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3:40
◆ 임진 왜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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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水軍과 조선 水軍의 근원 비교

우선 왜선의 구조가 취약했다. 예컨대 규모가 크고 견고하게 건조되었다는 아타케船(길이 약 33m, 폭 12m)조차
용골 (龍骨)을 쓰지 않은 구조였기 때문에 포격을 받으면 쉽게 붕괴되고 말았다.
또한 일본 군선은 그 이음새 부분을 凹凸로 만들어 끼우고 「ㄷ」형 꺾쇠로 양쪽을 이은 사춤넣기(Dove-tail Join)
공법으로 제조돼 우리 판옥선과 부딪치기만 하면 깨져 버렸다.

반면 조선의 수군은 太宗 때부터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되었다.
주력선인 판옥선은 밑면이 평탄한 평저선(平底船)으로 첨저선(尖底船)에 비해 물속에 잠기는 흘수(吃水)가
깊지 않고 선회 반경이 작아 배의 운동이 자유로우며 일본의 아타케나 세키부네에 비해 선체가 높아
왜구 이래 일본 수군의 자랑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어렵게 했다.
또한 외판(外板)의 겹이음 구조와 나무못(木釘)을 이용한 결과, 강도에서 일본 군선을 압도했다.
왜군이 보유한 조총의 명중률이 높았다고 하지만 물결 때문에 흔들리는 해상에서는 조준사격이 어렵고,
유효사거리도 50m 정도여서 조선군의 화포에 비해 위력과 사정거리에서 열세였다.
조선은 1555년 정유왜변(乙卯倭變) 이후 1563년(明宗 18 년)까지 화포 제작에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여
10만 근 이상의 동철(銅鐵)을 소비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明宗 12년부터는 해전에 사용할 天·地·玄·黃字 총통 등 대형 화포를 만들었는데, 이때 제작한 화포류가
임란 해전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수군의 人的 자질 면에서도 일본 측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 수군의 근원은 해적 집단이었다.
예컨대 海戰경험이 가장 풍부했던 구키(九鬼嘉隆), 李舜臣 함대와의 전투에서 사살된 구루시마(來島通之)
형제,그 밖에 스가(菅達長), 호리우치(堀內氏善) 등 다수의 水軍將들이 해적 출신이었다.
해적이란 기습전이나 게릴라전에는 능할지 모르나 통일적인 지휘체계 아래 전개되는 정규 해전에서는
취약하게 마련이다.
깡패 출신 병사보다 얌전한 농민 출신 병사가 전투를 잘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임란의 초전(初戰)에서 경상좌수사 朴泓(박홍)과 경상우수사 元均은 왜 싸워보지도 않고
휘하의 전선들을 불태우고 도주했던 것일까.
800여 척의 왜선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것을 목격하고 전쟁공포증(war-phobia)에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임란 발발 당시 李舜臣이 경상좌수사 또는 경상우수사 였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
수적 열세 함대였던 만큼 필승을 기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적어도 朴泓이나 元均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李舜臣은 7년전쟁 기간을 통틀어 적 함대의 동향을 항상 먼저 파악하고 있었다.
기습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명장(名將)의 조건이다.
李舜臣은 임진왜란 全기간에 23戰23勝을 기록했다. 특히 임란 초년도인 1592년의 전공이 눈부셨다.
5월7일의 옥포(玉浦)해전에서 9월1일 부산포해전까지 10戰10勝을 거두었다.
李舜臣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소수의 적 함대를 이길 만한 곳으로 끌어들여 싸웠다.
예외적 경우라면 일본 수군의 집결지를 기습한 부산포해전과 1597년 8월16일에 전개된
노량(鳴梁)해전 정도이다.
이제 임란의 全 국면을 개괄함으로써 李舜臣의 역할을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임란의 全 국면 개괄

壬亂 도발을 앞두고 히데요시는 규슈(九州) 서해안에 위치한 나고야(名護屋)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30만 명의
大軍을 집결시켰다.
동원된 왜군 30만 명 중 15만8000명이 8개 부대의 원정군으로 편성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軍(1만8000명)을 선봉에 세운 왜군은 이키島와 쓰시마(對馬島)를 징검다리로 삼아
부산포에 잇달아 상륙했다. 왜군의 北上 속도는 재빨랐다.
4월30일 새벽 선조 임금은 경복궁을 빠져나와 평안도로 몽진했다.
고니시의 제1軍은 5월3일 오후 8시경에 東大門을 통해 한성(漢城)에 1번 입성했다.
부산포에 상륙한 지 20일 만이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3만 명)은 다음날인 5월4일 오전 8시경에 南大門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한성을 점령한 왜군은 1주일 정도의 휴식을 취했다.

바로 그 무렵인 5월7일, 거제도의 옥포만(玉浦灣: 지금의 大宇조선소 자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해전이 벌어졌다.
李舜臣 함대(전선 28척·협선 17척)가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와 호리우치(堀內氏善)가 거느린 왜선 30척과
조우전을 벌여 敵의 대선 13척과 중선 6척 등 26척을 격파하고,다수 왜병을 사살했다.
조선으로서는 임란 최초의 승리였다.
도도(1556~1630)는 수병을 옥포에 상륙시켜 분탕질을 하다가 李舜臣에게 기습을 당했다.
그런 만큼 일본의 전쟁지도부에서는 패전에 대해 대수롭잖게 생각했지만,조선 수군에겐 「한번 맞붙어 보니
일본 수군도 별것 아니더라」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도도는 전투가 약한 장수가 아니었다.
5년 후 칠천량해전에서 통제사 元均의 함대(180척)를 궤멸시켰다.
그는 元均의 전사로 통제사로 복귀한 李舜臣과 명량해전에서 다시 격돌, 군선 31척을 잃었다.

한성에 입성한 왜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5월11일.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宇喜多秀家)에는 여러
왜장들에게 진격 및 점령목표를 정했다.
평안도에는 고니시 軍, 함경도는 가토 軍, 황해도는 구로다 나카마사 軍, 강원도는 모리 軍과 시마즈 軍이
진격하기로 했다. 병참선 확보가 主임무가 될 남부지방의 점령은 고바야가와 軍이 맡았다.
한성(漢城)에는 우키타 軍이 머물면서 경기도를 점령하기로 했다.
원정군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1572~ 1655)는 당시 만 20세에 불과했다. 대장감은 아니었지만,
히데요시의 양녀 豪姬를 아내로 맞을 만큼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지금의 서울 소공동 웨스턴조선호텔 자리에 전선사령부를 설치했다.
고니시 軍과 가토 軍은 임진강을 건너 개성(開城)을 함락시켰다.
개성에서 가토 軍은 함경도 방향으로 진격하고, 고니시 軍은 선조의 뒤를 추격했다.

이 시기에 李舜臣 함대는 사천해전(5월29일), 당포해전(6월2일), 당항포해전(6월5일) 등에서 전승하여 도합
적선 67척을 분멸시켰다.
특히 당포해전에서는 적장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 1557~1612)가 소지하고 있던 히데요시의
金부채를 노획했다. 가메이는 호키(伯耆)의 시카노(鹿野) 城主였다.
그는 대규모의 신전(新田) 개발, 동남아型 벼의 재배, 양잠, 제지(製紙), 말의 사육 등 식산흥업에 성과를 올려
제1급 민정가(民政家)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히데요시는 류구(琉球: 오키나와)를 점령하면 그곳을 '가메이' 에게 영지로 주겠다는 뜻에서 지휘용 금부채에
「龜井琉球守」를 써서 주었다.
가메이는 조선반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여 그것을 처음으로 히데요시에게 상납했다.
당포해전에서 그는 침몰하는 기함(旗艦)에서 金부채를 엉겁결에 그냥 두고 퇴선했다.
李舜臣에게 노획된 金부채는 선조(宣祖)에게 진상되었다.

고니시 軍은 부산포에 상륙한 지 두 달 만인 6월16일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이미 선조는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의주(義州)에 피란해 있으면서 왜군이 더 북상하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건너가 명나라(明國)에 귀부(歸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