미 발간된 역사책이 수백만 권도 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내용들을 모두 지우고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도 세기를 뛰어넘는 착각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독도를 거론할 때마다 왜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 이유는 장차 어느 때를 위해 유리한 역사적 근거를 남기려는 것이고 동시에 양국민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정부당국과 학계는 중공의 이러한 한반도 위성국화와 동북공정, 그리고 일본의 끈질긴 역사왜곡에 대해 지속적인 외교적 반응과 동시에 우리역사에 대한 국민교육을 강화하는 등의 현실적 대응조치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기회에 강단계와 비강단계(재야역사계) 모두 머리를 마주하여 새로운 역사관으로 자랑스런 우리역사통사(通史)를 재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왜는 ‘만세일계의 역사관’을 가지고, 지나는 ‘중화사상’을 가지고 각각 자국우월역사를 기록하여 이를 자랑하며 자국민의 긍지로 삼고 있다. 우리는 강단학계의 ‘실증사학론’(實證史學論) 고집(?)으로 ‘삼국사기’이상의 천손민족국가역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기에 왜국역사책에 의해 해마다 자존심에 홍역을 치르고, 최근에는 지나에서 조차 ‘변방국이네, 또는 ‘신종(臣從)관계국이네’ 하는 모욕도 듣게 되었다.
그러기에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제는 강단학계와 비강단학계가 합심하여 우리의 ’일 만년 천손국가의 역사‘를 바르게 펴내야만 지금 중공의 ’동북공정‘에 완벽하게 ’폴승‘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앞으로 동아시아 종주국민족다운 우리한국민족의 긍지로 동아시아연합운동을 전개할 수 있고 그래서 영구적인 동아시아평화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당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우리국사를 세계에 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홍보해야한다. 특히 전 세계 대학 도서관과 국회도서관(물론 일반도서관에도)에는 번역된 한국사서지가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해 왜와 지나의 사서는 풍족하게 나열되어 있어 관심 있는 사람들은 저절로 중국과 일본역사에 편중되게 마련이다. 바라건대 특히 미국-지나-왜의 국공립도서관과 대학도서관 등에 한시바삐 한국사서지 들이 최소한 키 높이에 길이 10미터의 서가 하나이상 차지할 정도의 자료는 제공되어야한다. 이 사업이야말로 중공의 ‘동북공정’에 대한 진정하고도 효과적인 대응책이 되는 것은 물론 결과적으로는 한국학의 자연스런 붐을 기대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 공동조상을 가진 지나·왜·한국민족은 오늘의 정치환경을 뛰어넘어 ‘동아시아 우리민족연합’을 결성하여 역내 무궁한 평화번영은 물론 세계인류평화번영에 기여해야 한다.
때는 바야흐로 21세기가 아닌가. 제국주의도 가고 공산주의도 가고 자주자유민주주의 세상이 된 이 시기에 너나없이 이제는 모두 국경을 초월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가 된 것 아닌가. 이제 우리 동아시아 3국은 더 이상 중화사상이나 제국주의적 패권을 추구하지 말고 역사적인 공동조상의 민족적 동질ㅁ성을 회복하여 공동체로 연합함으로서 지역집단안전보장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먼저 확보하고 그리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면서 우리 공동체 주민의 최대행복을 추구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 끝 -
한국국가안보전략사상사연구회 대표 문영일.
(2008년 6월)-2017년 4월.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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