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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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 호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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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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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거리는 너무나 조용했다.
그야말로 유령의 도시였다.
두세 마리의 개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릴 뿐이었다.
궁궐은 타지 않았으나 민가는 거의 무너지거나 불에 탄 스산한 모습이었다.
길가에는 시체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있었다.
청군 호위병 100여 명과 임금의 시종들이 시체를 치우면서 나갔다.
가축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미친 개들이 사람들을 해코지하려고 날뛰었다.
한 노파가 임금 일행을 알아보고 손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여러 해 동안 강화도를 꾸며놓고 날마다 술이나 퍼마시더니 마침내 백성을 죽게 만들었구나,
누구의 잘못이냐? 아들 넷과 지아비가 도둑의 칼날에 죽고 나만 남았으니, 아, 하늘이여...."
이 노파처럼 성안에는 피란가지 못한 어린애와 노인들만 숨어 살고 있었다.
서울은 '도르곤'의 인솔아래 몽골 출신의 군사가 남아서 지켰다.
이들은 남은 민가에 거처하면서 보이는 대로 약탈을 일삼았는데, 여진족 출신들보다 정도가 훨씬 심했다.
임금을 따라온 500여 벼슬아치들은 자기 집으로 가지 못하고 궁궐로 들어와 밤을 새웠다.
시종과 종들이 부모와 처자를 찾으러 이리저리 흩어져 승지와 벼슬아치들이 문서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인조가 창덕궁 양화당에서 조정을 벌이자 용골대가 와서 태종이 새로 만든 '고려왕' 이라 새겨진
인장을 전달했다. 왜 조선이 아니고 고려왕일까?
조선은 명나라에서 지정해준 나라이름이니 그럴 법도 하다.
인조는 "몽골 군사가 서울에서 약탈을 일삼고 사람을 마구 죽이니 이를 금지시키고 포로를 돌려달라"
고 요구했다.
용골대는 도르곤의 지시를 받아 몽골 군사를 성밖으로 내쫓고 여진 출신 군사로 교체했으며
강화도에서 잡은 포로 1600여 명을 돌려보냈다.
이는 하나의 외교적 제스처이자 정치적 술수였다.
사실 청군은 몽골 군사의 약탈을 눈감아주었다.
몽골 군사는 약탈, 강간을 금지당하면 싸움터에 나올 재미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약탈품이 곧 전리품이었다.
한편에서는 잡아들이고 한편에서는 돌려보내었던 것이다.
청나라가 인조의 두 가지 요구를 들어주어 서울에서는 약탈이 사라졌으나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약탈이 자행되었다. 북쪽 지대 주둔군의 횡포는 더욱 드셌다.
태종은 2일 전체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인조는 교회로 나가 태종을 전송했다.
청군은 올 때와는 달리 길을 바꾸어 강원도, 함경도를 거쳐갔다.
8일 '도르곤' 이 뒤따라 철수하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이들의 부인들을 볼모로 끌고갔다.
뒤따라 척화를 주장한 벼슬아치를 대표해서 윤집과 오달제가 끌려갔다.
평양서윤 홍익한은 체포되어 먼저 죽음을 당했다.
두사람은 볼모가 아니라 전범으로 잡혀간 것이다.
청태종은 이들을 회유하라고 일러 용골대가 두 사람을 불러놓고 처자를
데리고 와서 살도록 타일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듣지않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빨리 죽여달라" 고 항변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심양'의 서문 밖에서 처형을 당하고 시체는 버려졌다.
세 사람은 의리를 지키다 죽은 충신으로 삼학사(三學士)라는 기림을 받았다.
한데 세사람이 목숨과 바꾼 의리는 명나라에 대한 충성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일행은 심양의 궁궐 안에 마련한 질자관(質子館)에서 풍족하게 지냈다.
이들은 1년 동안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냈으나 청나라 쪽에서는 이용가치가 큰 볼모들이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인조가 새로 개각을 단행하여 영의정에 김류, 우의정에 이성구, 이조판서에 최명길, 예조판서에
강석기, 호조판서에 이경직, 병조판서에 신경진, 공조판서에 구굉 등을 임며하고 좌의정
홍서봉 등은 유임시켰다. 그런데 재상 자리를 맡으려고 그동안 별별 공작을 벌이던 벼슬아치들이
이번에는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며 맡으려 하지 않았다.
김신국은 아들을 청에 볼모로 보내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대 재상의 반열에서 빠지려 하였다.
신경진이 벼슬아치들의 약아빠진 처사에 분노해 소리쳤다.
"쥐새끼 같은 무리가 나라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
김류의 서녀가 포로로 잡혀가게 되어 인조가 용골대에게 이 처녀를 풀어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았다. 김류가 정명수의 옷깃을 잡으며 하소연했다.
"내 딸을 속(贖)바쳐 보내주면 천금을 주겠소."
정명수는 옷깃을 뿌리치고 가벼렸다.
이 일로 영의정이 포로의 속 바치는 값을 올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북쪽으로 끌려간 포로 가운데는 양반붙이 만이 아니라 기술자, 노비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포로는 전리품 중에서도 가장 값이 나간다.
포로는 군사로 징발되어 특별부대에 편입되기도 하고 척박한 땅에 투입되어 농사를 짓기도 했다.
예쁜여자는 첩이나 심부름꾼으로 뽑혀갔다.
돈을 내면 포로를 찾아올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조정에서 은 100냥을 내어 역관을 시켜 찾아온 경우도 있는데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었다.
그나마 나라에서 신경을 써주는 포로는 공신 가족에 국한되었다.
일찍이 정묘년에 화의를 약속할 때에는 한 사람에 해당하는 값이 겨우 옷감 10여 필이었습니다.
이번에 듣자하니 유림이 공유덕, 경중명과 더불어 10냥으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저들은 정한 값은 본디 눅었습니다. 점점 값이 오르게 된 것은 값을 치르고 찾아오려는 사람들이
자기 혈육값을 치르고 찾아오는데 급급해서 값이 많고 적은가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아
높은 값을 요구하는 폐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 값으로 수백 냥을 치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가난한 백성은 끝내 갚아낼 길이 없을 것입니다.('인조실록' 15년)
이 기록은 평안도 병사 유림이 명나라 출신의 청의 장수와 포로의 몸값을 흥정한 사실을 알려준다.
이처럼 장수들은 너도나도 포로를 소유하고서 장사을 하고 있었다.
최명길은 누루를 막론하고 100냥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조치하되 어기면 엄중히 처벌하고,
만약 더 요구하면 버리고 오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주지 않아야 값이 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뒤부터 사신들은 이 방침에 따라 흥정을 벌였다.
그 뒤 조정에서 은 2500냥을 신계영에게 들려보내 임금을 호종한 군사들의 가족을 데려오게 했다.
한데 그 숫자가 700여 명이나 되어 자금이 턱없이 모자라서 비상용으로 준비한 은을 더 풀었으나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여기서 잠깐 환향녀(還鄕女)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고저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이 병란으로 말미암아 재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많은 양민과 부녀자들이 볼모로 끌려가 갖은 치욕과 고통을 당하고 그 곳에서 죽기도 했다.
특히 이 때 청나라 군대인 되놈들에게 전리품으로 끌려갔던 여인들 중 속전(贖錢)을 물거나 도망쳐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을 일컬어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던 것이다.
이 환향녀가 변해서 오늘날 '화냥년' 이 된 것이다.
당시에 되놈들에게 강제로 끌려간 많은 부녀자들은 그들에게 성적인 굴욕을 당했기로
더럽혀진 몸으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왔다가 가문의 손상된 명예와 주변의 눈살 때문에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여인들이었다.
옛 어른들은 여인이 싱겁게 웃으면 "웃긴! 되놈한테 업혀갔다 왔나" 하고 곧잘 나무랐다.
우리 옛글 속에는 싱겁고 허튼 웃음을 '환녀함소'(還女含笑)라 했다.
여기에서 환녀란 정묘, 병자호란 때 전리품으로 되놈들한테 업혀갔다 돌아온 환향녀다.
돌아온 이 여인들이 오랜만에 만난 부모 형제를 보고 통곡은커녕 야릇한 웃음을 띠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만남의 희열을 표출하기에는 몸을 버린 데 대한 도덕적 중압이 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흔히 자신의 과실을 무력화하려할 때 사람들은 곧잘 웃는다.
길을 가다가 자칫 넘어지면 행인에게 야릇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듯이....
그리고 당시 사회는 그녀들를 받아들일 만큼 가문의 명예나 사회의 도덕이 너그럽지 못했다.
그러므로 날이 새기 전에 되돌아가야 할 야릇한 운명이 복합되어 자아낸 웃음이 바로
'환녀함소' 인 것이다.
이러한 슬픈 역사적 배경을 지닌 환향녀가 그 뒤 정조관념이 희박하여 외간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갖은 여인을 지칭하는 '화냥년' 이라는 말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로 북쪽 지방에 사는 여인들의 피해가 컸다.
특히 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미인이 많아 벼슬아치나 양반의 처 까지도 끌려갔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 중 대부분 돌아올 수 없었으나, 많은 돈을 주고 돌아온 여자들도
‘환향녀’ 로 불리면서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처럼 암울한 역사의 산물인 환향녀는 신분사회에서 더 이상 설자리가 없었다.
여기에서 이와 관련된 슬픈 글 하나를 소개하고저 한다.
"......어디를 쏘대다 이제 왔느냐?!
이방인과 생활이 얼마나 재미 있었으면 저고리 고름 손때로 반질하고
헤쳐진 머리칼에 이방인의 숨소리가 아직도 들리느냐?
이러고도 사립 슬그머니 열고 타달 타달 들어 온 즉 어찌하겠다는 것이냐?!
네년의 몸에선 서방의 흔적은 간 곳 없고 이방인 발자국만 남았으니
차라리 그곳에서 뒈져야지, 왜 왔느냐?!
네년이 아니면 누룽지 못 먹고 두레박질 못 할 줄 아느냐?
어찌 더러운 몸으로 조상을 뵈며 정한수 한 그릇 떠 기도할꼬....
오지랍 눈물 떨구는 네년 모습 가련타 마는 용서 할 수 없는구나!
돌아갈 곳 어디메뇨, 네 에미 있는 곳 아니냐?
서방님 골이나 욱대기시는 말씀, 죄 많은 이년 어찌 모르리이까.
살아도 여기서 살고, 죽어도 여기서 죽을 것이오니,
제발 외인이 된 이년을 친정으로 가란 말씀 거두시고 한 말씀 들어 보소서.
타향에 있을 적에 서방님 그리워 몸부림 친 날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
밤마다 흘린 눈물, 저 달 속에 담았고 예까지 오다가 흘린 눈물, 피가 되어 땅을 적신즉,
원하옵시면 가져다가 서방님 가슴에 얼룩이 되도록 뿌려 드리오리다.
고향 떠나 낯선 곳, 어두운 그늘에서도 어찌할 수 없어 이방인에게 몸을 버려 혀를 깨물고
싶었으나 모진 목숨 지탱하여 예까지 온 것은 서방님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온 데..
하지만, 이제, 꿈에도 그리운 서방님 뵈었으니 지금 이슬 되어 이 집 귀신이 되다한들 여한이 없음이여..
부디, 분이 풀리지 않으시면 이년 죽여 까마귀 밥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 죽음이 다가와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 한들 서방님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으리오......"
전쟁 후 국내 문제는 더욱 꼬였다.
거리에 널려있는 시체를 치워 장사를 지내고 쌀을 풀어 기민을 구제하고 거리에서 떠도는 고아를
부잣집 종으로 보내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공물을 줄이거나 탕감했다.
식량공급은 남도에서 맡았다.
남도에서도 연이어 식량을 실어 보내는 바람에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식량을 확보할 수 없었다.
봄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 보리농사를 망쳐 굶주려 죽은 자들이 길가에 널브러졌다.
끌려가서 밥이라도 얻어먹는 포로의 신세가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었다.
4월에 탁탁귀(啄啄鬼)가 나돈다는 소문이 돌아 도성 사람들을 동요시켰다.
피란갔던 사람들과 패잔병들이 서울로 모여들어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남녀가 떼를 지어 모여서 울부젖으며 더러 총을 쏘기도 하고 더러 놋그릇을 쳐대며 소란을 피웠다.
벼슬아치들은 민란이 일어날까 염려해 군복을 입고 대궐에 나올 정도였다.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들떠 있었다.
더 심각한 사태는 조정에서 전쟁의 공과를 따지려고 다툼이 벌어지고 척화파와 주화파의
새로운 대결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어떤 조건에서도 꼬투리가 잡히는 사람들을 가려내 죽이기고 하고 유배를 보내거나
벼슬을 떼기도 했다. 그 보기로 다음 두가지 사건을 들어본다.
윤황은 늙은 몸으로 강화도에서 종묘의 신주을 보호하느라 온 힘을 기울였으나 끝내
몽골 군사에 의해 신주가 더럽혀지거나 유실되었다.
그에게 집중적으로 비난이 쏟아졌다.
"나라를 배반하고도 죽지 않고 임금을 저버리고 나라를 팔아먹었으며 신하로서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
윤황이 신주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과 적에게 항복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지적이다.
윤황은 김상헌 등이 청나라로 잡혀갈 때 자신도 척화를 주장했다면서 대신 볼모로 가겠다고
자청했던 사람이다.그는 간신히 사형을 면했으나 뒷날 끝내 유배되었다.
그의 큰 아들 윤문거는 남한산성에서 충성을 다했고, 그의 작은 아들 윤선거는 강화도로 들어가서
항거하다가 아내는 자결하고 그는 탈출에 겨우 살아남았다.
온 집안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었는데도 그는 평생동안 비난에서 벗아나지 못했다.
장신의 경우는 더욱 처절했다.
장신이 강화도에서 도망쳐 살아남았다 해서 그를 감옥에 가두고 책임을 추궁했다.
논의끝에 사형에 처하지 않고 스스로 목을 매 죽으라고 관대하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감옥에서 나오는 날 장신은 소주를 많이 마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의 형 장유가 겨우 말위에 앉혀서 사람이 살지않는 자기 소유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장유는 죄인을 본채에서 죽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고서 행랑채로 보내 목매 죽게 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장유가 동생을 죽은 것처럼 가장하고 살려 빼돌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임금이 경연에서 강의를 받을 때 한 신하가 이 사실을 고해 바쳤다.
장유는 "동생의 무덤을 파서 관을 열고 시체를 검열하라" 는 글을 올리면서 사실이 밝혀지면
거짓 소문을 퍼뜨린 사람을 처벌해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이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거짓 소문은 주화파에 가담한 장유에게 타격을 입히려는 모략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누구는 도망쳤고 누구는 항복했으며 누구는 항거했다는 따위의 고발과 찬양이 잇달았다.
패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어떤 잘못된 전술을 썼든, 싸우다가 몸을 던졌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간에 죽은 자들만이 죄를 면하고 공신이 되어 명예를 누렸다.
그들은 바로 민영, 최진립, 홍명구, 김상용 등이다.
다음에 처리할 문제는 청군의 가도 토벌을 돕는 일이었다.
가도에는 명나라 총병 심세괴가 군사와 그 가족, 장사꾼 등 1만여 명(5만여 명이라고도 함)을
거느리고 있었다. 마부대는 약속대로 조선 군사의 동원을 지시했다.
인조는 유림을 주장(主將)으로 임경업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보내면서 전선 50여 척을 동원했다.
청군 측은 여진인,중국인,조선인으로 구성된 혼성부대였다.
마부대가 유림과 임경업에게 가도의 지형과 공격전술을 물었는데 두 사람은 머뭇거리면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3월 9일, 가도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지만 조선군은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마부대가 위협하자 그때서야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임경업이 군사를 이끌고 가도 가운데로 들어가자 명군은 배를 타고 바다로 달아났다.
하지만 곧 추격병의 칼날아래 속속 쓰러졌다.
일부 사람만이 대여섯 척의 배로 도망치고 섬 안의 사람들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심세괴도 잡혔으나 항복하지 않고 칼날을 받았다.
공격 개시 5일 만에 손쉽게 가도를 점령했다.
조선군은 처음과는 달리 약탈행위를 서슴치않고 해댔다.
명군에 대한 반감의 표시라기보다는 단순히 전리품을 챙기려는 욕심에서였다.
가도가 점령당할 때 명군 중군도독부의 도독 진홍범은 장산도에 주둔하면서 구원군을 보내지 않고
방치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명군의 기지가 된 지 25년 만에 가도를 되찾았지만 명나라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이라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청군이 임경업에게 포로 250명을 주었는데 그는 조선인 포로와 바꾸어 돌아왔다.
청군이 유림의 전공을 인정해 상을 주려고 불렀으나 조정의 눈치를 살피며 가지않아
그는 청군에 의해 백마산성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오히려 가도 점령으로 명나라와 통하는 길이 막혀버린 사태를 우려했다.
이제 육지에 이어 북경으로 가는 뱃길마저 막힌 것이다.
조정에서는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사실을 적어 명나라에 보고하려 했으나 이 사실이
청나라에 발각될까봐 주저했다.
그뒤 가도가 함락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릴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진홍범이 먼저
글을 보내왔다.진홍범이 보낸 사자는 서울로 들어오지 못하고 조선의 어선을 만나 글을 전달했다.
진홍범은 심세괴를 대신해 임경업을 총병으로 임명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합동으로
청군을 공격하자고 제의했으며, 소량의 화약과 군량미를 보내왔다.
비변사에서 그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진홍범이 합동공격을 요구한 부분은 허장성세를 부려 화단을 막으려는 계책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적당히 회답편지를 써서 사신을 통해 보내지 말고 선천과 철산 고을에 보내 명나라 쪽에서 사람이 오면
전달하자는 의견을 냈다.비공식 통로로 전달하자는 뜻이었다.
또 선천과 철산 고을에서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동안의 사실을 명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말로 알리되, 이런 내용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청군은 철수한 뒤에도 우리나라가 명나라 사람과 내통하는지 의심해 자주 첩자를 보내 정탐하고 있다.
만약 너희들이 오는 이유를 알면 또 사단이 일어날 것이다.
이 편지를 가지고 빨리 들어가되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쳐 우리나라가 다시 적의 침략을 받지 않게
조치할 것이다.('인조실록' 15년)
이어 비밀히 임경업을 청나라에 보내 실정을 진술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조선 외교의 전환을 의미한다.
광해군의 외교술을 뒤늦게 좇는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런 일이 순탄하게 넘어갈 리가 없다.
김상헌은 조정에서 나와 고향 안안동에 살면서 사태의 귀추를 엿보다가 글을 올려 그동안
주화파가 벌인 행태를 낱낱이 지적하였다.
아, 협박과 강요에 따라 맺은 일시의 언약은 믿지 말고 지난날 큰 나라로부터 입은 크나큰 은혜를
잊지 말며, 호랑이나 이리가 위장한 인자함을 지나치게 믿지 말고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와의 관계를
경솔하게 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전하를 위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충고의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선왕이 황제에게 올린 글에서, 강물이 천만 번 꺾여도 틀림없이 동쪽으로만 흐른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인조실록' 15년)
하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이해 4월 부터 정식으로 공문서에 숭정(崇禎)이라는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숭덕(崇德)이라는
청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일본에서 국서를 보내왔는데 예전의 관례를 깨고 자기네 연호를 써서 보냈다.
"너희 나라가 이미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를 섬기니 우리 연호가 어찌 청나라의 아래에 놓이겠는가?"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제 해마다 명나라로 가던 사절은 길을 바꾸어 심양으로 달려갔다.
그쪽에서도 정기 사절은 물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조선에 사절을 보냈다.
청나라는 때로 예물을 탕감해 주기도 했으나 양곡만은 약속한 1만 포에서 조금도 줄여주지 않았다.
1640년(인조 18년)겨울에는 청나라에 볍씨 종자를 보내주었다.
드넓은 만주벌판에서는 밀을 주곡으로 생산했으며, 옥수수,조 따위의 잡곡을 생산하는
초기 농업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우리의 볍씨를 받아 쌀을 이때 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느닷없이 태종이 머무르며 항복식을 치른 삼전나루에 태종의 공덕비를 세우라고 강요했다.
다시 말하면 청나라 전승비를 조선의 경비와 공력을 들여 세우라는 것이었다.
계속 미적거리다가 청나라 사신 마부달이 나오는 시기에 맞춰 공덕비 공사를 서둘렀다.
이 와중에 수군 5천 명을 보내 명 정벌을 도우라는 요구까지 빗발치고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우선 공덕비라도 세워놓고 이를 거절하려는 속내도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먼저 비문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이쪽에서 빨리 보내주지 않자 불같이 독촉했다.
마침내 인조가 문장가 장유, 이경석, 조희일에게 하룻밤 사이에 지으라고 분부했다.
세 문장가가 밤을 새워 지은 세가지 비문을 심양에 보냈는데 청나라는 "제후끼리 서로
침략하는 구절이 들어있다."(조선과 청나라가 싸운 사실)거나 "공덕을 찬양함이 매우 소략하다"
는 말로 트집을 잡았다.
문사들은 이 비문을 짓지 않으려고 서로 미루었다.
인조는 장유가 마침 죽고 없어 이경석에게 이 일을 맡겼다.
이경석은 고심을 거듭하다가 마지못해 글을 지어 올렸다.
비문 맨 앞에 '대청숭덕 원년' 이라고 쓰고, 청태종의 영웅적 공덕을 찬양하는 구절로
본문을 채운 후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차가운 뿌리에 다시 봄이 오도다.
우뚝한 돌비석이 큰 강의 머리에 섰도다.
삼한에는 만세토록 황제의 덕이 남으리로다.(병자록)
청나라 사람들은 이 비문을 보고서야 만족을 표시했다.
청나라는 이 글을 여진문자(만주어)와 몽골문자로 번역해 보내주었다.
마부달은 12월에 조선으로 나와 비석 공사현장을 돌아보고 흡족해하면서 나머지 공사를 감독했다.
이 비석은 거대하고 화려하게 꾸며졌다.
높이 395 cm, 너비 140 cm의 비에 '대청황제공덕비' 라 새기고 왼쪽에 몽골문자,
오른쪽에 여진문자, 뒤쪽에는 한문으로 새겨넣었다.
단청으로 화려하게 꾸민 비각을 지어 비를 그 안에 놓고 주변에는 담을 둘러쳤다.
이 거대한 비는 오욕의 상징으로 남아 숱한 욕질을 받고 풍상을 겪으며 지금도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삼전도비는 세 나라 문자로 세워진 우리나라의 유일한 비인데 청나라가 멸망당할 무렵 한 때
땅에 묻히기도 했다.
이경석과 그 후손이 소론 계열로 활동할 때는 노론이 이 비문의 내용을 들고 나와 수많은 지탄을
퍼부어서 당쟁의 이용물이 되기도 하였다.
청나라는 1637년 여름부터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필요한 지원군 5천 명을 보내라고 강요했다.
항복조약에 포함된 것을 이행하라는 것이지만 조선은 이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주화파인 최명길도 이 요구만은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며 자신이 거절하는 사신으로 나가겠다고 자원했다.
그가 두차례나 심양에 들어가 여러 가지 국내 사정을 들어 중지해 달라고 요구해 겨우 무마되었다.
이즈음 대동강가를 경비하던 군사가 강가를 어슬렁거리는 중 한 사람을 잡아왔다.
그 중의 이름은 독보였다.
평안병사 임경업이 이 사실을 최명길에게 알려 최명길이 독보를 만났다.
이 자는 본디 조선사람으로 조청전쟁 당시 가도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명나라로 들어가
홍승주의 군문에 투신해 부하가 되었다.
이때는 명나라 군사의 신분으로 조선의 사정을 정탐하기 위해 파견된 간첩이었다.
최명길은 독보를 첩자로 역이용하기로 마음먹고 명의 숭정제와 홍승주에게 이쪽의 사정을 알리는
글을 독보에게 들려보냈다.독보는 4년동안 은밀하게 활동했다.
그러다가 홍승주가 송산전투에서 패전하고 청나라에 항복한 뒤 사건의 전모다 탄로나는 바람에
최명길이 심양으로 잡혀가게 되었다.
청나라는 조선 지원군 파견이 실현되지 않자 날마다 독촉하는 사신과 글을 보내왔다.
소현세자에게는 태종의 친정길을 따르라고 지시했다.
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청군이 다시 침입할까봐 걱정을 했다.
1640년 조정에서 마침내 지원군 파견을 결정하고 평안병사 임경업을 상장으로, 황해병사 이완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1500여 명을 딸려보냈다.
이와 함께 군량미 1만여 석을 32척의 배에 실어보냈는데 폭풍을 만나 군량미를 전부 잃고
인솔 군인과 사공 260여 명이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장수와 군졸들은 지원군에 뽑히는 것을 죽는 것으로 여겨 기피하거나 도먕쳤다.하지만 청나라에서
군사들의 대우를 후하게 해주고 약탈한 물건을 나누어 준다는 소문이 국내에 널리 퍼져 다음해에
포수 1천여 명과 기병과 말구종 1천여 명을 뽑아 보낼 적에는 지원하는 군사가 몰려들었다.
이렇게 청부전쟁이 아닌 지원전쟁에 나서면서 나라살림은 피폐해지고 민생은 더욱 허덕였다.
청나라는 지원군 파견을 반대하는 척화파를 잡아 보내라고 공갈 협박을 해댔다.
조정에서는 마지못해 1640년 겨울 김상헌을 비롯해, 소를 올려 청나라에 보내는 예물과 군량미와
군사 지원을 반대한 조한영, 채이항 등 세 사람을 보냈다.
일행은 심한 문초와 고문을 받은 뒤 심양의 북관에 갇혔다.
북관은 사형수를 가두는 곳이다.
그들이 이렇게 위협을 가한것은 조선을 길들여 지원군 파견을 원활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한편 청태종은 북경의 관문인 난공불락의 산해관을 점령하지 못하자 산해관을 바깥에서 지원하는
금주,송산 등의 성을 먼저 점령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효과적이라 판단했다.
송산성에는 북쪽 국경 지대 방비의 총책을 맡은 총독 홍승주와 오삼계 등의 장수가 13만 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진을 치고 있었다.
태종은 심양에서 명군이 송산성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고 연신 코피를 흘리면서도 부랴 부랴
그쪽으로 달려갔다.신속하고 능동적인 작전이었다.
홍승주는 지구전을 펼치면 군량과 군수품 확보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주장에 따라 속전속결의
전술로 나왔다. 이는 태종이 바라는 바였다.
청군은 일시에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5만 4천여 명의 명군을 섬멸했다.
주둔군의 절반 가량을 죽음으로 몰았으니 엄청난 승리였다.
송산성이 함락되자 오삼계는 도망치고 홍승주는 항복했다.
송산성 함락으로 주변의 세 성이 손쉽게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제 산해관은 외로운 고성이 되었다.
이 승리의 소식으로 북경 이북의 민심이 크게 흔들리고 이곳을 지키는 군사도 크게 동요해
투항하는 장수와 군사, 그리고 백성들이 줄을 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조선군은 눈치껏 싸우는 척하다가 슬슬 꽁무니를 뺐다.
한 예로 군졸 이사룡이 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명군의 장수 조대수와 맞닥뜨렸을 때
총에 탄환을 다 빼내고 헛총질만 해대는 통에 이 사실이 발각되었다.
청군은 여러번 충고했으나 그래도 고치지 않아 마침내 죽이고 말았다.
명군은 이 사실을 전해듣고 '조선의사 이사룡' 이라고 쓴 장대를 내걸어 사기를 돋우려 했다.
인조는 2년 뒤에 이 사실을 알았다.
"속국의 군졸로서 명나라 대장을 위해 의리를 지키고 절개를 세워 우뚝 동쪽 나라의
밝은 빛이 되었으나 군졸이어서 포상의 은전을 내리지 못했다"
임금이 그에게 성주목사를 제수하고 후손을 찾아 벼슬을 주었다.
참으로 한심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하겠다.
청군에게 항복한 명나라 장수 홍승주는 이제 새 주인에게 작은 공이라도 더 쌓아야
출세가 보장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조선에서 중 독보를 명나라에 보낸 일과 선천부사 이규가
명나라 배에 몰래 양곡을 공급한 일 따위를 고자질 했다.
청나라는 즉각 이규를 잡아들였다.
이규는 겁에 질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불어버렸다.
기회를 잡은 청나라는 조선에 연루자를 잡아 보내라고 통고했다.
조정에서는 쩔쩔매며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최명길은 사실이 밝혀지면 더 수습하기가 어렵다며
일을 진행한 이규, 임경업 두 사람을 죽게 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정에서는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서 최명길이 공술하기 위해 먼저 길을 떠났다.
최명길은 봉황서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는 임금과 대신은 모르는 일이며 영의정인 자신이 혼자 추진한 일이라고 우겼다.
이규는 신익성, 이명한,이경여 등 척화를 주장한 벼슬아치를 고해 바쳐 이들도 끌려가
혹독한 신문을 받았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뒤에 명나라가 멸망당한 후에야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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