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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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 호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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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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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발걸음이 이렇게 빠를 리가..
조선이 압록강의 저항선을 포기한 것은 전술적으로 볼 때 매우 큰 실수였다.
청군이 침략할 경우 진로는 압록강 쪽밖에 없다.
두만강을 넘어오는 길을 선택한다면 심양에서부터 험산 산과 물을 넘어와야 하고
막상 두만강을 넘어도 험한 산악지대를 거쳐야 평양, 개성, 서울로 들어올 수 있다.
추운 겨울에 이렇게 험한 곳으로 쳐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압록강 길은 얼음이 얼 때 북방민족이 침투하는 기본 통로였다.
예전에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도 이 얼음길을 타고 넘어왔으며, 고려시대에 요나라와
금나라 군대도 예외없이 이곳으로 쳐들어왔다.
청군은 수군과 전선을 확보하지 못해 요동반도와 압록강 밑에 사마귀처럼 붙어있는
가도의 명군 근거지를 10년이 넘도록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사정을 보면 청군이 해로를 거쳐 평양이나 개성 상륙작전을 시도하지 않을 것임은
전략 전술에 무식한 벼슬아치도 뻔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압록강을 막는 기본 방어선을 도외시하는 작전을 짠 것이다.
청태종은 여러차례 조선 사신이 와서 빌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11월 29일을 한정하고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자 "조선의 죄를
먼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고 선언했다.
이 무렵 조선의 추신사 박로가 늑장을 부리며 북쪽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박로는 관례를 무시하고 부사를 딸려주지 않자 불만에 가득차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막
출발한 참이었다.
11월 말, 청태종은 팔기의 군사가 집결한 심양에서 조선 친정을 선언했다.
총병력 12만 8천여 명 가운데 외인부대인 중국군 2만 명과 몽골군 3만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2월 2일, 청군은 마침내 심양을 출발했다.
차가운 겨울 햇살 아래 색색가지 깃발이 펄럭이고 군사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청군의 주력부대는 기마병으로 선봉장수는 마푸다, 우리나라에서는 마부대라 부르는 자였다.
선봉부대에는 용골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부대와 용골대는 여러 차례 조선을 넘나들어 지리와 도로 사정을 환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 포로를 데리고 다니면서 안내를 받고 통역으로 써먹었다.
압록강을 감시하던 아군의 정찰병이 12월 6일, 두 번에 걸쳐 압록강가에 있는 용골산 봉화대에서
봉화를 올려 적의 침입을 알렸다.
김자점은 적의 내침이 서울에 먼저 알려지면 민심이 동요할까봐 자신이 주둔하는 정방산성에
먼저 알리도록 조치해 놓았던 것이다.
김자점은 "적의 내침이 이렇게 빠를 수가 있나, 우리 사신 박로를 환영하는 봉화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 서울에 알리지도 않았다.
그뒤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군관을 의주에 보내 사실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 군관이 올라가는 길에 적의 내침 사실을 확인하고 허겁지겁 돌아와 보고하자 오히려
"망령되게 헛정보를 알려 군사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고 호령하며 목을 베려고 했다.
1636년 12월 8일 새벽, 마부대가 이끄는 기병대 6천여 명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아무 저항도
받지않고 넘어왔다.
선봉대가 쉽게 강을 건너자 태종은 주력군을 이끌고 천천히 출진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대열은 날이 훤하게 밝아서야 모두 넘어왔다.
햇수로 따져 후금이 침략군이 압록강을 넘어온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_청군(淸軍),한달음에 서울까지 짓쳐 내려와...
적군이 물밀듯이 내려오고 있는데도 압록강 언저리는 너무나 조용했다.
의주의 통군정에는 감시초소의 군졸마저 도망치고 보이지 않았다.
청군은 백마산성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남하했다.
청군의 경기병은 아군의 방어거점인 산성을 아예 무시하고 텅텅 빈 길을 짓쳐 내려와
안주,평양을 거쳐 아무런 어려움없이 황주까지 치달았다.
산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앞에 주방어선이 없어서 전투를 벌이는 도중 협공을 당할 위험이 없어
굳이 산길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군은 전혀 약탈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양식과 장비가 넉넉했던 데에도 까닭이 있으나
쓸데없이 시간을 끌지 않으려는 의도와 조선 사람에게 인심을 잃지 않으려는 전술적 차원도 있었다.
적군이 침입해 약탈 행위를 벌이지 않은 경우는 역사이래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아군의 청야전술로 먼저 청소된 뒤 적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다.
청군은 이쪽의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는데다가 적지 않은 조선인 향도가 방향을 잘 잡아주었다.
청군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하루빨리 서울을 점령해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김자점이 이때서야 급히 조정에 적이 안주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청군은 압록강을 넘은지 6일 만에 황주에 이르렀다.
정방산성에 주둔해 있던 도원수 김자점이 군사를 출동시켜 봉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날랜 적의 기병 앞에 기세가 꺾여 산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김자점의 보고가 조정에 전달된 것은 적이 황주에 도착한 12월 13일이었다.
압록강을 넘은 지 6일이 지나서야 청군 침략 소식이 처음 전달된 것이다.
적이 이렇게 빨리 깊이 쳐들어왔다는 보고에 크게 당황한 인조는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개성에 있는 군사 1600여 명을 도원수에게 넘겨주라는 지시를 내린 뒤 서울 부근의 군사를 징발해
강화도 행궁의 호위병으로 삼고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임명해 서울 방어를 맡겼다.
김자점은 일단 후퇴했다가 적군이 황주를 통과하자 뒤르 추격했다.
그런데 철옹산성의 아군을 손쉽게 내쫓고 남하을 계속하던 '도르곤'(청태종의 9왕자 예친왕)이
이끄는 부대가 뒤쪽에서 김자점군을 포착했다.
정찰병이 전혀 가동되지 않아 도원수 김자점 조차 적군이 후방에서 오고 있는 줄을 몰랐다.
청군은 김자점군을 추격해 야간 기습을 감행했다.
아군은 본격적인 접전을 벌이기도 전에 지리멸렬하게 흩어졌다.
김자점이 앞서 도망치자 장수들도 뒤따라 도망쳤다.
오로지 포수 출신들이 밤을 새우며 힘써 싸웠으나 숫자로나 무기로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음날 적군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급보가 올라왔다.
인조는 무조건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검찰사(檢察使: 일을 단속하는 임시벼슬)김경정이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세자빈과 봉림대군,
김상용 등 원로대신들을 데리고 먼저 강화도로 떠났다.
날이 저물 무렵 임금이 강화도로 떠나려고 하는데 사복시의 종들이 거의 다 달아나 궁중 호위병이
임금이 탈 말을 끌고왔다.
인조가 강화도로 가기 위해 남대문으로 나왔을 때 적군이 이미 서울 가까이 이르러
행주산성과 양화진으로 진출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적은 임금이 강화도로 갈 줄 알고 미리 길을 막은 것이다.
인조는 방향을 돌려 수구문으로 빠져나왔다
도성 안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벼슬아치들은 강화도로 갈지 임금을 따라 갈지 몰라 허둥댔고, 도성민은 가족을 찾아 헤매며 울부짖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돌리자 소현세자와 일부 벼슬아치가 임금을 따랐다.
뒤늦게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황급히 수구문을 빠져나와 살곶이다리를 지나 한강을 건넜다.
최명길 만이 강화를 위해 적진으로 달려갔다.
도망인지 이주인지 모를 끝없는 행렬이 한강의 뚝섬나루로 이어졌다.
밤늦은 시각에 임금일행은 방이동을 거쳐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그동안 조용하던 남한산성 안은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로 북적댔고 어린 자식과
늙은 부모를 찾는 소리가 산천을 흔들었다.
성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임금이 강화도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인조가 김류의 귀에다 대고 어느 길로 가야 하는냐고 묻자 김류는 과천으로 빠져나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임금이 강화도로 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성안의 벼슬아치와 백성들은 또다시 소동을 벌였다.
다음날 새벽,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는 악천후에 인조의 작은 몸을 실은 말이 성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말이 갑자기 벌벌 떨고 땀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도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간신히 발걸음을 떼놓는가 싶었는데 비탈길이 꽁꽁 얼어붙고 눈이 쌓여 말이 넘어지고 말았다.
할수없이 인조는 산성으로 되돌아왔다.
이때 만약 인조가 강화도로 향했다면 틀림없이 사로잡혔을 것이다.
청군은 교하, 양천 일대까지 군사를 풀어 인조를 사로잡는다는 작전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때 말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하늘이 도운것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일찍 잡혀 전쟁을 끝냈다면
피해가 적었을 것이다.
수어사 이시백이 인조에게 성중에 들어온 벼슬아치와 장졸에게 수성 의지를 밝히고 격려해 달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자리를 잡고 앉아 장수들을 불러 수성 의지를 밝히고 군율을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바야흐로 남한산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남한산성에는 벼슬아치와 노비, 그 가족 1300여 명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군사는 1만 3천여 명이었다.
군량미는 쌀과 콩 1만 9천 석, 겉보리 6천 석을 보유한 정도였다.
이 숫자는 기록마다 약간씩 달라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전 수어사 이서는 이와 별도로 창졸간의 사태에 대비해 병기를 비롯해 소금, 장, 무명 따위의
생활필수품을 비축해두었다.
인조가 성안의 상황을 살펴보니 어느 것 하나 규정대로 준비된 것이 없었다.
군사의 무기는 물론 갑옷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말을 먹일 꼴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최명길이 적진에 갔다가 돌아와 강화 조건으로 "임금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라" 고 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연달아 청군의 사자가 성 아래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청군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무렵 서울을 무혈점령했다.
개성과 임진강에서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진군해서 압록강을 넘은 지 일주일 만에 도성을
차지한 것이다. 태종이 이끄는 본진 4만 여명은 느리게 뒤따라오고 있었다.
청군은 서울에 들어와서도 약탈 행위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주변 마을에도 출몰하지 않았다.
적군은 신속하게 요소요소에 군사를 배치했으며 용골대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남한산성의 행재소에서는 종친인 능봉수를 왕의 동생으로, 예전에 형조판서를 지낸 심집을
대신으로 가장시켜 박난영과 함께 적군 진영으로 보냈다.
용골대가 능봉수에게 물었다.
"그대 나라에서 지난 정묘년에 가짜 왕자을 보내 우리를 속였는데 당신은 진짜 왕자요?"
능봉수는 우물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용골대는 심집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은 진짜 대신이요?"
심집 역시 우물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거듭 박난영에게 묻자 그는 "진짜 임금의 동생이며 대신" 이라고 대답했다.
용골대가 버럭 성을 내며 박난영을 죽이고 두사람을 돌려보내면서 "세자를 보내야 화친을
의논하겠다" 고 전했다.
임금 일행이 성으로 들어온 지 3일이 되었으나 완전히 포위된 상태라 외부소식을 들을 수도 없고
사람을 내보내 구원병을 보내라는 지시를 전달할 수도 없었다.
체부(도제찰부의 줄인 말,전시에 설치한 최고작전지휘부)에서 임금의 지시문을 들고 나갈
지원자를 모집했는데 서흔남이라는 종이 선뜻 나섰다.
그는 동네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난봉꾼이었으나 지금은 찬밥 더운 밥 가릴 계제가 아니어서
체부에서는 그에게 납서(蠟書:비밀누설과 습기를 막기위해 밀랍으로 봉한 서류)를 맡겼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앞으로의 대책을 숙의했다.
"나이어린 자들이 사려가 얕아 논의가 지나치게 과격해 끝내 이런 화를 불러왔소.
그때 저네들 사신을 내치지 않았더라면 설령 침입이 있더라도 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벼슬아치들이, 적이 왕자를 데리고 오라 하니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자 곁에 있던 소현세자가
오열하면서 자리를 비켰다.
화의를 위해 최명길, 홍서봉 등이 부지런히 적진을 드나드는 한편 조정에서는 삼남의 근왕병이
올라올 것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다.그런데 적군이 판교로 몰려가 삼남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이 기대마저 무너졌다.
이렇듯 상황이 절박한데도 김상헌은 화의를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심광수는 거센 겨울바람을 맞으며 땅바닥에 엎드려 최명길을 목베 죽이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이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강화유수 장신에게 납서를 보내 여러 곳에 형편을 알리라고 지시했다.
청군은 조선인 포로 정명수를 통역으로 내세우고 사자 두 명을 보내 강화를 요구했다.
일행은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성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
용골대가 계속 강화를 요구한 의도는 따로 있었다.
남한산성 주위에는 큰 마을이 별로 없었다. 날씨가 추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눈보라치는 날이
연이어졌지만 밥지어 먹을 곳도 마땅치 않고 잠잘 집도 없었다.
이런 악조건에서 일주일 동안 야영생활을 하고 밤낮으로 순찰을 돌며 적군의 동정을 살펴야 하는
청군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얼어죽은 군졸과 말이 속출했다.
성안의 아군도 동상에 걸리고 얼어죽는 자가 생기는 판국이니 야영하는 측에서야 오죽했겠는가.
게다가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성으로 오르는 길이 험하고 성벽이 높고 견고해서 타격을 입힐 수가 없었다.
태종이 이끈는 주력군이 여태 도착하지 않은 것도 불안했다.
인조의 구원병 요청으로 주변의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길을 뚫으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정명수와 함께 온 청군사자가 말했다.
많은 군졸과 말이 동상에 걸리고 주리는데 당신 나라에서는 전혀 돌보아주지 않으며,
엊그제 대신에게 전한 말에 대해 회보가 없소.
지금 만약 강화를 하지 않으면 우리도 어쩔 수 없소.
내리모레 우리 황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개성에 이를 것이오.
당신 나라에서 우리를 돌보아주지 않으면 우리가 어찌 당신네 백성을 아끼겠소?('남한지')
(南漢志: 홍경모가 남한산성에 관련된 사실을 모아 1846년에 편찬한 책)
인조는 청태종이 이끄는 적의 대군이 도착해 장기전으로 가면 식량이 떨어져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이경직 등을 적진에 보내 동정을 살폈다.
이즈음 양주 등 경기 주변의 1만 명이 넘는 군사가 포위망을 뚫고 산성으로 들어왔다.
아군은 약간 고무되어 성안의 양곡을 점검했다.
보유 양곡은 2만 3800석이고 군졸의 수는 3만 3천 명, 벼슬아치의 수는 390명 가량이었는데
노비와 가족만도 1천여 명에 가까웠다.양식은 한 달을 지내기에도 빠듯했다.
말 먹일 콩은 거의 바닥이 나서 굶어 나자빠지는 지경이었다.
21일 아침 적군이 구원병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려고 큰 부대를 이루어 성을 사방으로 둘러쌌다.
적은 100명씩, 수십 명씩 혹은 대여섯 명씩 무리지어 포위하고 더러 풀로 인형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일전을 벌이자는 임금의 결정에 따라 군졸들이 동쪽 문과 서쪽 문으로 나가 한바탕 싸워
적군 수십 명을 죽이고 무기를 빼앗아 들어왔다.
자신감을 얻은 아군은 몇차례 성밖으로 나가 시설물을 만드는 적군을 공격하고 화살 따위를 노획했다.
적군은 추위를 무릅쓰며 소나무 가지와 잡목을 두세 발 높이로 쌓아 성 주위 100여 리를 둘러싸고
나뭇가지를 새끼로 묶고 방울과 종을 매달아 울렸다. 이를 송성(松城)이라 하였다.
적군은 송성 안을 판자와 방패로 막아 군사를 숨기고 송성 밖에 포장과 초막을 만들었다.
적군은 송성에 올라가 성안의 움직임을 낱낱이 살피는 한편 날마다 한봉(汗峰: 남한산성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광주 시내 쪽에 위치)에 올라가 대포를 쏘아댔다.
아군은 먼저 나서지 않고 적이 먼저 공격하면 맞서고 후방의 구원병이 오면 협공한다는 전술을 짰다.
마침 강원도에서 내려온 군사가 광주까지 진출했다는 소식을 접한 데다 충청도 군사가
남쪽의 죽산 언저리에 주둔하고 있어서 협공을 기대한 것이다.
인조는 적의 예봉을 꺾으려고 사람을 시켜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병을 용골대에게 보냈다.
용골대는 코웃음을 치며 돌려보냈다.
"하늘이 나에게 동방의 팔도를 주었으니 술과 고기 등 모든 물건은 오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너희 나라 임금과 신하가 지금 돌굴(성안)에 살고 있어 안팎이 통하지 못해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내가 늘 노획한 물건을 보내려 했으나 너희 나라 임금이 받지 않을 듯해서 보내지
않았다. 지금 어디에서 소와 술을 얻어와 나에게 보냈는지 모르겠으나 도로 가지고 가서 주린 군졸에게나
주어라. 이제 황제의 군사가 곧 들이닥칠 텐데, 우리는 조선의 구원병을 두차례나 무찔렀다."
사실 강원도 군사는 달려오다가 적군을 만나 금단산(구리와 광주 중간에 위치한 산,그 정상에서 남한산성이
바라다 보인다)에 머룰러 있었고 충청도 군사는 죽산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다가 공격을 받고 후퇴했다.
전라도,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의병은 느리게 북상하는 중이었다.
경상병사 민영은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23일 충주의 수교에 이르러 조심스레 북상하고 있었다.
전라병사 김준룡은 2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충청도 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청태종이 거느린 청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황해도와 경기 지방을 거쳐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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