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3:45
◆ 임진 왜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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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軍의 벽제관전투 패배 및 권율의 행주대첩

고니시는 또다시 開城으로 남하 제6군(대장-고바야카와 다카가게)과 합류, 1월16일 漢城까지 물러났다.
평양에서 승리한 李如松은 의기양양했다.
그는 경기병(輕旗兵) 2만을 이끌고 1월27일 새벽 혜음령(惠陰嶺)을 넘어 벽제(碧蹄)의 골짜기에 이르렀다.
이제 곧 漢城이다. 안개가 짙게 끼어 視界가 불량했지만, 그대로 전진했다.
한편 漢城의 우키타 히데이에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 3奉行과 협의, 고바야카와 軍 2만을 북상시켜 明軍을
영격(迎擊)하기로 했다.
1월26일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軍이 북상을 개시했고,
우키다도 本隊 2만을 이끌고 뒤를 받쳤다.

1월27일 오전 7시경 여석령(礪石嶺)에서 쌍방의 선봉대가 조우하여 격돌했다.
明軍은 騎兵이었고, 倭軍은 조총과 칼과 창을 을 지닌 步兵이 주력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내린 진눈깨비로 酒幕里 일대는 진흙탕이 되어 李如松의 기병은 말발굽이 빠져
기동력을 잃은 반면 왜군의 조총부대과 장창부대가 위력을 발휘했다.
참패를 한 李如松은 평양까지 후퇴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도 光州목사 권율의 부대가 북상하여 幸州山城에 진을쳤다.
幸州山城 이라면 한강 하구와 漢城을 연결하는 목구멍에 해당된다.
더욱이 幸州山城에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왜군으로선 당면의 식량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幸州山城을 함락시켜야 했다.

2월12일 우키다 히데이에는 3만의 大軍을 투입했다.
1번대는 평양에서 후퇴한 뒤 휴식을 취했던 고니시 軍, 2번대는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노 나카야스(前野長康),
3번대는 구로다 나가마사, 4번대는 우키다 히데이에 자신이 지휘했다.
겨우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왜병 4000명이 전사하고 우키다 히데이에를 비롯한 마에노(前野長康),
요시가와(吉川廣家), 이시다(石田三成) 등 무장이 부상했다.


3.왜군의 철수와 정유재란(丁酉再亂)

幸州山城 전투의 패배 후 우키타 히데이에는 2월20일 漢城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왜장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앞으로 1개월, 정확히 말하면 4월1일에는 한 톨의 양곡도 없게 된다.
부산의 병량을 수송하려 해도 人馬를 입수할 수 없고, 수송대를 가동한다고 할지라도 도처의 산림에
도적이 충만, 비각(飛脚) 1인을 통과시키려 해도 城과 城 사이에 기병 50기 또는 30기와 弓矢·철포 100 또는
200정을 붙여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昨今의 실정이다』
왜군의 再정비를 위해 부산포 주변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음을 토로한 것이다.
이에 왜장 전원의 동의를 얻어 히데요시 에게 보내는 書狀을 작성했다.
奉行인 구마야(熊谷直盛) 등이 書狀을 가지고 나고야로 급행했다.

3월20일, 이시다 미쓰나리는 漢城 주변에 포진한 왜군을 점검했다.
이 점검에서 고니시의 제1군은 64.5%의 병력을 잃고, 가토 軍도 45%의 소모율을 나타냈다.
제일선부대의 병력은 11개월 사이에 절반 가깝게 줄어들었다.
현 전투병력 중에도 부상자 및 병자가 많아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모리(毛利輝元)와 하시바 히데가쓰도 전염병을 앓았고, 다른 왜장들도 허깨비처럼 수척해졌다.

명나라의 심유경이 漢城의 일본군 진영을 찾은 것은 이런 무렵이었다.
벽제관의 대패로 明측이 약세를 보였지만, 왜군 측도 골병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기뻐하며 심유경과의 협상을 고니시에게 맡겼다.
히데요시로부터 퇴각명령이 漢城에 도달한 날짜는 4월7일. 왜군은 4월18일 철퇴를 개시, 울산-부산포-웅천을
연결하는 남부 해안지대로 물러났다.부산포로 후퇴한 왜병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武功夜話」에 따르면 쇠잔해진 그들은 먹이를 놓고 전우끼리 싸움질을 하는 약탈집단으로 변했고, 철포에
벌건 녹이 슬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전염병은 조선의 軍民들 사이에도 만연했다.
식량 부족으로 사람이 사람을 먹는 참담한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었던 만큼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明과 日本은 심유경과 고니시를 내세워 강화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강화협상은 진전될 수 없었다.
히데요시의 희망사항은 조선의 남부 4개道를 할양받는 것이었지만, 명나라는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冊封)하는 선에서 강화를 성립시키려고 했다.
강화협상은 1596년 11월에 완전 깨졌다.
재침을 기도한 히데요시는 그동안의 소강기를 육군과 수군의 재건 기간으로 활용했다.
히데요시는 규슈, 시고쿠(四國)의 왜장들에게 再침략의 준비를 다그쳤다.
왜군 14만1000명이 부산포 일대에 집결을 완료했다.
1597년 丁酉再亂의 발발이다.

-조선수군의 궤멸과 이순신의 백의종군

이번에도 고니시는 제1군(1만4700명)을 거느리고 부산포에 상륙했다.
부산포에서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리던 고니시는 일대 모략전을 전개했다.
고니시는 곧 뒤따라 올 가토 기요마사 軍(제2군)의 도착일시와 항로를 알고 있었다.
가토 軍 1만여 명은 1월15일 울산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고니시는 이 기밀을 이용하여 이순신을 제거할 작정이었다.
고니시는 가카케하시 시치다이후(梯七大夫)라는 밀정을 부리고 있었다.
이 자는 조선어를 잘해 고니시의 심부름으로 조선군의 진영에 들락거렸는데, 우리 역사책에는
「요시라(要時羅)」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니시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의 진영으로 보냈다.
『和平을 방해하는 자는 가토 기요마사다. 가토가 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1월15일 바다를 건너
울산으로 들어온다. 조선군은 해전을 잘하니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맞아 싸운다면 쉽게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고니시는 가토를 이순신의 손을 빌려 죽이고, 곧 이어 이순신도 요격하여 패사(敗死)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니시로서는 一石二鳥의 독수(毒手)를 구사한 셈이다.
이순신은 고니시의 술책을 꿰뚫어보았다.
劣勢 함대를 거느리고 울산 해역까지 진출하여 설사 가토를 잡는다고 하더라도 귀로에 일본의 優勢 함대에
포착되어 함대의 전부를 상실할 우려가 컸던 것이다.
그런데도 선조 조정은 王命으로 이순신의 출전을 다그쳤다.
이순신은 그런 무모한 출전을 감행할 장수가 아니었다.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180척 규모의 함대를 위기에 빠뜨리기보다도 王命에 불복하는 길을 선택했다.
王命을 거부한 그는 함거에 실려 漢城으로 압송되어 고문까지 받았다.
이순신은 투옥된 지 28일 만에 출옥하여 일개 병졸로 白衣從軍을 하게 되었다.
7월15일, 삼도수군통제사 元均이 지휘한 180여 척의 조선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했다.
元均은 선조 조정의 강요로 일본 수군의 집결지 부산포를 공격하러 갔다가 아무런 戰果도 올리지 못하고
귀항 중에 요격을 받아 전사했다.
8월3일, 李舜臣이 삼도수군통제사로 再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