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54
병자 호란(12)
 글쓴이 : …
조회 : 734  
-산성의 마지막 전투

고대하던 구원병이 이르지 않자 성안 사람들은 한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임금은 알고 있었다.
이즈음 유도대장 심기원이 어려운 통로를 뚫고 납서를 보내왔다.
"서울에 적군 오륙백 명이 주둔하고 아군은 겨우 270여 명뿐인데 화공전술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부분 이 보고가 흰소리라는 것을 짐작했으나 성안 사람들의 용기를 돋우는 효과를 가져왔다.
강화도에서도 무사하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29일 아침, 날이 밝기를 기다려 김류는 일전을 벌일 것을 결심하고 총수 300여 명을 뽑아 북문으로
내보냈다.자신은 북문 문루에 대장기를 세우고 앉아 북을 치면서 전투를 독려했다.
아군은 북문에서 비탈길을 타고 내려왔다.
적군은 성 아래 곳곳에 복병을 깔아놓고 있었다.
송성 바깥에 있던 기병 100여 명이 후퇴하면서 조선군을 유인하려고 하고 초막에 군졸 몇 명과
마소 몇 마리를 남겨두었다.
김류가 대장기를 흔들며 진군을 지시했으나 아군은 머뭇거리며 산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김류의 지시를 받은 비장 유호가 한 군졸을 도끼로 난도질했다.
자극을 받은 아군 300여 명이 산밑으로 내려가 적군이 남겨둔 마소를 차지했는데 적군은 못 본 체 했다.
아군이 평지까지 내려가 각개전투를 벌였다.
김류가 화약과 탄환을 아끼기 위해 대포와 조총을 한 번 쏠 때마다 화약과 탄환을 지급하자고 해서
군졸들은 한 번 쏠 때마다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숨어있던 적군 기마병이 날쌔게 달려나오고 복병이 사방에서 쏟아져나와 공격을 퍼붓자
아군은 대항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죽어넘어졌다.
아군은 유호를 포함해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나 적군의 사상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김류는 패전의 책임을 북성을 지키는 부장 원두표에게 돌리면서 그가 빤히 전투를 지켜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홍서봉이 "주장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될 일인가?" 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장인 김류는 용서받았으나 부장인 원두표는 죽음 직전에 이르도록 곤장을 맞았다.
이 일로 군졸들은 사기를 잃고 출전하지 않으려 했다.
이 싸움이 실제로는 산성의 마지막 전투였다.

상황은 더 불리한 쪽으로 기울었다.
이날 성밖에서도 큰 전투가 벌어졌다.
충청감사 정세규가 군사 8천여 명을 이끌고 죽산을 거쳐 헌릉 아래에 이르렀을 때 적군이
앞길을 가로막아 험천 고개에 진을 쳤다.
적군의 선봉이 군진 앞으로 도발해와서 전투를 벌였는데 감자기 뒤쪽에서도 적군이 밀고들어왔다.
10여 차례에 걸쳐 공방전을 벌인 끝에 탄약이 떨어져 전열이 무너지고 공주영장 최진립 등
장수 여러 명과 많은 군졸들이 전사했다.
정세규는 부상을 당해 바위 아래로 굴렀으나 살아남아 도망치고, 남은 군사는 수원으로 후퇴했다.

태종은 4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29일 서울에 이르렀다.
유도대장 심기원은 그동안 구석진 곳에 움츠리고 있다가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몰래 성을 넘어
광릉으로 도망쳤다.

태종은 마부대, 용골대에게는 남한산성 공략과 항복의 임무를 맡기고 , 도르곤에게는
강화도 공격을 맡겼다. 섣달 그믐날 청군은 동작나루를 거쳐 헌릉 쪽으로, 뚝섬나루를 거쳐
송파 삼전포 쪽으로, 광나루를 거쳐 천호동 쪽으로 나누어 진군하여 서서히 남한산서의 삼면을 포위했다.
솜뭉치처럼 큰 눈이 펄펄 내리는 날이었다.
남한산성 밑으로 새까맣게 몰려드는 적군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 람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침 행궁 남쪽에 서 있는 나무에 까치가 둥지를 트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길조라고 말하며
애써 위안을 삼을려 했으나 성안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눈이 그치자 날씨가 한층 추워졌다.
임금에게 올린 제야의 저녁상에는 닭다리 하나가 달랑 올려져 있었다.
인조는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처음 성안으로 들어올 때는 뭇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구나."
한 해의 마지막 날, 아군은 더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1637년 설날, 청군은 탄천에 군진을 펴쳤다.
설날을 구실삼아 행궁에서는 어렵사리 마련한 설빔을 적진에 보내 적의 동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사자가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용골대에게 갔는데 그는 설빔을 거절하고 청태종이 도착했다는 것과
여러 곳에서 조선군을 공격한 사실을 알렸다.
이날 오후 청군은 누런색 양산 두 개를 펼치고 두 개의 큰 기를 앞세워 대포를 쏘고 북을 울리며
동쪽으로 올라와 성안을 내려다보았다. 누런 양산은 태종의 행차를 의미한다.
성위에 있던 아군은 이 광경을 바라보며 벌벌 떨었다.적군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갔다.

이튿날 인조가 대신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태종이 정말 왔는지, 강화를 먼저 제의할 것인지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인조는 분분한 의견을 누르고 원로인 홍서봉, 김신국 등을 적진에 보냈다. 일행은 용골대를 만나
인조의 뜻을 전했다.

"황제가 바람과 눈을 무릅쓰고 멀리에서 이르렀으니 10년 형제의 의리로 보아 배려가 없을 수 없어
우리 임금께서 저희들을 보냈습니다."

이들이 청나라의 글을 받아왔는데 예전에 '국서' 라 일컫던 관례를 깨고 황제의 격식에 따라
'초유'(招諭)라고 썼다.

너희들이 집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일이나 잘할 것이지 망령되이 날뛰다가 우리의 칼날을 맞지말라.
항거하는 자는 죽이고 복종하는 자는 포섭하고 도망치는 자는 사로 잡겠노라.
도성안에 있거나 시골에 있거나 마음을 바꾸어 귀순하는 자는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잘 돌볼 것이니 너희 무리에게 알려 모두 듣고 알게 하라.('인조실록' 15년)

척화파는 불태워 버리라고 주장했고 주화파는 "이 말을 따르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맞섰다.
최명길이 회답의 글을 짓고 홍서봉이 들고 갔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죄를 짓고 스스로 전란의 꼬투리를 불러와 외로운 성안에 피신해 있지만
당장 위급한 형편입니다. 지난날의 일에 대해서는 작은 나라가 이미 그 죄를 알고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뉘우치면 용서해주는 것은 큰 나라가 하늘의 뜻을 체현해 만물을
포용하기 때문입니다.('인조실록' 15년)

이 글에서는 황제라고 똑바로 썼으나 척화파의 반대에 부딪쳐 아직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신(臣)이니 폐하(陛下)니 하는 용어도 쓰지 않았다.
사관은 "비굴한 말과 아첨하는 어구를 쓰지 않은데가 없어서 보는 사람마다 분해 팔을 걷어붙이고
눈물을 흘렸다" 고 썼지만 조정에서는 이때까지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요구는 완전 항복이었다.
용골대는 이 글을 받고 왕자들이 이곳으로 오면 상의해 알려주겠다고 통고했다.

이렇게 필설로 밀고당기는 사이에 성 외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러졌다.
경상도 군사 4만여 명이 2일 광주의 쌍고개(雙嶺)에 이르러 진지를 구축했다.
이들은 척후를 보내지 않아 청군이 몰려와 포위작전을 펴는 것을 전혀 몰랐다.
아군은 적에게 조총을 쏘아대다가 화약이 떨어져 화약을 달라고 소리쳤다.
가까이 접근한 적군 측에서 이 말을 알아듣고 목책을 넘어와 세차게 공격을 퍼부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화약심지가 옆에 쌓아둔 화약에 옮겨붙어 폭발하는 바람에 숱한 군사들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이 전투에서 경상우병사 민영이 죽는 등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남한산성에는 접근도 하지 못했다.

5일에는 전라병사 김준룡이 거느린 2천여 명의 군사가 용인 광교산 아래에 이르렀다.
이 부대는 남한산성에 공급할 양곡과 말먹이를 에워싸고 진군했다.
정찰병이 적군이 다가온다고 알려 광교산으로 올라가 군진을 벌였다.
김준룡이 적군의 동태를 살피며 골짜기 요소요소에 복병을 숨겼다.
제1선에는 포수, 제2선과 제3선에는 사수와 살수를 배치했다.
산 근처에 접근한 청군이 일제히 정상을 향해 뛰어오르는 순간 김준룡이 북을 울리고
기를 흔드는 것을 신호로 복병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적군이
수많은 시체를 버리고 후퇴하자 사수와 살수가 돌격해서 활을 쏘고 창칼로 공격했다.
다음날 청군의 장수 양구리가 금가면을 쓰고 동남부 진영을 돌파하면서 앞장서서 올라왔다.
숲속에 숨어 있던 포수가 총을 쏘아 양구리를 넘어뜨리자 적군은 우왕좌왕하다가 물러났다.
모처럼 기세를 올리던 아군은 양곡과 탄환이 떨어져 포위망을 뚫고 수원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가 조청전쟁 기간 동안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싸움이었다.
이 전투보고가 남한산성에 전해지자 성안 사람들은 활기를 찾고 고수전을 펴기로 했다

강원도 군사는 금단산에서 적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해 용진에 이르러 북쪽에서 내려오는 군사와
합류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함경도 군사는 금화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종 서흔남과 승병 두청이 청군 몰래 부지런히 성을 드나들며 임금의 지시문과 바깥 장수들의
보고서를 전달했다.
마침내 이 사실을 눈치챈 청군이 송성을 엄격하게 지키며 이곳 저곳에서 올라오는 근왕병을
차단하는 작전을 강화했다.
시일이 지날수록 청군은 초기와는 달리 사방으로 흩어져 노략질을 해댔다.

9일, 양식을 점검해보니 겨우 2800석이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며칠 버틸까 말까 할 정도의 분량이었다.
행궁에서는 그 동안 몇 번이나 강화를 요청하는 글을 보냈으나 청군 쪽에서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는 구실을 붙여 번번이 거절하고 회답 글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열흘이 훌쩍 지났다.
다급해진 나머지 최명길이 지은 글을 태종 앞으로 보냈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데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백성의 목숨을 살려주고 위험에 처한 종묘와 사직을 구해줄 경우에는 군사를 동원해
어려운 고비에서 구해준 것이나 군사를 철수해 나라를 보존케 한 것고 그 처사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베푼 은혜로 말하면 똑 같습니다.('인조실록' 15년)

이제는 글 전체에 '황제' 라는 용어를 쓰면서 '형제의 나라'를 강조했다.
이때에 '대청' '황제' 라는 용어가 암묵적인 양해 사항이었다.
이번에도 김상헌이 명나라와 청나라를 동격으로 다루었다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대로 보냈다.
하지만 이 글을 들고 간 홍서봉이나 최명길은 공갈 협박만 받고 되돌아왔다.
예전 유해에게 뇌물을 쓴 결과 효과를 보았다는 의견이 있어 중간 연락자에게 뇌물을 쓰기로 결정했다.
행궁에서는 화친을 성립시켜주면 정명수에게 은 1천 냥, 마부대와 용골대에게 각각 3천 냥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후불이었다.
이것이 효력을 발생했는지 용골대가 "황제에게 알려 회답을 보내주겠다" 고 약속했다.
홍서봉은 돌아와 성급하게 "화친이 성립되었다" 고 소리쳤다.

16일을 전후로 세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홍서봉이 회답 글을 받으러 갔을 때 마부대는, 중국군 부대가 군사 7만 명과 홍이포 28문을 가지고
왔으며 앞으로 강화도를 공격할 작정이라고 알려주었다.
청군은 망월봉 아래에 완전 항복을 권유하는 '초항'(招降) 두 글자를 쓴 흰 기를 꽂아놓았다.
성안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다가 세찬 바람에 깃대가 꺾이자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새로 임명된 도원수 심기원이 보낸 군관이 성안으로 들어와 외부의 사정을 알리는 글을 올렸다.
거기에는 경상도와 충청도 군사가 패전한 사실과 함경도 군사 2만 3천여 명이 양근의 미원에,
평안도 군사 800 여 명이 안협에 집결해 있다는 소식이 들어 있었다.
북쪽 군사는 함경감사 민성휘와 남병사 서우신이 거는리고 내려왔다.
성안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이미 때늦은 구원이었다.
청군이 성문에 다가와 황제의 글을 받아가라고 알렸다.
그 글은 협박 그 자체였다.

"만약 너희 나라가 우리나라의 판도에 들어오면 내가 어찌 어린애를 품어서 키우듯이
편안하게 살도록 돌봐주지 않겠는가. 살고 싶거든 빨리 성에서 나와 항복하고, 만약 싸우고 싶거든
또한 빨리 나와 한바탕 붙어 결판을 내자."

상황은 이제 더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최명길이 하루 종일 논의와 수정을 거듭해서 항복의 글을 완성했다.
이번에는 인조 자신을 신, 태종을 황제폐하라 불렀으며 청나라 연호를 썼다.
김상헌이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예조판서이니 관례대로라면 그의 손으로 글이 이루어져야 했다.
국서가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행궁으로 들어온 김상헌은 최명길이 갖고 있는 종이 두루마리를
빼앗아 읽어보고는 그 자리에서 북북 찢어버렸다.
최명길은 묵묵히 찢어진 종이를 모아 베껴 썼다.

"찢은 사람도 충신이고 주워모아 다시 쓴 사람도 충신" 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누가 나라를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을까?
왜 미리 가래로 막을 일을 둑이 터질 때까지 놔두었을까?
명분과 실리 사이의 괴리는 이토록 엄청만 결과를 가져왔다.
김상헌은 부르르 떨면서 임금앞으로 나아가 통곡을 해댔다.

"제가 국서를 찢었으니 죽여 주소서."

이 자리에 있던 임금과 세자가 울고 다른 신하들도 함께 흐느꼈다. 어쨋든 대세는 주화론 쪽으로
흘러갔다.그 글에서 인조는 거듭 항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명나라에 대한 의리는 들먹이지 않았다.

지금의 소원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예전의 그릇된 습성을 쓸어버리고 온 나라가
황제의 분부를 받들어 여러 제후와 같은 반열에 서는것 뿐입니다.
참으로 불안한 심정을 곡진히 살펴주시어 스스로 개진케 해주신다면 문서나 예절 같은 것은
본디 제대로 시행하는 의식 절차가 있으므로 강구해 시행하겠습니다.
오늘 성에서 나오라는 분부는 하늘과 같이 어진 사랑을 베푸려는 뜻에서 나왔겠지만 겹겹으로 된
포위가 풀리지 않으데다 황제께서 한창 역정을 내고 계시니 이곳에 있어도 죽을 것이고 나가도
죽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때문에 황제의 깃발을 바라보며 스스로 죽기를 작정했으니 사정이
가련합니다.우리는 진심으로 귀순하겠다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지금 만물을 키우는 하늘과 땅같이 모든 사람을 포용하기로 하셨으니 이 작은 나라도
어찌 온전히 살려주고 길러주는 속에 들 수 없겠습니까?('인조실록' 15년)

척화파는 끝까지 반대했다.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습니다."

척화파가 말하는 임금은 물론 명나라 황제를 말한다.
최명길 등이 이 글을 들고 갈 때 하늘이 낮게 가라앉고 끊임없이 눈이 내렸다.
사신들은 아무런 회답도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글 한장이 사태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드듸어 청군이 성안으로 홍이포를 날렸다.
어떤 대포알은 거위 알만하고 어떤 것은 사발만했다.
대포알의 위력앞에 아군은 속속 쓰러져갔다.
청군의 한 무리가 동쪽 성문으로 돌격했는데 함락될 지경에 빠질 즈음 장경사에 주둔해 있던
군사가 달려와 간신히 물리쳤다.

청군은 위협 공격을 퍼부어며 한참 뜸을 들인 뒤 태종의 회답을 보내왔다.
임금이 나와서 항복하라는 것, 척화를 주장한 두세 명을 묶어 보내라는 것이 요구 조건이었다.
조선 측에서는 임금이 성에서 나가 항복하는 것을 거절했다.

오늘에 와서 성안에 가득 찬 벼슬아치들과 백성들이 위급한 정세를 눈으로 직접 보고는
귀순에 대해서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성에서 나가는 한 가지 문제만은 누구나 "고려 때부터 이런 경우는 없었으니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 않겠다. 만약 큰 나라의 독촉이 이어진다면 이 뒤에 얻을 것이란
쌓인 시체와 빈 성뿐일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지금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장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 이러합니다.('인조실록' 15년)

척화대신을 보내는 일도 앞으로 청나라를 충심으로 섬기면 그들도 복종할 것이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청군은 이 글을 받지 않았다.
결국 비변사에서 척화파의 우두머리로 평양에 있는 홍익한 등을 지목하고 몇몇 벼슬아치가
스스로 척화를 주도했다고 자수했으나 김상헌은 들어 있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스스로 척화파라고 일컫으며 적진으로 가겠다고 요청했다.
항복문서를 바친 뒤 열흘 가량 이어진 줄다리기는 다른 곳(강화도)에서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다.

1월 22일, 강화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처음 봉림대군, 김상용, 윤방 등이 강화도에 들어간 뒤에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삼아 수군을 지휘하게 하고 김경징을 강도(江都)관찰사로 삼아 보냈다.
이어 충청병사 강진흔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들어가게 했다.
두사람은 애매한 직책때문에 지휘권을 놓고 다툼을 벌여 능률적인 전술을 세우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강진흔은 연미정을 지키고 장신은 광성진에 배를 대놓고 있었다.

이들은 청군이 수전에 약해 감히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대비를
소흘히 하였다. 전에 청군이 남한산성에서 빨리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강화를 도륙내겠다고
통고한 적이 있지만 행재소에서는 한강 입구인 갑곶앞에 얼음장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철이라
함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도르곤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김포 맞은편 기슭으로 진출했다.
이 군사들 가운데는 수전에 익숙한 요동 출신의 중국인이 들어있었다.
청군은 김포 건너편에서 갑곶을 바라보며 수백 척의 배를 준비하고 뗏목을 만들었다.
중국 출신 군인들과 조선 사람들이 징용당해 노역을 담당했다. 어김없이 홍이포를 끌고 왔다.

청군은 보름쯤 서둘러 준비를 한 뒤 1월 22일 새벽, 갑곶 연안을 방어하던 조선 전선 7척을 에워싸고
홍이포를 쏘아대며 공격을 퍼부었다.
광성진에 있던 장신이 구원하러 달려왔다가 적선의 기세에 눌려 도망쳐버렸다.
아군이 강진흔의 지휘아래 용감히 대항해 적선 10여 척을 격파했으나 곧 무너지고 말았다.
적군은 강을 건너 밀려들어왔다.
김경징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수들이 이 소문을 듣고 달아났다.
장관(將官)구원일이 달아나는 장신의 목을 베려고 군사를 몰아오자 장신은 이를 알아차리고
되돌아와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미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구원일은 통곡하면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중군 황선신이 유일하게 1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루터 뒷산에서 저항했지만 끝내 떼죽음을 당했다.
적군은 강화성 밖 둔덕에 분산하여 주둔했다.
성안에 있던 벼슬아치들은 뒷문으로 도망쳤다.
봉림대군이 마지막 남은 용감한 군사를 뽑아 성밖으로 이끌고 나가 대항했지만 힘에 부쳐
몇 발짝 못 가서 후퇴했다. 김상용이 남문 문루에 올라가 화약을 앞에 쌓아놓고 상황을 살피다가
사세가 글렀다고 판단되지 주위 사람을 물러난게 하고 화약에 불을 당겨 그 속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그의 곁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열세 살 짜리 손자와 종도 함께 죽었다.

'도르곤'이 보낸 사자가 성밑에서 소리쳤다.

"성을 함락시키는 일은 식은죽 먹기이나 군사를 주둔시키고 기다리는 것은 황제의 지시 때문이다.
황제께서 항복을 허락했으니 급히 담당 벼슬아치를 보내 지시를 받으라."

봉림대군은 "저것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나 화친 문제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으니
시험삼아 만나보라" 고 일렀다.
사자가 적의 진영에 달려갔는데 낮은 벼슬아치임을 알고 대신을 보내라고 돌려보냈다.
그래서 윤방을 보냈다.
윤방이 들어가자 이번에는 늙고 병든 사람이라며 예절은 커녕 시퍼런 칼을 꺼내들고 위협했다.
도르곤은 봉림대군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청군은 왕자의 예를 갖추어 봉림대군을 대우했다.
날이 저물자 도르곤과 봉림대군이 나란히 말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와 양쪽의 군사를 갈라세워
섞이지 않게 하고 무기를 거두어 살육을 하지 못하도로 단속했다.
도르곤은 강화도에 들어와 포로를 모두 풀어주고 봉림대군에게 강화도가 함락된 전말을 적은 편지를
급히 남한산성에 올리라고 요구했고 봉림대군은 이를 따랐다.

"임금께서 황제를 만나보고 곧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대군과 후궁, 재상들도 서울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봉림대군의 보고는 강화도가 함락된 지 사흘 뒤에야 남한산성에 전달되었다.
봉림대군과 비빈 등이 포로의 신세로 도르곤과 함께 서울로 향하자 인조의 처가붙이인 한씨 10여 명이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도르곤은 떠나면서 몽골군을 남겨 강화도 수비를 맡겼는데 이들은 방화,약탈,살육을 마구잡이로
저질렀다. 특히 부녀자를 납치해 강간하거나 보물을 찾으려고 도굴까지 감행했다.
윤방은 종묘사직의 신주 받드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함락될 때에 신주들을 사당밑에 묻어 보관했다.
몽골군사는 이곳을 도굴하면서 신주를 마구 짓밟고 내동댕이쳤다.
그 통에 인순황후의 신주를 잃어버렸으며, 다른 신주들은 칼자국이 나거나 생채기를 입었다.

강화도에 남겨진 벼슬아치, 종실, 내시 그리고 그 가족들은 몽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들 가운데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고 항거하다가 타살되는 사람도 많았다.
선비 출신의 재상 민인백의 아들은 자식 셋과 며느리 셋을 먼저 칼로 찔러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부녀자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 일을 두고 '강화순절' 이라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남한산성에서는 완전항복을 놓고 계속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김상헌은 거적을 깔아놓고 대죄하면서 적진에 나가 죽겠다고 하고 소현세자는 적진에 나가
결말을 짓겠다고 자청했다.
이 와중에 임금이 성밖에 나가지 못하는 사정을 거듭 변명하고 척화대신을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평양에 있는 홍익한을 잡아 보내겠다는 내용을 적어 보냈으나 퇴짜를 맞았다.

청군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쪽과 남문을 계속 공격했다.
서쪽 망월봉에서 행궁을 향해 홍이포를 쏘아대 포탄이 행궁마당에 날아와 떨어지거나
기둥에 맞혀 행궁에 있는 사람들이 허겁지겁 달아나기 바빴다.
임금은 행궁을 온조사당 옆에 있는 무기고로 옮겨갔다.
(* 온조사당: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
온조는 북쪽의 낙랑과 말갈의 침입을 피해 남한산성에 목책을 쌓고 수도를 위례산성에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함)

25일에는 하루종일 홍이포 소리가 온 성을 뒤흔들었다.
성의 일부가 포탄에 맞아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군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어쩔 줄 몰라했다.
사람들은 홍이포의 포탄이 수십 리를 날아간다고 공포에 질려 수군거렸다.
이날 적군이 다섯 차례 공격해와서 세 곳이 무너졌다.
청군은 성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사신을 오라고 해 조선쪽에서 보냈던 문서를 돌려주며
최후의 통첩을 전달했다.

"내일 황제가 돌아갈 것인데 임금이 성에서 나오지 않으려면 사신들도 더 이상 오지 말라."

성안의 곡식은 거의 바닥이 났고 굶어죽은 자, 얼어죽은 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이름모를
역질마저 돌았다. 성안 사람들의 동요는 이제 막을 길이 없었다.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장수와 군사가 성위에서 내려와 행궁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척화대신을 잡아 적진에 보내라고 소리 높여 요구했다.
대신들이 물러가라고 거듭 타일러도 들은 체도 하지않고 계속 농성을 벌였다.
평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항명이자 변고이며 죄다 잡아들여 군율로 다스릴 일이었다.
하지만 벼슬아치들은 처벌을 주장하기는커녕 벌벌 떨 뿐이었다.
인조는 일이 위태롭게 되자 세자를 적진에 보내겠다고 결정했다.
그제서야 군사들은 겨우 진정되었다.

곧바로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세 사람이 적진에 나가 이 사실을 전달하자 용골대는 임금이 몸소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봉림대군의 편지와 함께 강화도 함락 소식을 통고했다.
인조는 봉림대군이 쓴 편지임을 확인하고는 천연의 요새도 지켜내지 못했다며 한탄했다.
대신들도 망연자실했다.
이 두 사건은 인조와 대신들의 고집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대신들은 마침내 임금이 나가지 않으면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건의했고 인조는 이렇게 말했다.

경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왜 모르겠는가?
처음에는 이런 조치는 결코 따를 수 없어서 오직 성을 등지고 한 번 싸워서 종묘사직과 함께
죽으려고 했소. 그러나 군신들의 동태가 변하고 정황도 몹시 달라졌소.
밤낮으로 강화도가 보존되기를 바랐는데 지금 나의 며느리들이 모두 잡히고 벼슬아치들과
그 가족들이 적에게 묶여 북쪽으로 끌려갈 판인데 나 혼자 살아난다 하더라도 앞으로 죽은 다음에
무슨 낯으로 땅속에서 다시 만나리요.('인조실록' 15년)

행재소에서 임금이 성을 나가 항복하겠다고 알리자 청군이 날짜를 잡아 알려주겠다고 대답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김상헌은 예조판서 자리를 내놓았고 장유가 대신 맡기로 했다.
항복식의 절차는 장유의 손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척화를 주장했던 자들도 가려 보내기로 했다.
그 글에는 조선에서 이행해야 할 열가지 조목이 쓰여 있었다.
주요 조목 몇가지 만을 들어보자.

1.명나라에서 준 책봉문과 인장을 바치고 관계를 끊으며,그들의 연호를 버리고 일체의 국서에
우리의 연호를 쓰라.

2.세자와 왕자 한 명을 볼모로 보내며 대신들 가운데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을, 아들이 없는 사람은
동생을 볼모로 보내라.

3.명나라를 정벌할 때 군사 수만 명을 동원하고 지정하는 기한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또 가도를 칠 테니 배 50척과 무기 등을 지원하라.

4.황제 생일 등 경축일과 명절, 경사와 상사가 있을 경우 예식에 따라 표문을 바치고 명나라를 대하는
규례대로 따르라.

5.포로가 된 청나라 군사와 도망쳐간 여진인을 돌려보내고, 무역은 그전대로 할 것이며
일본과의 무역도 종전대로 승인한다.

이외에 해마다 공물로 황금 100냥, 은 1천냥, 무소뿔 장식의 활짱 200부, 표범가죽 100장,
사슴가죽 100장, 차 1천 포대, 수달피 400장, 청서피 300장, 후추 10말, 허리칼 26자루,
소목(蘇木) 200근, 큰 규격의 종이 1천 두루마리, 작은 규격의 종이 1500두루마리, 순도칼 10자루,
용무늬 돗자리 4닢, 꽃돗자리 40닢, 흰 모시 200필, 빛깔있는 명주 2천 필, 빛깔있는 삼베400필,
빛깔있는 베 1만 필, 일반 베1400필, 쌀 1만 포대를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종전에 보내던 예물의 세 배이자 명나라에 보내던 공물의 몇 배를 능가하는 수량이었다.
명나라에서는 그 대가로 문화상품을 받아왔지만 청나라는 받을올 만한 고급품도 없었다.

항복식의 장소는 삼전나루로 결정되었다.
행재소의 벼슬아치들은 '적' 이라고 썼거나 '오랑캐' 라고 쓴 문서들을 찾아내 불태우느라 부산을 떨었다.
이날 김상헌은 엿새나 굶어지내던 끝에 목을 매 자살을 기도했으나 아들의 손에 구원되었고
정온은 칼로 배를 찔렀으나 살아남았다.
사실 이들은 이때 죽었어야 뒷날 볼모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정온은 시를 지었다.

밖에는 임금위해 싸우는 군사 없고
조정엔 나라 파는 흉악한 놈들 많으니
늙은 신하 할일이 무엇인가
허리에 찬 서슬 푸른 칼로 목숨을 끊으리라

여기서 '흉악한 놈들' 은 주화파로 불리는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장유 들을 가리키고
'늙은 신하' 는 자신을 가리킨다.
과연 그들이 나라를 팔아먹었던가?
아니면 힘이 모자라 이 지경에 이르렀던가?
아니면 이 지경이 되도록 몰고온 자들 때문인가?
분명한 것은 정온이 말한 대로 명나라를 아버지로 섬기는 의리를 고수해 이렇듯 처참한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이날 행재소의 사정을 까맣게 모르는 채 평안도 군사가 큰 접전을 벌였다.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이 이끄는 부대가 청군을 추격해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며
금화에 이르렀다. 이 지역은 이미 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홍명구와 유림은 남한산성이 포위되어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 3천여 명을 이끌고 한강을 넘는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작전에 이견을 보여 홍명구는 평지에 진을 치고 유림은 산에
진을 쳤다. 청군은 먼저 홍명구부대를 공격했다.
대포를 쏘아 목책을 허문 뒤 털담요로 몸을 감싸고 달려들어 백병전을 벌인 끝에 아군을 전멸시켰다.
홍명구는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죽었다.
유림은 전술상 홍명구부대를 구원하러 가지 않았다.
청군은 이제 유림부대 공격에 나섰다.

유림은 1선에 창검병, 2선에 궁병, 3선에 총병을 배치하고 대기했는데 적이 올라오기 무섭게
창검병이 돌격해 물리쳤다. 그 다음에는 총병이 나서서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아군은 산 중턱에 복병을 깔아놓고 기다리다가 네 번째 공격을 감행한 적을 쫓아버렸다.
적들이 퇴각하자 추격해서 전과를 거두었다. 청군은 참패하고 퇴각했다.
이것이 조청전쟁에서 두 번째로 이룩한 승리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홍명구의 전사는 기리면서도 유림은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을 깎아내렸다. 무관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유림은 군사를 정돈해 가평으로 내려왔으나 항복이 성립되어 끝내 남한산성으로
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날 뒤로 청군은 남한산성 공격을 중지하고 시설물을 철거했다.
다음날 척화파의 맹장 윤집과 오달제를 청군진영으로 보냈다.
이때에도 최명길이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임금이 내리는 술을 받아 마시고 몸이 묶인 채 끌려갔다.
두 나라는 임금이 항복식에 나갈 때 몸을 묶지 않기로 최종 합의했다.
조선 임금을 2급 전범으로 취급하기로 한 것이다.

1637년 1월 30일 아침, 용골대 등이 성밖에 와서 임금에게 내려오라고 독촉했다.
임금은 곤룡포 대신 남색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서문을 거쳐 내려왔다.
서쪽은 오행설에 따르먼 숙살(肅殺)을 의미한다.
인조는 항복하는 임금이라 이 문을 거쳐 나온 것이다.
의장병이 없이 대신, 승지 등 15명과 시종 50여 명만이 뒤를 따랐다.
산 아래에서 가시 거적을 깔고 앉아 있으니 청군 기병 수백명이 달려와서 호위해 데리고 갔다.

삼전나루 옆에는 누런 빛깔의 장막이 쳐져 있고 무장병이 사방으로 호위하고 있었다.
인조가 걸어서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태종이 앉아 있는 북쪽을 향해 단 아래에 앉으라고 일렀다.
인조는 시키는 대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바닥에 두드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식을 치렀다.
이때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고 하며, 청 태종은 단 에서 내려와 인조의 머리위에다
오줌을 갈겼다고 하는데 한 나라의 군주가 머리에 오줌 벼락을 맞았다면 이 보다 더 큰 치욕이 있을 까..
우리 역사에서 처음 겪는 치욕적인 항복식이었다.

이어 인조는 청탠종에게 옥새를 바쳤다.
인조는 의식이 끝나고 나서 밭 가운데에 앉아 다음 처분을 기다렸다.
저녁 무렵에야 서울로 돌아가도 좋다고 알려왔다.
세자와 두 대군과 그리고 이들의 아내는 청군 진영에 인질로 남겨두었다.

인조 일행이 송파나루에서 한강을 건너려 하는데 나룻배가 두 척 밖에 없었다.
벼슬아치들은 서로 건너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어떤 자는 임금의 옷을 잡고 나룻배에 오르기고 했다.

임금은 밤 10시경에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지 꼭 46일 만이었다.
성리학적 질서와 운영 원리는 삼전나루 항복으로 뿌리째 흔들렸다.
그렇다고 이 정도로 사태가 완전히 정리된 것도 아니다.
앞으로 두 나라는 긴 세월에 걸쳐 갈등과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인조가 서울로 돌아올 때 청군에 잡혀 있던 포로들이 나루 언저리에서 임금의 행차를 보고 울부짖었다.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연로에 늘어선 포로만도 수만 명을 헤아렸다.
어떤 여자는 짙은 화장을 하고 깔깔거리면서 조롱을 퍼부었다.
청군 기마병이 채찍을 휘둘러 무리를 해산시켰다.

인조의 행차는 동대문으로 들어왔다.
임금이 들어오는 길에 청군이 서울에서 철수하면서 농짝, 그릇 꾸러미 따위를 말이나 수레에
가득 싣고 몰려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에는 수많은 남녀 포로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포로들이 임금의 행차를 보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자 청군은
채찍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몰아갔다.

인질과 납치, 포로 등으로 끌려가는 백성들은 수 백명씩이 한 단위가 되어 끝도 모를 행렬을
이루었으며 이 과정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붙들고 울부짖는 통곡소리가
온종일 하늘에 닿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한 겨울 북풍과 눈보라을 맞으며 만주의 요동벌판을 거쳐 심양까지 수 십일 동안
끌려가는 사이에 수많은 동사(凍死)와 아사(餓死)자가 발생하였다고 하니 민족의 이 참상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으리...

청군의 주력부대는 함경도를 거쳐 철수하면서 조선인을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이에 맞서 아군이 청군의 길을 가로막고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아무튼 청군은 이렇게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지방, 함경도를 석권했다.
만일 청군이 인구가 밀집해 있는 남도까지 내려갔다면 포로나 납치의 숫자는 훨씬 많아졌을 것이다.
(임진왜란때는 남도의 백성,특히 경상도 지방의 백성들이 많이 끌려갔음)

어쨋든 기록에 의하면, 이때 북으로 끌려가 뒷날 심양에서 속을 바치고 돌아온 사람이
60만 명이나 되는데 몽골 군사에게 붙들린 자는 이 숫자에 들지 않는다.('병자록')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를 가늠해 볼 때 이 정도 숫자의 백성, 그 중에서도 생산성 면에서나
부려먹기에 좋은 젊은 청,장년이나 젊은 아녀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인력의 손실이
초래되었으며, 또한 60여만 명의 속환을 위해 지불한 재화 또한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막대한 금액이 되니(다음 회에서 언급예정) 이 얼마나 많은 국부의 유출인지...

여기에다 금,은을 비롯한 쌀,베 등 해마다 감당하기 어려운 재화와 특산물을 공물로서 바쳐야
했으니 이로서 나라의 살림이나 개인이 살림이나 속속들이 골병이 들어 나라는 명맥만 유지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부터 우리나라는 소규모의 상비군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재정상태였으며,청나라의 속국이
되어버린 상태였으니 어찌 보면 뒷날 일제에 강점되고 식민지가 되어버린 것도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인조반정이 없었고 광해군이 군주로서 이 상황을 이끌어
갔었다면 상황이 이와는 분명 달랐을 것이며, 나아가 백성들을 또 한 번 질곡속으로 몰아넣은
대원군이나 고종같은 또 다른 암군(暗君)이 잉태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통탄스러운 마음 가눌길이 없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