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3:44
◆ 임진 왜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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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의 계산과 화평교섭 기도

漢城 점령 후 왜군은 1주일쯤 여기에 머물렀다.
보급과 병사의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다시 화평 교섭을 추진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생각대로 무력정복을 꿈꾼 가토는 고니시의 교섭에 불만이었다.
고니시의 태도는 확실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늪 속에 빠지는 것은 왜군 측이고,조선의 참화를 깊고 넓게 하는 것은 화평에 의한
무역의 再開를 어렵게 만들 것으로 우려했던 것이다.
상인 출신답게 계산이 빠른 그에게는 화평 교섭을 벌이는 것 이외엔 최선책이 없다고 느낀 것 같다.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오도 마찬가지였다.

5월13일, 고니시의 지시를 받은 승려 텐케이(天荊)와 소오의 家臣 야나기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는
임진강 對岸의 조선 군진에 가서 화평 교섭을 요구하는 서간을 건넸다.
그런데 가토는 그 다음날 교섭을 무시하고 전단을 열었다.
고니시의 기도는 좌절하고, 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위장 화평교섭」으로 되고 말았다.
왜군은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 북상하여 開城을 점령했다.
여기서 왜군은 두 갈래로 나눠져 가토·나베지마의 제2軍은 東進하여 동해안으로 나와 함경도로 북상했다.
고니시의 제1군은 그대로 북상하여 6월7일 대동강변까지 진출했다.
고니시는 여기서 부대를 머물게 하고 또 교섭을 벌이려고 했다.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당시 유성룡(柳成龍)은 평양에 있으면서 고니시 軍의 병사 하나가
대동강의 東岸에 나무를 세워 글을 걸어놓고 가는 모습을 연광정(練光亭)에서 목격하고 있다.
그것을 수거해 본즉 예조판서 이덕형에게 보낸 고니시, 야나기가와 시게노부, 겐소의 서신으로서
화평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화평교섭과 의병의 활약

「宣祖實錄」에 의하면 이덕형은 야나기가와, 겐소와 대동강 위에 띄워 놓은 배 위에서 회담했다.
겐소가 말했다. "일본은 귀국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동래·상주·용인에서 서계(書契)를 보냈는데도
귀국에서 답하지 않고 兵을 갖고 상접(相接)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요동(遼東)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지 않겠는가?"
李德馨의 입장에서 보면 겐소 등은 이미 세 번 이상 약속을 깬 장본인이었다.
즉, 1589년 가짜 「일본국 王使」로 조선에 들어왔을 때는 『통신사를 파견해 주면 좋겠다』고 속이고,
지난 4월28일에는 충주에서 회담을 하자고 해놓고 그전에 북상을 개시했고, 임진강에서는 사흘을
기다리겠다고 통보한 후 그 다음날 공격을 걸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 측이 말하는 「교섭」이라는 것은 북상 태세를 정비하기 위한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李德馨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귀국이 中原을 범하려고 한다면 왜 절강(浙江)으로 가지 않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는가"

이것으로 회담은 끝났다. 교섭의 계기를 잡으려 했던 고니시의 희망은 단지 희망사항으로 그치고 만 것이다.
고니시는 공세를 펼쳐 평양성을 점령했다.
그때 그는 조선군이 후퇴하면서 미처 소각하지 못하고 유기한 양곡 10만 석을 노획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시 고니시는 이덕형의 당당한 태도 때문에 판단 착오를 일으킨 것 같다.
이때까지의 교전상대는 조선의 지방 잡병이고, 조선 중앙군 主力은 패전하고 있지만 再정비를 통해 반격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고니시는 서전에서 승전했지만, 그 심리상태는 오히려 초조했다.
고니시가 만약 평양에서 앞뒤를 재지 않고 북진을 계속했다면 조선왕조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宣祖는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明國)에 귀부(歸附)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니시 軍이 평양성에 머물고 있는 사이 전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왜군에 점령당한 지방에서 백성들의 저항이 전개된 것이다.
먼저 선비와 하급관리,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승려들도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義兵으로 불리면서 처음에는 게릴라전을 벌였지만, 점차 조직적인 반격에 나섰다.
경상도에서는 상주(尙州) 패전이 전해지면서 곽재우(郭再祐)가 10여 명의 동료와 함께 궐기,
순식간에 1000여 인의 勢를 이뤄 의령·합천을 해방시켰다.
곽재우에 이어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이 각지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했고,9월에 들면
박진(朴晉)이 이끄는 의병이 慶州를 탈환했다.
그리고 10월에는 牧使 김시민(金時敏) 등의 분전으로 晉州城의 수성전(守城戰)에승리했다.
진주성 대첩으로 왜군의 전라도 공략작전이 좌절되고 말았다.
전라도,충청도,경기도 에서도 의병들이 일어나 각지에서 왜군의 행동을 제한하고, 병참선을 차단했다.
평안도에서도 1000명의 승병부대가 활약했고, 함경도 의병은 경성(鏡城)을 탈환했다.
가을바람이 불자 왜군은 守勢에 몰리기 시작했다.

-海戰의 定石에 충실했던 제독

경상좌수군, 우수군은 개전 초기에 일전도 교환하지 않고 와해되었지만, 李舜臣이 이끄는
전라좌수군은 건재했다. 그는 휘하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수역에 출동, 옥포(玉浦), 적진포(赤珍浦)에서
왜선 41척을 침몰시켰다(1차 출동).
이어 사천(泗川), 당항포(唐項浦)의 해전에서 왜선 60여 척을 불태웠다(제2차 출동).
남해의 연안 해역은 조류의 干滿이 격렬하고, 多島海의 특성상 해류가 복잡하다.
李舜臣은 조류 이용 등 南海의 지리적 조건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李舜臣은 천재적인 제독으로 회자되지만, 사실 水軍 지휘관으로서는 경험이 별로 없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壯年에 해당하는 32세 때(1576년) 무과에 급제한 늦깎이 장교였다.
곧 북변 女眞族 방비를 위한 武官으로 명을 받아 2년간 복무 후 서울로 돌아왔다.
1586년 다시 북변 함경도에 파견되었지만, 그의 결벽성이 상관의 미움을 사 女眞族 방위 실패의 죄를 뒤집어쓰고
병졸로 강등되는 「白衣從軍」의 처분을 받았다.
白衣從軍에서 풀린 그는 충청병사의 군관을 거쳐 1580년 처음으로 수군 지휘관인 발포만호가 되었다.
발포만호도 재직 1년8개월 만인 1582년 1월 꼿꼿한 직무태도 때문에 상관의 미움을 받아 파직을 당했다.
그후 복직하여 미관말직을 전전하던 그가 정읍현감에 제수된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기도하고 있던
1589년 12월이었다.

1년3개월 후인 1591년 2월, 진도 군수의 사령을 받고 막 부임하려고 하던 무렵,이번에는 일약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다.
당시 좌의정 柳成龍의 적극 천거도 있었지만, 그만큼 전운(戰運)이 급박하여 조정에서 장수감을
물색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는 남해안의 조류에 해박한 부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면서 함대기동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海戰에 관한 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해전의 「定石」에 충실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가 결전에 구사했던 학익진(鶴翼陣)만 하더라도 그가 창안한 전술이 아니라 함대의 화력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陣法인 것이다.
거북선도 이순신 휘하의 나대용(羅大用)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太宗 때 이미 건조한 바 있었던 돌격선이다.
왜군이 장기로 삼는 등선육박전(登船肉薄戰)에 대처하기 위해 판옥선(板屋船)의 갑판을 철갑으로 방호한
선종(船種)인 것이다.

閑山島 해전에서 대패한 사실을 보고받은 히데요시는 대경실색(大驚失色)했다.
그는 閑山島 해전 직후인 7월14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수군장 들에게 앞으로 경솔하게 해전을 도전하지 말고,
거제도, 가덕도와 낙동강 하구 일대에 축성(築城)할 것을 엄명했다.
이것은 일본 수군에게는 매우 적절한 조치였다.
거제도 등지의 海口를 막아놓으면 조선 수군으로선 부산포로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
낙동강 하구와 이어지는 海路에는 높은 파도에 의해 물마루가 형성되어 이곳을 통과하려면 노를 젓는 水夫들의
노동강도에 따른 피로 때문에 막상 海戰이 벌어지면 전선의 기동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후일의 얘기지만 원균이 지휘했던 함대가 대패했던 까닭도 무모한 부산포 진격작전 때문이었다.
이것은 일본 수군에 있어 전략의 大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해와 황해의 제해권 장악 기도를 포기하고, 어떻게든 쓰시마-부산 보급로의 확보에만
全力을 기울이겠다는 뜻이다.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倭兵

히데요시의 죽마고우인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 세 봉행(奉行: 히데요시 정권의 장관)과
더불어 4군감(軍監)의 하나가 되어 대본영인 나고야를 출항, 6월6일 부산포에 상륙했다.
마에노는 부하 2000명을 데리고 7월16일에는 漢城에 도착, 왜군의 전선사령부에 복무하게 된다.
그는 부임 직후인 7월 중순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는다.
『남해 일대의 포구에 해적선이 출몰하여 그 위력을 떨쳐 와키자카, 구키의 水軍이 한 번 싸운 바 대패해서
대선 150여 척을 대파당했다』(「武功夜話」 중에서)
위에서 「해적선」은 조선수군이다. 마에노는 또 「武功夜話」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먼저 파견한 병양선(兵糧船) 다수가 해적선에게 不意의 공격을 받고 대파되어 海中에 침몰했고,
양륙된 兵糧도 바닥을 보였다.

入京한 諸將들이 모여 협의, 이번에 殿下(히데요시)의 도해(渡海: 히데요시는 督戰을 위해
조선에 건너올 예정이었음)를 내년 봄까지 연기해야 하는 사정을 전달했다.
드디어 10월이 되면서 부산포와 漢城을 연결하는 병참선의 확보가 어려워졌다.
이에 왜군은 부산포와 漢城 사이에 22개 거점을 설치, 병력 4만~5만을 배치했지만, 부산포에 양륙된 병량은
제1선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開戰한 지 6개월, 병참선이 단절된 왜군은 병량 부족에 허덕였다. 이에 더하여 한파가 몰아쳤다.
「武功夜話」에 의하면 왜군은 동상(凍傷)으로 手足의 자유를 잃었고, 凍死者와 도망자가 끊이지 않았다.
군의(軍議)를 열어 대책을 협의해도 異見이 구구하여 결론을 얻지 못했다.
漢城의 전선사령부에서조차 이런 상황이었던 만큼 일선부대의 형편은 더욱 비참했다.
더욱이 왜군은 夏服에다 짚신(草履) 차림이었다.

1593년 1월7일, 李如松이 이끄는 明軍 4만, 조선군 1만이 평양성에 쇄도,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전투는 곧 끝났다.
병참선의 단절로 戰力을 유지할 수 없었던 고니시 軍이 야음을 틈타 평양성을 탈출했던 것이다.
고니시 軍은 140리 남쪽의 鳳山에 도착했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던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 부대는
먼저 도주해 버린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어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주둔해 있던 백천(白川)으로 다시 南下했다.
당시 고니시를 따라 종군했던 선교사 프로이스는 로마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크리스천 영주인 태수(黑田長政)가 주둔하고 있는 성새(城塞)에 도착하기까지 다시 사흘간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계속 걸어야 했다. 더욱이 고니시 부대는 군량을 1일분밖에 준비하지 않았다.
그 사이 극심한 기아에 허덕였는데, 주위 일대에는 눈이 덮여 먹을 풀도 발견할 수 없어 눈을 삼켜 겨우 연명했다.
(中略) 조선인 및 중국인이 신고 있는 두꺼운 가죽신의 사용도 알지 못해 추위와 물기에 약한 짚신을 신었던 탓에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많은 병사는 엄지발가락이 동상에 걸려 떨어져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