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57
병자 호란(14)
 글쓴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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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업 장군에 대하여...

조선사에서 가장 아까운 인물이 이순신과 임경업 이라고한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서북지방(평안도,황해도 등)에는 임경업 장군의 사당이 있어 토속신앙의
대상으로서 기리고 있다고 하며, 서해 서산 바닷가 마을에서는 해마다 풍어제를 지내면서
무당의 접신이 바로 임경업장군이라고 한다.
임경업의 어이없고도 애석한 죽음으로 그의 일생을 소설화한 작품이 바로 '임경업전'이다

임경업은 충북 충주의 대림산 아래 풍동에서 태어나 광해군 10년, 25세에 무과에 급제한,
무예와 용맹,전략 전술에 뛰어난 조선 중기의 명장이다.
인조 22년에 상신 심기원이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자 임경업과 같이 음모했다고 허위 자백을 함으로서
인조가 임경업의 죄를 다스리겠다고 청나라에 잡혀있던 임경업을 환국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청태종은 이를 허락하여 임경업을 내 주었다.
서울에 도착한 임경업은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임경업은 심기원과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지 않자 좌의정 김자점이 임경업을 몹시 시기하여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하였다.
결국 임경업은 형리들의 혹독한 매질에 의해 형장에서 장살(杖殺)되었다.

죽음에 임한 임경업은 "천하의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를 죽이는 것은 큰 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냐?" 외치며 한 많은 생을 마쳤으니 그의 나이 53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대여 나는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느냐?" 하고
탄식을 금치못했다 한다.

임경업은 김자점의 독단적인 계획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김자점도 역적으로 몰려 무참히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비로소
임경업의 충성심이 크게 빛나게 되었다.
숙종23년(1697년)에 특명으로 복관되고, 숙종32년에 충민공(忠愍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정조15년(1791년)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이다.
1978년, 충렬사는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성역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1643년, 청태종은 과로한 나머지 52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심양에 거대하게 조성한 북릉에 묻혔다.
오늘날 북릉은 공원으로 지정되어 한국 관광객이 자주 들르는 곳 중의 하나가 되었다.
태종이 죽었을 때 그의 동생 도르곤은 32세였다.
도르곤은 태종의 작은 아들 후림을 다음 황제로 추천하였다.
후림은 6살에 즉위해 순치제가 되었다.
청나라는 분쟁없이 새 황제를 추대했지만 도르곤이 섭정이 되었으니 모든 권력과 결정은
그의 손에서 나오게 되었다.

명나라는 당쟁과 파벌싸움으로 날을 지새우고 내시가 태감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와 군사일을 감독하며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게다가 전국에서 농민 반란군이 들고일어나 명나라의 시조 주원장이 활동하던 시대를 방불케 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반란군을 유적(流賊)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유적 가운데 이자성이라는 인물이
성장을 거듭해 수많은 집단을 병합했다.
이자성은 청태종이 죽은 해인 1643년 사천에서 대서국(大西國)을 세워 황제에 즉위하고 연호를
대순이라 하였다.이자성군은 승승장구하면서 서안을 점령하여 1644년 1월 초 하루 이곳에서
국호를 순(順),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바꾸고 다시 즉위식을 가졌다.

명의 숭정제는 군대를 보내 이자성군을 토벌하려 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숭정제는 이때서야 당황해서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와 거용관을 지키는 당통에게
백작 작위를 내려주고 철저히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거용관은 만리장성 아래에서 북경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입구이다.
하지만 당통은 곧바로 이자성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자성군이 북경에 입성하자 숭정제는 황태자을 탈출시키고 두 공주를 칼로 내리쳐서 죽였다.
황후와 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자성군이 자금성의 정문인 창의문 밖에 이르자 내통하고 있던 내시가 문을 열어주었다.
숭정제는 자금성 뒤에 붙어있는 작은 언덕배기인 경산으로 내달아 올라가 목을 매고 죽었다.
1644년 3월, 명나라는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다.
오삼계는 군사를 이끌고 북경으로 오는 도중 이 소식을 듣고 산해관으로 되돌아갔다.
조선은 한동안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자성이 자금성에서 호령하자, 각지의 장수들과 행정기관이 속속 순왕조에 귀순했다.
한데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오삼계는 산해관에 웅거한 채 투항하지 않았다.
이자성은 북경에 살고있는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을 볼모로 잡고 그의 투항공작을 벌였다.
오양이 아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르 보냈으나 오삼계의 회답은 한마디로 거절이었다.
"아버님이 이미 충신이 아니시니 아들이 어찌 효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버님과 헤어지겠습니다."

오삼계는 이렇게 버텼지만 자신이 거느린 군사로는 자금성을 회복할 자신이 없어
청군의 힘을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이자성이 스스로 10만 대군을 동원해 오삼계를 치기로 결정하고 산해관을 향해 출동할 때
거용관의 당통이 협공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오삼계는 황급히 도르곤에게 글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 역적을 멸망시켜면 땅을 떼어 보상하겠소."

"그대가 귀순한다면 변두리 왕으로 삼으리다. 그리고 한 몸과 가문을 보전해 길이 부귀를 누리리라."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답서를 보내고 출동 준비를 서둘렀다.
그는 최대의 국력을 기울여 원정군을 편성하고 "귀순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
변발한 군사를 죽여서는 안된다" 는 군령을 하달하고 요하를 건너 산해관으로 내달았다.
몽골군을 비롯해 홍승주, 조대수가 이끄는 중국군, 소수의 조선군이 도르곤을 따랐다.
도르곤은 소현세자를 불러 종군하라고 지시했다.조선군은 장수 유림이 지휘했다.

이자성군은 이미 산해관 주위에 진출해 있었다.
청군은 이들과 작은 전투를 벌이면서 산해관 성문 앞에 이르렀다.
오삼계는 성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청군을 맞이했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즉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자성군이 성 주위 산과 바닷가를 포위해 압박했으나 누런 먼지를 일으키며
천둥처럼 울리는 세찬 바람소리에 군사와 말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악천후는 성밖에 진을 친 이자성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게다가 바람이 걷힌 뒤 시계가 트여 앞을 바라보니 들판은 청군으로 가득 찬 게 아닌가.
여태 이자성은 청군이 합세한 줄 몰랐다.
경악한 이자성은 앞장서서 달아났다.
부하들은 우왕좌왕 하다가 서로 짓밟으며 달아났다.
참전한 이자성군 중에 6천여 명만 살아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선봉대가 오삼계군이고 청군부대는 뒤처져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소현세자는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다.
청군은 소모를 줄이려고 후방에서 공격하는 잔꾀를 부려 별로 손을 쓰지 않고도 승리를 이끌었다.

산해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변발을 하고
청나라의 군복과 옷으로 갈아입게 하라" 고 요구했다.
오삼계는 내키지 않았으나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자성은 패전을 겪었지만 미리 준비한 대로 자금성에서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그는 금붙이를 녹여 금괴로 만든 후 수레에 싣고 자금성을 차지한 지 40일 만에 궁궐에 불을 지르고
북경을 탈출해 서안지방으로 향했다.먼 오지로 들어가 뒷날을 도모하려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북경에서 만리장성과 명황제 13능으로 가는 외곽도로에 거대한 이자성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정부에서 이자성이 북경으로 들어오고 나간 길에 그의 동상을 세워 기린 것이다.
만약 이자성이 명조를 이어 대순국을 유지했더라면 중국은 한족 황제로 이어졌을 것이다.

도르곤은 청군과 오삼계 휘하의 명군을 이끌고 해방군의 모습으로 북경에 입성했다.
북경사람들은 진주군의 복장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으나 저항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도그곤은 이렇게 선언했다.
무고한 자를 죽이지 말라. 재물을 약탈하지 말라.건물을 불태우지 말라.
만일 항거해 복종하지 않는자가 있으면 대군을 보내 모조리 도륙내리라.('청사고')

소현세자를 비롯해 봉림대군과 그들의 부인, 시종하는 신하들도 북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명나라는 이렇게 나라를 세운 지 227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명나라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조선은 위태로운 길을 걸으며 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청나라는 다음해 2월에 소현세자를 비롯한 볼모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김상헌, 최명길도 이때 살아서 돌아왔다.

청나라가 중국의 중심이 됨으로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새로이 개편되었다.
그리고 이들 여진족을 호령하면서 동아시아의 맹주노릇을 했던 우리나라는 이제 명실공히
중국의 속국이 되면서 나라답지 않은 나라로서 그 명맥만 유지하다가 끝내는
남의 나라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끝) .

… 13-08-10 18:59
답변  
작년 여름, 임진왜란에 이어 게제한 병자호란을 이제 여기서 막을 내리고자 합니다.
양란(兩亂)을 게제함으로서 나는 조선왕조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수 있었고 이를 통해
나는 이 왕조가 우리에게 물려준 역사적 유산을 생각하면서 많은 날을 분노와 탄식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습니다.

새삼 거론하기조차 싫은 역사지만 조선왕조는 손가락 몇개를 꼽을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일관되게 부패와 무능과 정쟁, 나라의 안위보다 개인의 영달과 일신의 안위를
추구하는데 급급한 임금과 벼슬아치들이 500여년간 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과 높은 상무정신을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훼손시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는 데에 대하여 나는 분노와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유산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아직도 치유되지않은 상처로 남아
분단이라는 고통과 함께 지금도 우리의 삶속에서 깊숙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이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와 위정자들은 이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오늘의 역사가 훗날 우리의 후세들에게 또다시 이러한 평가와 함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난을
안겨주지는 않을지 하는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면서, 이들이 제발 역사에 대한 소명과
책임의식을 느끼면서 국정을 수행해 주도록 갈구하면서 저의 말을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 역사란 다수 대중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군 분투하는 한 두 사람에 의해서 창조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라고 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이비'의 말과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해서 살 수 밖에 없다" 라고 한 '토머스 매드'의 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그동안 열심히 읽어봐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