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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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 왜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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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병참상황
왜군 제1군(1만8000명)의 기동거리는 水陸 2000여 리에 달하고 있었다. 나고야로부터 부산까지 海路 약 150km,
부산에서 서울까지 陸路 약 400km, 서울에서 평양까지 陸路 약 300km였다.
가토 軍은 두만강변의 회령까지 진격해 있었다. 문제는 兵站이었다.
병사 1명에 대한 하루 보급량을 1kg으로 잡으면 15만 병력에게는 150t의 물자가 필요하다.
30일간의 원정이라면 보급해야 할 물자는 4500t. 원정기간이 1년이라면 보급량은 5만4000t에 달한다.
임란 당시 왜군의 수송능력이나 해상·육상에 걸친 輸送路 사정으로 보아 감당하기 어려운 수량이었다.
굶기지 않고 먹이기만 하는 보급이라 할지라도 병사 1명에 하루 500g이 소요된다.
문제가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1만의 군사를 먹이기만 하려 해도 하루 5t의 식량이 필요하다.
500kg을 적재하는 수레 10대분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10일 걸린다면 100대분이다.
도로 사정이 나빠 20일을 요한다면 200대분이다.
왜군의 병참에 있어 불리했던 것은 부산포 이후의 열악한 도로 사정이었다.
당시 부산포에서 漢城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제4대로)의 폭은 8자(2.5m)에 불과했다.
도로 사정을 나쁘게 해놓은 것은 조선왕조의 「소극적 국방대책」 중 하나였다.
외침을 받아 퇴각할 경우 들판을 불질러 곡식 한 톨 남겨 놓지 않는 청야(淸野)작전도 고구려 이래
韓民族 국가의 전통적인 방어 전략이었다.
수송을 담당하는 사람과 말도 길바닥에서 식량을 소비한다.
그 보급로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부대도 있다. 거기에도 물자를 떨구고 가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보급대는 적어도 마차 100~ 120대 정도로 편성된다. 그것으로 제1선 부대 1만 명은 겨우
10일 정도를 버틴다.
牛車를 사용하는 경우 적재력은 크게 늘어나지만, 戰線에 도착하기까지 馬車보다 훨씬 많은 날짜가 소요된다.
어떻든 수송대를 1개월에 3회 가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15만 대군의 장기 원정은 병참상으로 至難한 일이다.
만약 왜군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곡창지대를 일거에 점령할 수 있었다면 왜군의 병참은 성공했을지 모른다.
거기서 수확한 곡물로 왜병을 먹일 수 있었을 터이다.
-先鋒將 고니시의 계산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의 대표적 武將은 누가 뭐래도 고니시 유키나가(?~1600)이다.
그의 多重人格을 이해하지 않는 한 임진왜란의 진상을 조감하기 어렵다.
그는 지금 오사카의 항만지역인 사카이(堺)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니시 류사(小西隆佐)는 조선 인삼과 꿀, 명나라(明國)으로부터 들어오는 화장품의
원료(납제의 白粉)을 취급한 호상(豪商)이었다.
중계무역으로 번영한 사카이港에는 규슈의 하카타(博多)의 해상(海商)들이 출입하는 등에 의해
거만(巨萬)의 富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고니시는 家業인 무역에 종사하여 계획성과 실행력, 그리고 국제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것을 주목한 것이 히데요시였다. 히데요시는 1587년 사쓰마(규슈 南端의 가고시마)의 번주(藩主)
시마즈(島津)를 항복시킨 직후 쓰시마의 도주(島主) 소오(宗)에 대해 조선 국왕의 入朝를 교섭하도록
엄명하고 고니시에게 이를 감독토록 했다.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명령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출병을 하여 조선을 피폐시키면 對조선 무역에 파탄을 일으키고 사카이의 번영도 쇠퇴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히데요시의 망상을 깰 만한 힘은 없었다.
쓰시마 島主 소오 요시시게(宗義調)는 더욱 심각했다.
조선 국왕으로부터 벼슬을 받고 對조선 무역으로 살아온 宗氏였다.
入朝를 요구하는 사자使者)를 조선에 보낼 처지도 아니었고, 조선 국왕이 入朝할 리도 만무했다.
조선을 침략하게 되면 전진기지가 될 쓰시마가 황폐화할 것 또한 뻔했다.
히데요시에게 엄명을 받은 요시시게는 고민 끝에 병사(病死)했다.
뒤를 이은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다.
고니시는 그의 딸 「마리아」를 요시토시에게 결혼시키고, 宗氏의 가신들과 머리를 짜낸 결과 조선 국왕과
히데요시의 쌍방을 모두 속이는 묘책(妙策)을 추진하기로 작심했다.
즉, 히데요시가 日本열도를 통일했다고 통고하는 「일본국 王使」를 조선에 보내고, 답례의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도록 요청한다는 방식이었다.
1589년 6월, 고니시와 친밀한 겐소(玄蘇)를 正使, 소오 요시토시를 副使로 한 「일본국 王使」가 바다를 건너
서울로 들어와 필사(必死)의 교섭을 벌인 끝에 통신사를 부르는 데에는 일단 성공했다.
황윤길을 正使, 김성일을 副使로 한 통신사는 1590년 11월 교토(京都) 소재 쥬라쿠다이(聚樂第: 히데요시의 私邸)
에서 히데요시를 만났다.
조선 국왕의 國書는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하면서 「講信修睦(강신수목)으로 隣好(인호)를 두텁게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答禮의 國書로서 당연한 문구였다.
-히데요시의 自尊妄大
고니시 및 소오가 漢文을 잘 모르는 히데요시를 어떻게 임란(任亂) 초기 일본측 과의 협상에 나섰던
이덕형(李德馨)을 기만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이 파견한 「入朝」의 사신을
받아들인 것으로 오해했다.
自尊妄大한 히데요시는 더 나아가 조선통신사에게 「征明嚮導(정명향도)」, 즉 明國으로 진격할 왜군의
길 안내를 요구했다.
당시 일본의 武將들 사이에서는 조선 침략에 회의적인 목소리가 높았다.
히데요시의 심복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히데요시의 동생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히데나가(秀長)도 內心 반대였다.
히데요시 다음의 실력자들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도 비판적이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심리상태가 非정상적인 국제적 트러블 메이커였다.
高山國(대만)과 呂宋(필리핀)의 스페인 총독 등에도 외교문서를 보내 「태양의 아들」을 자처하면서 복속을
강요했다.
포르투갈領(고아) 印度 총독에게 보낸 외교문서에서도 일본 전토를 통일했다고 잔뜩 제 자랑을 한 후 복종을
요구했다.
고니시는 다시 한 번 「재주」를 넘었다.
히데요시가 말한 征明嚮導(정명향도)를 假道入明(가도입명)으로 바꿔치기 해서 통신사에게 전했다.
즉, 「明國에 朝貢(조공)하러 가는 길을 조선으로부터 빌리고 싶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통신사 일행이 그런 사기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성격이 대쪽 같은 副使 김성일은 겐소와 소오에 대해 『이웃 나라를 속이지 않는 것이 信…,利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 義』라고 힐난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고니시는 조선의 사정에 밝다는 이유로 침략군 제1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그는 확전을 피하기 위해 조기 종전(終戰)에 매달리게 된다.
동래성 함락 때 생포된 울산군수 이언성에게 書狀을 지참시켜 서울로 올려보냈던 것이다.
곧이어 상주전투에서 생포된 日本語 通事인 경응순에게 書狀을 주어 上京시켰다.
이 書狀은 이덕형과 충주에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덕형은 겐소 등이 「일본국 王使」로서 조선 조정에 왔을 때 선위사(宣慰使)로서 서로 안면을 텄던 만큼
교섭에 도움을 될 인물로 판단된 듯하다.
이덕형은 경응순을 데리고 충주로 남하했지만, 충청도 竹山 땅에 이르렀을 때 충주의 패보(敗報)를 들었다.
이에 이덕형은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 경응순을 先行시켰는데,경응순은 北上하던 가토 軍에게 붙들려 살해되었다.
경응순이 협상에 반대한 가토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忠州회담은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조선 조정의 대응을 전혀 알지 못했던 고니시는 안달했다.
5월1일 아침부터 장대비가 내렸지만, 그는 선두에서 말을 달렸다.
그로 인해 한때 후속부대와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후속부대가 그를 따라잡은 것은 5월2일. 왜군의 제1군은 楊根을 거쳐 龍津渡를 도하, 5월3일 오후 8시
東大門을 통해 漢城에 돌입했던 것이다.
고니시가 본 漢城은 죽음의 거리로 변해 있었다. 국왕, 조선군, 백성들도 모두 도주해 버렸던 것이다.
漢城을 점령한 후에 히데요시가 발표한 구상은 氣高萬丈, 그것이었다.
明을 정복하여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을 北京으로 옮기고, 일본의 천황은 요시히토(良仁) 친왕(親王)
이나 토모히토(智仁) 친왕, 중국의 관백(關白)에는 도요토미 히데츠쿠(豊臣秀次), 일본의 관백에는
하시바 히데노부(羽柴秀信)나 우키타 히데이에, 조선의 지배는 하시바 히데노부(羽柴秀信) 또는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 그 자신은 중국의 영파(寧波)에 居所를 두어 印度까지 아우르는 大아시아 제국의
최고실력자로 군림하겠다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히데요시, 그는 「日本 神國사상」의 원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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