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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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 왜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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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任亂 최후의 勝戰와 맞바꾼 名將의 죽음
作戰 내용을 사전 공개한 敵將 고니시는 연구가 더욱 필요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심복 요시라를 다시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 가토를 놓친 것을 애석해 하면서 일본군이 8월에 전라도로 침범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가토 기요마사 軍은 慶州로부터 밀양 혹은 대구를 통해 전라도로 진군하고 나의 부대는 의령,진주를 통과한다.
따라서 進路에 해당되는 지역의 노인과 아이들을 북쪽으로 피란시키고, 장정들을 뽑아 山城에 올라가
응전하는 것이 좋다. 또 경상우도로부터 전라도에 이르는 지방의 들을 쓸고 벼는 일찌감치 베어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일본군은 약탈이 불가능, 군량이 떨어지고 만다. 전라도를 점령하기도 전에 회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싸우는 상대에게 작전의 내용까지 사전에 귀띔하는 장수는 戰史에 유례가 드믄 일이다.
그렇다면 고니시는 왜 그런 통보를 했던 것일까.
히데요시는 再침공을 앞두고 勇戰의 증거물로서 「敵」의 코를 잘라 올 것을 왜장들에게 명했다.
당연히 저항력이 부족한 여자나 아이들이 희생될 것이 뻔했다.
천주교도였던 고니시는 이것을 예견, 나름대로 고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선 측이 고니시의 「통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흔적은 없다.
백성의 피난과 청야(淸野)전은 민심 불안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순신의 「亂中雜錄」에 의하면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은 7월 公山山城(大丘府: 大邱市),
黃石산성(安陰縣: 咸陽郡)·岳堅산성(三嘉縣: 陜川郡)·鼎蓋산성(하동현: 하동군)을 방어하는 것에 합의했지만,
악견산성과 정개산성에는 병을 주둔시키지 않았다. 즉, 전라도 방어를 위한 대책은 강구되지 않았던 것이다.
1597년 8월 초, 왜군은 수확기를 선택, 행동을 일으켰다.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이끄는 右軍 6만4000명은 양산에 집결해 밀양-거창을 거쳐 전주로 향발했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지휘하는 左軍 4만9000명은 사천에 집결, 河東으로 진격했다.
8월10일, 일본의 수군 7000명은 섬진강 하류 河東에 상륙, 고니시 부대에 합류해 북상하여
전라도 공략을 개시했다.
일본의 左軍은 8월18일 南原을 함락시키고 8월19일 全州에 입성하여 右軍과 합류했다.
그러나 경기도 남부까지 진출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대가 稷山전투에서 明軍에게 패전하고,
9월16일에는 鳴梁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에 패전함으로써 일본 수군의 西海 진출이 저지되었다.
西海 진출에 실패함으로써 일본군은 이번에도 兵站線을 구축할 수 없었다.
겨울철에 들어서자 朝明 연합군의 압력이 차츰 강화되었다.
일본군은 남해안지대로 퇴각, 왜성(倭城)을 축조하거나 보강하여 농성했다.
이후 일본군은 守勢를 면치 못했다.
1598년 8월18일 침략의 원흉 히데요시가 교토의 후시미(伏見)城에서 병사(病死)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완전한 실패가 명백해졌다.
히데요시의 죽음이 감춰진 채 전선에는 철퇴를 촉구하는 지령이 전해졌다.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五大老는 공동으로 왜장들에게 히데요시의 죽음을 통보하면서 부산포에 집결하여
철퇴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순천 왜교성(倭橋城)에 농성 중이던 고니시는 바다를 봉쇄한 李舜臣에 의해 퇴로가 막혔다.
그는 사천 倭城에서 明의 西路軍을 대패시킨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昌善島에 주둔해 있던
소오 요시토시 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500척의 함대를 몰고 고니시 구원에 나선 시마즈와 소오 요시토시를 李舜臣과 진린(陳璘: 明의 水路軍 대장)의
연합함대가 河東과 南海 사이의 해협에서 요격했다.
11월19일에 전개된 이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李舜臣-陳璘의 연합함대는 왜선 200척을 격파했지만,
李舜臣은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名將의 생명과 7년전쟁 최후의 승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海戰이 진행되던 가운데 고니시는 順天 왜교성에서 탈출했다. 왜군의 최후부대가 11월25일 부산포로부터
일본으로 철수함으로써 名分 없는 7년전쟁이 끝났다.<계속>
*사진:교토 東山 方廣寺 앞에 세워져 있는「耳塚」(귀무덤)
사실은 왜란 때 倭軍이 베어 간 조선 軍民의 코를 묻은「코무덤」이다.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는 임진왜란 이후 倭에 대한 포비아(공포심)가 짙게 배어 있는 것 같다.
히데요시의 전쟁지도(戰爭指導)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악랄했기 때문이다.
그는 戰果를 확인하기 위해 조선군의 전사체에서 코를 베어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왜병들은 조선군 전사자 뿐만 아니라 非전투원,즉 여성,아이들의 코까지 소금에 절여 가마니떼기로
본국으로 보냈다.
그 증거물이 지금도 교토(京都) 東山 方廣寺에 남아 있는 「미미츠카(耳塚)」라고 불리는 귀무덤이다.
코를 묻었다면 당연히 「하나츠카(코무덤)」가 되어야 할 터인데, 왜 「귀무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
先祖들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가 「用語의 장난」으로 다소간이나 완화될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5. 任亂 주역들의 최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엇갈린 倭將들의 운명
7년전쟁에 참전했던 왜장들의 운명은 終戰 2년 후인 1600년 7월1일의 세키가하라 전투에 의해 격렬하게 엇갈렸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西軍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받드는 東軍이 격돌한
일본판 「天下 판갈이 싸움」이었다.
李舜臣에게 잡힐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귀국했던 고니시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주도한 西軍에 가담하여 패전한 후
도주,은신하다가 붙잡혀 이시다와 함께 참수되었다.
西軍의 副사령관 역할을 했던 우키타 히데이에(임란 당시 총사령관)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50여 년간 외딴섬에서
한 많은 귀양살이를 했다.
시마즈 요시히로,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西軍에 가담한 괘씸죄에 걸려 영지의 삭감처분 등을 받았다.
해적 출신 구키 요시다카는 西軍에 가담했지만 東軍에 가담하여 전공을 세운 아들(九鬼守隆)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러나 求命 허락의 소식이 당도하기 직전에 그는 스스로 배를 갈라 자살했다.
고니시의 정적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시동(侍童) 출신임에도 東軍에 붙어 다이묘(大名)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代에 이르러 영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도 정예군을 이끌고 東軍에 가담하여 다이묘의 지위를 지켰다.
히데요시의 처조카로서 정유재란 때 16세의 나이로 원정군 총대장이 되었던 고바야가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는
세키가하라 전투현장에서 배신하여 東軍으로 넘어가 西軍 패전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치른 지 2년 후 21세의 나이로 早死했는데, 사인은 정유재란 당시에 감염된 매독으로
전해진다.
구키를 제외한 水軍將들은 모두 東軍에 가담했다. 도도 다카도라는 히데요시 死後에 가장 먼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정보를 흘려 「아첨의 名人」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石高 30만 석의
다이묘가 되어 75세의 장수를 누렸다.
가토 요시아키도 이에야스에게 붙어 石高 4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3만2000석의 다이묘로서 東軍에 붙었다.
1603년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막부(幕府)를 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는 일개 다이묘의 지위로 격하되었다.
1615년 이에야스는 공연한 트집을 잡아 히데요리의 居城 오사카城을 공격, 함락시켰다.
오사카城이 불타는 가운데 히데요리와 그의 生母 요도기미(淀君: 히데요시의 愛妾)는 동반 자살했다.
이로써 도요토미家는 완전히 멸망했다.
-壬亂 참전 후 귀국한 明將들의 不運
壬亂 때 조선을 도운 明의 관료와 장수들도 대체로 불운했다.
원병 파견을 주도했던 병부상서 石星, 요동경략 宋應昌은 전쟁지도상의 실책 등을 이유로 투옥되었는데,
石星은 옥사했다.
李如松은 1597년 요동총병관으로서 토번(土蕃:티베트)과 싸우다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협상상대였던 심유경은 황제를 속이고 강화를 추진했다는 죄로 탄핵을 당한 가운데
日本 망명을 기도하다가 경상도 의령에서 붙들려 본국에 끌려가 참수당했다.
대장이었던 楊鎬는 1618년 後金 토벌을 위한 明의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西路軍 대장이었던 劉綎(유정)도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르후 전투에는 1만2000명의 조선군도 참여했으나 光海 임금의 밀명을 받은 도원수 姜弘立이 전세가 불리하자
後金에 항복했다.
이때 부원수로 참전했다가 도원수 姜弘立과 함께 포로가 된 金應河는 敵情을 기록한 밀서를 본국에 보내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부원수 金應河가 바로 정유재란 발발 당시의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이다.
김응서는 고니시의 술책에 넘어가 허위첩보를 宣祖에게 전달한 장본인이다.
결국 7년전쟁은 중국대륙에서 明이 멸망하고 淸이 흥기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누르하치(후일의 淸 太祖)는 宣祖 조정에 원군 파병을 제의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조선 조정은 누르하치의 제의를 거부했다).
히데요시의 과대망상은 결국 만주족(淸)의 대두를 허용하고 말았다.
유성룡은 「懲毖錄」에서 『倭는 兵法을 모른다』고 지적했다.
"왜군은 천리에 걸쳐 진영을 벌여 놓고 오랫동안 날짜를 끌었다. 아무리 굳센 화살도 멀리 날다가 보면 끝에 가서
비단 헝겊도 뚫지 못한다."
* 연재를 끝마치면서...
임진왜란이 승리의 전쟁인 것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역사상 전대미문의 참화를 안겨준 外侵이었다.
간단한 통계 하나만 보더라도 이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즉, 任亂前 조선의 인구는 1200만(어떤 기록에는 1500만)이라고 하는데 임란후에는 인구가 700만으로
격감하였다고 한다.
왜군과의 전투에서, 그리고 기아와 질병(전염병)으로 500만명 이상의 인구가 소멸 되었다고 하니,
이 숫자는 당시 조선의 어느 가정에서나 가족손실이 2명 이상이나 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그 참상과
지극한 슬픔을 어디에다 비할 수 있으랴..
기록에 의하면, 전란이 끝나후 거리를 헤메고 다니는 미친사람이 그렇게 많았다고 하니 살아남은 가족들의
슬픔과 恨이 스스로 미치게 하지않고 무엇으로 달랠수 있었으랴..
또한 무엇보다도 임란당시 까지 오랜 세월동안 보존되어 왔던 귀중한 문화재, 그 중에서도 우리의
고대사 부분의 역사기록이나 문서가 대부분 소실 또는 유실되어 버렸다고 하니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이며,
이로인해 오늘날 까지 우리의 고대사를 신화의 경지에서 헤메이게 하고 있고, 타국의 우리역사 왜곡에 대해
당당하게 맞설수 있는 근거 또한 빈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해 마지않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들로 하여금 분노를 금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이러한 민족사의 크나큰 비극을 당하고도 역사로 부터
교훈을 찾지 못하고 이후 40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집안싸움만 하면서 허송세월하고 말았으니 이러고도 어찌
나라를 송두리채 빼앗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任亂 당시의 어리석은 군주와 조정의 당파싸움을 탓하고 이로 인해 外侵을 自招한 것처럼 누구나 쉽게
이야기 하지만, 당시와 오늘날의 사정이 무엇이 다르랴?
위정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의 安危보다는 黨利黨略을 위한 싸움에 寧日이 없고, 우리 주변의 외부세력은
날로 강성해져 가니 "이러다가..." 하는 서늘한 생각이 어찌 나 만의 느낌이며 걱정이리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진리를 외면하고 언제까지 우리 스스로 반목하고, 갈등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것인지..
"역사는 비켜가지 않으며 요행이 없다" 라는 진리를 그 많은 外侵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이 민족의 진로가 순탄하기를 바랄 수 있을것이며.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또 다시,
어떤 비극과 수모를 안겨줄 것인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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