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30
병자 호란(1)
 글쓴이 : …
조회 : 371  
◐ 전야(前夜)

역사상 미증유의 참화를 겪은 우리나라는 군주를 중심으로 상하 일치단결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재건에 매진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선조의 제위 41년간의 기간은 조선왕조 500여년의 역사를 통해서 당쟁이 가장 극심했던 기간으로서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와중은 물론 무슨 문제가 일어나거나 인사정책을 시행할 때면 어김없이
당파적 논란이 빚어져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을 정도로 당쟁으로 날을 지새면서 국력을 소모해갔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그 결실을 볼 수도 있는, 반세기에 가까운 긴 기간인데도 이와같이 허송세월하고
말았으니 그 이후의 우리나라 역사가 어찌 순탄할 수가 있을런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 아닐까..

이는 선조가 조정신하들이 권력을 탐내는 것을 미워해 각 당파의 사람들을 번갈아 쓰다가
쫓아냄으로서 명예와 이익의 자리를 놓고 싸움을 붙였다.

궁극적으로 당쟁을 유도한 책임은 선조라는 군주였다.
선조는 일본과 한창 평화교섭을 벌이고 전후 정치 사회질서를 바로 잡고 혼란을 수습할 시기에
분란을 조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란이 끝난 이후 부터 선조가 죽기 까지의 10년이라는 이 기간은 참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즉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앞록강 너머 만주땅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과 함께 먹구름이 일고 있어
북방의 정세를 예의 주시하고 하루속히 민심을 수습하여 이에 대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론만 분열시키고 분란만 조장하다가 아무런 대비없이 죽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들어서 당쟁의 소용돌이를 헤치며 국가재건에 나섰으나 이 또한 얼마안가
인조반정에 의해 축출됨으로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이로써 또 한번의 참화를 겪고 말았으니
이로 인해 백성들은 또 한 번 어육의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고 말았다.

★ 만주족(여진)의 뿌리

13세기 초에 징키즈칸이 더 넓은 초원에 흩어져 살던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고 규합하여
하나의 힘으로 통일 했듯이, 17세기초 경에는 '누르하치' 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남만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여진(女眞)무리들을 하나씩 통합함으로서 마침내 하나의 통일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갗추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여진족,만주족 등의 뿌리를 알아보고 본론에 들어가고저 한다.

예전의 청(淸)나라 황실 애신각라(愛新覺羅)가문은 사실 그 성은 금(金)나라 황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금나라 왕족의 본래 성이 완안(完顔)씨로 이 완안씨들의 선조가(지난 임진왜란 연재시에도 언급했음)
신라 김(金)씨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시조가 고려인 김함보(金函普)임을 지금도 역사서에서 증명해주고 있으며
김함보는 신라 왕족임을 암시한다. 이 신라 왕족은 자신의 나라가 망한 뒤,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그곳에 뿌리를 내려 여진(女眞)족들의 시조가 되었다.
그 시조의 후손인 완안민(完顔旻)이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운 것이고 이 완안씨들의 나라가
1234년에 원(元)나라에게 멸망당한 뒤, 그들은 동(童)씨로 개명한 것이다.

그로부터 382년 후인 1616년, 금나라 왕족의 후손이자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수장인 동대랑(童大郞)은
자신이 금나라 왕족임을 깨닫고 성을 애신각라('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라' 는 말이라고 하나 고증된
史實은 아님) 이름을 누르하치(努爾哈赤)으로 개명하고 후금(後金-뒤에 淸으로 개명)이란 나라를 세웠다.

내친김에 관련 민족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보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먼저 몽골인데, 몽골의 옛이름은 몽고리이다.
몽고리와 가우리(몽골에서는 고구려를 '가우리' 라 부름.고구려는 고구리, 다른 말로 가우리임)는
형제의 나라였다. 지금도 몽골지방에 가면 고구려를 찬양하는 민요를 알고 있는 노인이 있다.
(KBS 역사 스페셜에서도 나왔음.)

고구려는 정착하여 살았지만 몽골은 유목민이라 이동하며 살았다.
여진족과 숙신족 그리고 선비족들은 모두 몽골과 함께 고조선의 후예들이다.
즉 모두 우리민족이다.(정착한 것과 이동한 것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우리민족임. 마치 대한민국에
어부와 농부가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나 있지만 같은 민족인 것같이...)

조선은 숙신이다. 숙신의 중국어 발음이 '쥬신' 이다.
유목민은 이동반경이 넓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여기 저기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우리민족을
발견된 장소나 시기에 따라 다르게 기록하였다.
그래서 숙신,여진,선비,조선 등으로 기록 된 것이다.

여진,숙신,조선은 모두 쥬신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이들의 단어들은 중국어로 발음하면 쥬신에 아주 가까운 발음들이다.
그리고 말갈족이란 애시당초 없었으며, 말갈은 중국인이 붙인 이름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있는 말갈은 만주북동부와 한반도 북부지방에 흩어져 살고있던 예맥족으로서
이 예맥족중 북부 예맥이 고구려와 부여를 세운(그 전에는 고조선을세운..) 민족으로서 우리가
여진족이라고 부르는 민족도 바로 이 민족이다.

여진,숙신,선비,몽골은 모두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목민이고 고구려는 정착하여 살아간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다.
하지만 그 뿌리는 같다. 그래서 말갈족(여진족)은 고구려를 위해 목숨걸고 싸웠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에는발해에 살았다.
발해는 약 5분의 1정도의 고구려인이 나머지 말갈족(여진족)을 지배하며 살았다고 배웠을 것이다.
잘못 배운 것이다. 지배한 것이 아니고 공존한 것이다.
여진족이 고구려를 위해 목숨걸고 싸운 것은 고구려와 형제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진족이 발해를 위해 목숨걸고 싸운 것도 발해가 형제나라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여진족은 훗날 사대주의자들이 집권한 고려와 조선에 멸시를 받으며 오랑케 취급받고 야만인 대접을
받았지만 누루하치가 민족을 통합하고 후금을 세운 다음에 다시 중국의 본토를 점령해버렸다.
1% 이하의 만주족(여진족)이 99%의 중국 한족을 완벽하게 지배한 나라가 바로 청나라이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청과 조선을 남북조라 하였습니다.
즉 청나라는 고구려.발해를 이어가는 만주족(여진족=쥬신족)의 나라라고 본 것이다.

여진족은 임진왜란때 조선에 2만명의 조총부대를 지원하겠다고 하였지만 멍청한 조선의 왕은
거절하였다. 오로지 명나라만을 모시겠다는 사대주의적 사고와 우리민족의 한 가지이며
고구려의 뒤를 이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주족을 오랑케 취급하였다.
마치 저 옛날 당에 유학하여 친당적 성격이 강한 신라의 천재학자 최치원이 고구려를 오랑케라고
말한 것과도 같이 조선의 왕과 권력층들은 모두 만주족(여진족)을 오랑케라 여기며 멸시하였다.

그 뒤에도 여진족(만주족)은 조선과 형제의 의를 맺자고 여러차례 사신을 보냈지만
조선의 집권층들은 만주족의 사신들을 무시하고 푸대접하였고 모욕을 주었다.
우리의 형제나 다름없는 만주족이 명나라를 공격할 땐 오히려 명을 도우려고했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보니 내용이 너무 옆으로 흐르는 감이 있어 이 이야기는 여기서 이만
중단하기로 하고 본론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 누르하치의 세력확장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르하치는 조일(朝 日)전쟁이 일어나 명나라의 관심이 조선에 쏠리자
거침없이 주변의 여진족을 아우르며 왕조의 기초를 닦아나갔다.

조일전쟁이 일어나던 해 9월 누르하치가 조선에 2만 명의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했는데
조선은 논의할 가치도 없다며 일거에 거절했다.
당시 조선은 평안북도만 제외한 한반도 전역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오랑케의 도움을 받을수 없다면서 망해가는 명나라의 구원병이
앞록강을 건너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심양 주변과 압록강 일대에 중심 근거지를 마련하고 두만강 쪽과 길림 쪽의 여진을
차례로 아울러 나갔다. 먼저 회유의 방법을 써서 투항하는 자들에게는 주요 직책을 주어 써먹고
반항하는 세력은 무력을 써서 복속시켰다.
명나라에 순종의 뜻을 보이며 조공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오히려 그의 세력을 변방을 막아주는 울타리로 여기고 누르하치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명나라로서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호랑이를 우리 안에서 기로고 있는 꼴이었다.

누르하치는 백두산 동북방에서 정복전쟁을 벌여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듭하였으며
수많은 포로를 거두는 동시에 만주 땅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그는 조선으로 눈을 돌려 무역을 트고 우호관계를 맺자고 요구했다.
조선도 건주여진의 성장을 변방 장수의 보고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가는 사신에게 여진의 정세를 알아보게 했고 의주에 주둔한 장수를 잠입시켜
동정을 살피기도 했다. 왕은 때때로 군사 관계자를 불러 여진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지만
전통적인 무마방책 이외에 뾰족한 방법을 세우지 못했다.
당쟁 등 내부 분열로 나날을 지새우는데다 전쟁을 겪은 터라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어
토벌전쟁은 꿈도 꾸지 못했다.

★ 누르하치의 전략과 광해군의 실리외교

1613년(광해군) 조정에서는 숙의를 거듭한 끝에 건주여진에 대한 접대사목(接待事目)을 제정했다.
교역을 허락하고 그들의 사자를 환대해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수준에서 교역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미온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누르하치는 명나라와 교역을 열고 인삼과 가죽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그는 막강한 경제력을 토대로 계속 서쪽 변경의 여러 세력을 압박해 지배세력을 넓혀나갔다.
그제서야 명나라는 누르하치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그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 방법으로
교역을 중지한다고 통고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굴복하기보다는 물리적으로 맞서는 강경노선을 추구했다.
여진족의 통일을 꿈꾸던 그로서는 어차피 걸어야 할 길이었다.

이 무렵 조선과 명나라가 합동해 건주여진을 협공하려 한다는 정보가 누르하치에게 들어갔다.
누르하치는 사자를 보내 "조선과는 원한을 산 일이 없다" 고 강조하고, 조선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비난하면서도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광해군은 혐공설은 낭설이라고 강조하는 회답을 보냈다.
협공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는 기회를 엿보아 조선과 합동으로 공격작전을 개시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사신이 돌아간 뒤 광해군은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우면서 요동 일대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피라고 지시했다.
누르하치는 조선과 분쟁을 야기하지 않으려는 외교 전략을 세우고 있어서 이 정도의 회답에 만족하고
더이상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배후의 조선을 무마해 후환을 없애고 통일에 전력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될 수 있으면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 통일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누르하치

1615년,여진의 거의 모든 부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군대와 행정을 팔기제(八旗制)로 편성했다.
팔기는 군단인 동시에 각 개인의 소속집단이었다.
여진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여덟게 '기'(旗)의 어느 하나에 소속해야 했다.
여진족은 농사를 짓기도 했으나 기본 생업은 수렵이었다.
사냥은 대개 여러사람이 참여하는 몰이사냥의 형태였다.
이 집단사냥은 몰이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능률이 오르지만 기본적인 단위는 열 명 선이었다.
이 기본 단위의 지휘자를 큰 화살의 주인이란 뜻을 지닌 '니르 에젠'이라고 불렀는데
구성원에게 군사훈련을 방불케하는 강한 조직력과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시켰다.
누르하치는 이 수렵단위를 전투단위로 편제하여 300명을 1니르로, 5니를를 1자란으로,
5자란을 1기로 조직했다.1기는 7500명이 되는 셈이다.
몰이사냥을 할 때 마지막 몰이 지점을 미리 정해놓고 황색 깃발을 세운다.
몰이꾼은 세 패로 나위어 포위망을 좁혀간다.
이때 각 패의 중앙 몰이꾼은 남색 기, 좌우 몰이꾼은 홍기와 백기를 들었다.
이 네가지 깃발을 사기라 하는데 누르하치는 이것을 배로 늘려 여덟 개의 깃발을 만들어
조직을 표시하는 상징으로 삼았다.

누르하치는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포로 확보에 열을 올렸다.
포로들을 군대에 편입시켜 니르에 배치했는데 몽골군,중국군으로 편성된 니르도 있었다.
이때까지 조선군 니르는 없었다.
군사는 중국군 5천여 명을 포함해 12만 명을 헤아렸다.
군사들은 기마전술에 능했으며 작고 굳센 활로 무장했다.
기주(旗主)는 사령관인데 누르하치의 아들과 조카가 말았다.
이 군사제도는 건주여진을 대제국으로 만드는 데 기본 조직의 역할을 해냈다.

이 무렵 명나라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이어졌다.
농민들은 조일전쟁에 시달린데다가 압제와 수탈이 가중되자 무리를 이루어 여기저기에서
저항세력을 이루었다. 저항의 중심세력은 오랫동안 반체제의 전통을 이어온 백련교도들이며,
지방이 영주도 농민과 손을 잡고 반란을 도모했다.
명나라는 명재상 장거정이 죽은 뒤 내전을 포함해 크고 작은 전투로 날을 세웠는데
내시가 권력을 잡고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만력황제의 위엄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간지 오래고 명령계통도 엉망이었다.
조선의 눈먼 사대주의자들만 빼놓고 명나라의 명맥은 누가 보아도 그리 길어 보이지 않았다.

★ 누르하치, 명나라에 선전포고

-누르하치, 後金國을 선포하고...

1616년, 누르하치는 정식으로 대금국(大金國 또는 後金國)을 선포하였으며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수도를 흥경(興京)으로 정하고 칸(汗)에 올랐다.
대금국은 스스로 자존해 붙인 이름이고, 후금국은 스스로 금나라의 후예임을 일컫는 이름이나
정식 국명은 아니다. 예전 조상들이 세운 나라의 국호를 그대로 따른 것은 여진족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12세기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내고
최초로 중국의 북쪽을 차지했다. 그래서 중국 민족은 끝까지 금나라를 철전의 원수로 여겼다.
주희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이데올로기도 이와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이제 건주여진은 완전한 독립국가로 우뚝서서 명나라와 대등한 관계임을 천명했다.

중국은 예로부터 최고 통치자를 천자나 황제로 칭하였지만 퉁구스어계통에서는 '칸' (크다, 높다의 뜻)
이라고 칭하였다.
따라서 퉁구스어 계통에 속하는 우리 한(韓)민족도 몽골제국의 칸(칭기즈 칸 등)처럼 옛부터
'칸' 이라고 칭하는 것이 퉁구스어의 뜻이나 어법에 맞는 자연스러운 명칭인데, 중국에 사대하느라
고조선 시기와 고구려의 일부 왕 기간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천자나 황제보다 한 단계 아래인
제후국의 명칭인 '왕' 이라는 칭호로서 스스로 낮추어 칭하였다.

어쨋든 후금이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스스로 짐이라고 일컫으면서 중국의 황제에 걸맞는 의식을 행하자
천자의 나라로서 주변국의 국제질서를 총괄한다고 여기는 명나라로서는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명나라는 물론이고 조선도 자기 일처럼 분개했지만 무력으로 어찌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후금을 군신의 명분을 저버린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사림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전후 명나라에 대해 자소(字小)의 은혜와 재조(再造)의
은혜 의식으로 얼을 빼고 있었다.
조일전쟁으로 나라가 망해갈 때 명나라가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겨 다시 나라를 만들어주었다" 는 것이다.
'자소-재조'의 은혜 의식은 사대에서 더 진전된 새로운 이데올로기였다.
전후 이와 같은 의식이 풍미하고 있을 때 후금이 등장하자 현실정책에도 직접 연결시켜
후금을 오랑캐 나라로 규정하고, 임금으로 받드는 나라인 명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치는 것이
변할 수 없는 인간의 도리라고 주장했다.
이 무렵부터 존명배청(尊明排淸)의 명분론과 군신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광해군과 일부 대북파는 존명배청론자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려고 노력했다.

-누르하치, 명나라에 선전포고

후금이 조공을 중단하고 국경을 압박하자 명나라는 정벌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이 요청에 즉각 호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으나 광해군은 "남쪽에 변란이 있어
군사를 보낼 수 없다.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 되어 쓸모가 없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는 말로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1618년,누르하치는 명나라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자신의 여진 통일을 방해했다는
등의 구실을 내걸고 정식으로 명나라에 선전포고했다.
3월에 조선에 글을 보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하니 조선은 동정을 표시하기 바란다" 고 통고했으며,
5월에 "조선은 명나라와 연합해 출병하지 말고 자기 나라를 지키되 우리를 반대해 군대를 국경 밖으로
보내지 말라" 고 통고했다.
인목대비의 폐모론으로 온 나라가 기진맥진하고 명나라의 원병 요청으로 조정이 시끄러울 때였다.
벼슬아치들은 이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지연시켰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관할인 무순(撫順)을 삽시간에 점령했다.
후금군은 무순의 방어진지를 파괴하고 많은 포로를 이끌고 철수했다.
명군 1만여 명이 추격했으나 오히려 공격을 당해 궤멸하고 말았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락으로 삼아 현지에 보냈지만 초전부터 깨졌다.
명은 다급한 나머지 조선에 7천 명의 원병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