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3:36
◆ 임진 왜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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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山島 해전의 전투상보

李舜臣이 이끄는 연합함대와 와키자카 함대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 결전 하루 전인 7월7일, 샛바람(東風)이
심하게 불어 선박의 항행이 어려웠다.
연합함대는 당포(唐浦-지금의 통영)까지 와서 숙영준비를 했다.
이때 경상도 목자(牧者-말 먹이는 사람) 金天孫이 달려와서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거제도의 북단) 앞바다에서
견내량(見乃梁)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고성과 거제도 사이의 견내량은 최소 폭 약 180m, 최소 수심 2.8m, 수로 길이는 약 4km의 긴 해협이다.
암초도 많아 판옥선·거북선 등 대형선이 싸우기에는 불리했다.
舊일본군 참모본부가 발행한 「日本戰史 朝鮮役」에 따르면 당일 이곳의 조류는 0.5노트 이하로 해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였다.

7월8일 새벽, 연합함대는 거제도 서쪽 한산도(閑山島) 해역으로 나아갔다.
李舜臣은 한산도 앞바다를 결전장으로 삼기로 결심하고, 전투계획을 세웠다.
한산도 앞바다는 넓고 수심이 깊어 연합함대의 작전에 매우 유리했다.
李舜臣은 花島· 大竹島· 解甲島(해갑도) 일대에 함대를 분산 배치했다.

와키자카의 함대는 견내량의 좁은 해협 안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연합함대는 왜군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먼저 판옥선 5~6척이 견내량으로 진입하여 일본 함대의 선봉과 전투를 벌이다가 짐짓
약세를 보이며 퇴각했다.

와키자카 함대는 일제히 돛을펴고 추격에 나섰다. 왜군 함대가 견내량을 거의 벗어나 넓은 바다로 나왔을 때
만반의 전투준비를 갖추고 작은 섬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연합함대의 主力이 일시에 선회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형성하여 돌격을 감행했다.
학익진 이라면 화기의 효율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횡대의 陣形이다.
연합함대는 왜군 함대를 포위망에 집어넣은 다음 지자총통(地字銃筒),玄字총통, 勝字총통을 비롯한 화약무기로
일제사격을 가하여 먼저 적함 3척을 격침시켰다.
유인전술에 걸려든 왜함들은 사기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조류의 흐름이 변했다.
왜함들은 조류가 역류하는 견내량의 좁은 水路로 도주할 수 없었다.
李舜臣은 경상도 방면의 물길에 밝은 光陽현감 어영담(魚泳潭)의 건의를 받아 한산도 해역의 조수 변화 등을
실사(實査)를 통해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연합함대는 틈을 주지 않고 포위망을 좁히면서 연속공격을 가하며 불화살과 철환을 쏘아 적선을 불태우고
적병을 사살했다.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판옥선은 전속력으로 다가가 왜함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부딪치기만 하면 왜함에 3尺(90cm)이나 되는 구멍이 뚫렸다. 이른바 당파전법(撞破戰法)이었다.
順天부사 권준이 탄 배는 먼저 층각을 세운 왜의 대선 1척을 갈고리로 끌어당긴 다음 그 위로 뛰어올라
육박전을 전개함으로써 지휘관 이하 10여 명의 목을 베었고,광양현감 어영담 역시 층각선에 뛰어올라
왜장 1명을 사로잡아 기함(旗艦)으로 보내왔다.
왜장은 이미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은 데다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왜장은 다른 왜병 11명과 함께 참형에 처해졌다.
사도첨사 김완은 아타케船 1척을 나포하여 왜장을 포함한 16명을 참수했다.
같은 방법으로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은 왜병 8명의 목을 베었고,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도 왜병 4명의 목을
잘랐다.
이같은 등선육박전(登船肉薄戰)은 倭寇 이래의 일본 수군이 장기(長技)로 삼던 전술이었다.
조선 수군의 등선육박전, 이것은 조선 수군의 드높은 사기를 말해 주는 것이다.
당파전법에 의해 깨어진 왜선도 적지 않았다.
연합함대가 소멸시킨 것은 왜군의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이었다.
적군으로서 칼을 맞아 목이 잘린 자만 해도 90여명, 그 밖에 화살에 맞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는 3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되었다.
와키자카는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등 14척을 수습해 간신히 金海 방면으로 탈출했다.
그의 副將으로 유명한 해적 출신인 와키자카 사베에와 와타나베 시치에몬 등은 전사하고, 선장
마나베 사마노죠는 한산도에 상륙했다가 할복 자살했다.
하루 종일 전투가 계속되다 날이 저물어 연합함대는 견내량 서쪽에 진을 치고 휴식에 들어갔다.

한산도 해전에서 특징적인 것은 적들의 함선을 불태워 소멸시키는 데 치중했던 종전의 전법과는 달리
바짝 다가가서 적선을 요구금으로 끌어당긴 다음에 적선에 뛰어올라 왜장 이하 적병들의 목을 자른 것이었다.
이같은 등선육박전에 의해 9척 이상의 왜선이 소멸되었다.
이것은 연합함대 수군의 불같은 적개심과 투지, 그리고 그에 앞선 일곱 차례 해전의 경험에 의해 갑판 위에서의
단병접전(短兵接戰)의 능력이 향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는 누구인가. 오미(近江) 지방의 아사이(淺井)郡 태생인 그는 일찍이
히데요시의 막하에 들어가 1583년 「시즈가다케 싸움의 七本槍」으로 武勇을 떨쳤다.
시즈가다케 싸움은 戰國시대 최강의 武將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사망 후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 사이에 후계자의 지위를 걸고 전개되었던 결전이다.
「七本槍」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일곱 용사라는 의미이다.

- 閑山島 해전의 戰果 확대(安骨浦 해전)

한산도 해전 다음날인 7월9일, 안골포9安骨浦)에 왜선 40여 척이 머물고 있다는 탐망선의 보고가 들어왔다.
구키의 2함대와 요시아키의 3함대가 와키자카 함대의 뒤를 따라오다가 한산도 패전의 급보를 듣고 안골포로
숨어든 것이다.
연합함대는 7월10일 새벽 안골포 앞바다로 진출했다.
안골포 선창에는 왜의 대선 12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현재 건설 중인 釜山新港과 바로 인접한 안골포는 입구가 병목처럼 좁고 수심이 얕아 大함대가 돌입하기
어려운 포구다.
연합함대가 두세 번 유인해 내려고 했지만, 적들은 견내량-한산도 해역에서 유인전술에 걸려들어 참패한
경험이 있는지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李舜臣은 판옥선의 지휘관들에게 교대로 안골포 선창으로 돌입할 것을 명령했다.
판옥선들은 종대 대형을 이뤄 연속적으로 진입, 각종 총통과 長片箭 등을 퍼부어 왜선 42척을 격파했다.
왜의 패잔병들은 육지로 올라 도주했다.
그렇다면 안골포 해전에서 패전한 왜장들은 어떤 수준의 장수들인가.
구키 요시다카(1542~1600)는 구마노(熊野)의 해적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수군 장수로 활약했다.
1578년 거대한 장갑선 6척으로 당시 일본 최강의 毛利 水軍에 궤멸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戰國水將 중
제1인자로 평가받아 이세(伊勢)·시마(志摩)의 3만5000석 영주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히데요시 밑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水軍 조직의 핵심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앞두고 쓰시마에서 니혼마루(日本丸)라는 거대한 장갑함을 만들었다.
그러나 기동성의 저하로 실전(實戰)에는 사용되지 못한 것 같다.
가토 요시아키(1583~1631)는 16세부터 히데요시의 주고쿠 지방 공격전에 종군, 미키(三木)성 포위전에서 功을
세웠고, 시즈가다케 會戰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구키와 함께 「七本槍」의 1인으로 용명을 떨쳤다.
히데요시가 관백(關白)이 되면서 從五位下에 올랐다.

한산도 앞바다 싸움과 그 연장인 안골포 선창 싸움에서 연합함대는 도합 101척의 적함을 격침,소각했다.
이 두 번의 해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수군 장수들이 모두 대패함으로써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
해전 금지」의 명령을 내리고 해안에 축성을 하도록 지시하는 등 전략의 변화를 도모한다.
그렇다면 왜 일본의 수군은 약세를 면치 못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