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27 13:28
◆ 임진 왜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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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1.한산도 해전(閑山島 海戰-1592년 7월8일)

* 세계 4대 海戰中 의 하나
* 왜군(倭軍)의 병참선(補給線)을 차단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분수령
* "이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가 보존되었고, 요동과 천진에 왜군의 발자국이
미치지 못했다."(징비록-懲毖錄)

-개관:
7년전쟁에서 倭軍은 병참선을 유지하지 못해 패전했다.
李舜臣의 제해권 장악에 의해 히데요시의 수륙병진전략은 파탄을 빚었다.
倭軍은 대량수송이 가능한 海上 보급로를 포기하고, 陸上 보급로에 의존했지만 이것도 전국 곳곳에서
봉기한 義兵들의 게릴라戰에 의해 봉쇄당했다.

임진왜란은 東아시아 정치 地形의 전면 재편을 초래한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과대망상가에 의해 저질러진 임진왜란에 의해 참전 3개국 모두가 치명상을
입었다.
전쟁을 도발한 도요토미(豊臣) 정권은 종전 2년 만인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에게 패망했다.

明나라는 막대한 전비부담과 요동병(遼東兵)의 원정 때문에 때마침 흥기한 만주족(滿洲族-建州衛의 女眞族)의
누르하치(후일 淸의 太祖)를 견제하지 못한 탓으로 1618 년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참패함으로써 亡國의 길을
걷게 되었다.
참혹한 전화를 입은 朝鮮은 전후에도 기근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에 허덕였다.
더욱이 국익보다 명분 중시의 졸렬한 외교에 의해 또 한 번의 침략전쟁인 병자호란(1636년)을 당하고 말았다.
다만, 국왕(仁祖)이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로 나아가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淸 太宗)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함으로써 王朝의 명맥만은 이어가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망상은 이렇게 東아시아의 政治地形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東아시아 세계의 마이너리티였던 滿洲族(당초 인구 10만에 불과했음)은 3國의 7년전쟁 기간에 어부지리를 획득,
東아시아의 패자(覇者)가 되었던 것이다.
만주족은 고구려와 발해의 하층계급인 말갈족(靺鞨族), 그리고 신라와 고려를 '부모의 나라' 로 섬겼던 여진족의
후예이다.
서기 1115년, 중국을 정복한, 정복국가 금(金)의 태조(太祖)가 되었던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는
신라김씨(新羅金氏) 함보의 6代孫 임을 자처한 바 있다.

- 방위전쟁의 승리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에 있어 임진왜란은 침략군을 물리친 방위전쟁의 승리였다.
히데요시는 前後 30만 명의 대군을 침략전쟁에 투입하고도 당초의 전쟁목표 달성은 커녕 땅 한 평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왜군의 침략을 앞두고 나름대로는 방어대책에 전전긍긍했다.
이를테면 삼남(三南) 곳곳에 성(城)을 축조하거나 보강했고, 장재(將材)로 평가된 무장(武將)들을 三南의
병사(兵使)·수사(水使)로 배치했다.
각종 화포와 판옥선(板屋船) 등 전함도 증강시켰다.
문제는 국초(國初)이래의 문관(文官) 우월주의에 짓눌려 무장(武將)들이 제대로 육성되지 않았던 데 있었다.
또한 明에 대한 사대외교(事大外交)로 「공짜 안보버스」에 편승해 온 타성에 의해 유사시에 작동시킬
국가 총동원 체제를 정비해 놓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100여 년 동안의 전국(戰國)시대를 거치면서 야전(野戰)기술에 관한 한 막강(莫强)이라고
평가할 만 했다.
왜군의 야전 능력을 뒷받침했던 신(新)무기가 바로 그들이 철포(鐵砲)라고 불렀던 조총이었다.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제 철포가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50년 전인 1543년, 곧 사카이(堺: 오사카)
등지에서 양산체제가 갖춰져 1575년 나가시노 싸움에서 철포대(鐵砲隊)가 등장했다.
나가시노 會戰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은 철포대를 3열 횡대로 배치하여
연속사격의 효과를 냄으로써 당시 일본 최강으로 지목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기마군단(騎馬軍團)을
궤멸시켰다.
이것은 지상전(地上戰)의 양상을 변화시킨 혁명적인 신(新)전법이었다.
조총을 주력으로 하는 전법은 이후 더욱 발전했다.
조총에 의한 사격과 기동은 임진왜란의 야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런 왜군이 개전(開戰)한 지 1년도 못 돼 수세(守勢)로 몰린 까닭은 무엇일까.

- 왜군(倭軍)이 병참(兵站)에 실패한 까닭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의 패전은 그들의 수송능력에 비해 병참선(兵站線)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병참선은 전쟁을 진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생명선(生命線)이다.
그것을 유지하느냐, 못 하느냐로 전쟁의 향방이 결정되고 만다.
왜군이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은 제해권(制海權)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산도(閑山島) 해전의 승리에 의해 李舜臣 함대는 남해(南海)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일본의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부산포 일대의 좁은 해역을 벗어날 수 없게 했다.
이것은 히데요시의 수륙병진(水陸竝進)전략을 파탄시키고, 평양까지 진격한 일본의 육군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북진(北進)을 불가능하게 했다.

왜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평양을 점령한 후 「일본 수군 10여만이 또 西海로 오게 될 것인데,
대왕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겠느냐」는 글을 선조에게 보낸 바 있다.
그 시점 까지만 해도 고니시는 왜군의 제해권 확보를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조 26년(1593) 이후 임진왜란이 끝날 때(1598)까지 영의정 겸 삼남(三南)도체찰사를 역임하며 뛰어난 전시(戰時)
행정 역량을 발휘한 유성룡은 그가 쓴 징비록(懲毖錄)에서 한산도(閑山島) 해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당초 적은 수륙 양면으로 합세하여 서쪽 방면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한번의 싸움에서 李舜臣에게 크게 패함으로써 완전히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고니시가 비록 평양성을 점령했지만, 더 이상 전진을 못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보존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일대를 확보하여
군량을 조달하고, 나아가 조정의 호령이 전달되게 하여 나라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분석은 역시 명쾌하고, 그 시야(視野)도 넓다.
다시 이어지는 「징비록」의 기록...또한 요동의 金州· 復州· 海州· 蓋州와 天津 등지에 적의 사나운 발자국이
미치지 못하도록 막았기에, 明의 구원병이 육로로 나와 우리를 도와 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 모든 것이 李舜臣의 한 번 싸움에 이긴 功이었으니, 아아,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李舜臣 함대의 연속적인 승전 소식은 전국 각지의 백성들에게 '이 전쟁에선 반드시 이긴다' 는 믿음을 주었다.

-조선 水軍을 얕잡아 본 일본 水軍將

개전 이후 陸戰의 연전연승과는 달리 海戰에서 연전연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水軍將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에게
李舜臣 함대와 결전을 하도록 명했다.
위의 세 왜장은 히데요시의 국내 통일을 완성시킨 1590년의 오다하라(小田原) 전투에서 호조 우지마사(北條氏政)
軍을 해상에서 봉쇄한 직속 정예 水軍將들이다.
임란(壬亂)개전 초기, 와키사카를 비롯한 구키·요시아키 등 왜군의 水軍將들은 육로로 漢城 방면에 진출하고 있었다.

경상좌·우수군이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치자 조선 수군의 능력을 아주 얕잡아 보고 육전에 참가했던 것이다.
특히 와키사카는 경기도 용인에서 불과 1500명의 병력으로 전라·경상·충청 3도 관찰사가 거느린 호왈(號曰) '근왕병'
5만명을 단 한 번의 기습공격으로 붕괴시켜 기고만장하고 있었다.
당초 일본 수군은 부산포 방면에서 한반도 남해안을 西進한 후 서해를 북상하여 漢江을 통해 漢城으로 들어가는
병참선, 그리고 다시 북상하여 대동강 河口에서 평양에 들어가는 병참선을 확보한다는 전략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출격과 제2차 출격을 통한 7회 해전의 全勝에 의해 조선 수군은 부산과 김해 해역을 제외한 南海의
제해권을 회복했다.
그제서야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에 탁월한 장수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왜군 측은 漢城 방면으로 북상한 와키사카 등 수군장을 남하시켜 함대의 재편성에 들어갔던 것이다.
구키의 제2함대와 요시아키의 제3함대보다 먼저 전투태세를 갖춘 와키사카의 제1함대는 7월6일 金海를 떠나
출전을 감행했다.
와키사카의 함대는 層樓船 7척을 포함한 대선(아타케·安宅船) 36척과 중선(세키부네·關船)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이었다. 개전 이후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함대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었다.

한편 李舜臣 함대는 제2차 출전(1592년 5월29일~6월10일)을 마치고 본영(전라좌수영)으로 돌아와 일본 수군의 동태를 주시했다.
가덕도·거제도 해역에서 일본 군선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7월4일 李舜臣 함대는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와 전라좌수영에서 합류했다.

7월6일, 연합함대는 西進해 오는 일본 수군을 틀어막기 위해 제3차 출동에 나섰다.
남해의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元均의 함대도 가세했다. 연합함대의 세력은 전라좌수영의 23척, 전라우수영의
25척, 경상우수영의 7척 등 판옥선 55척을 主力으로 하는 90여 척으로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