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49
|
병자 호란(10)
|
|
|
글쓴이 :
…
/img/icon_view.gif) 조회 : 361
|
-저들이 압록강을 넘어올 듯합니다
의주 등지에서는 계속 청군이 산해관에서 철수해 본국으로 들어가 조선으로 출동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으며, 압록강에 얼음이 얼 무렵 대거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 무렵 청군은 한창 명나라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청군은 산행관의 요새를 피해 우회로로 만리장성 언저리에 있는 거용관으로 진격해 북경으로 향했다.
청군은 곧 북경 위쪽에 있는 보정을 석권했으며, 12개 성을 무찌르고 56번을 싸우는 동안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았다. 점령지에서 사로잡은 사람과 가축은 18만을 헤아렸다.
조선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막연히 "산해관에서 철수한다" 는 정도의 정보만 얻어들었다.
명나라는 청나라에 당하고 있는 사실을 감추고 요동을 공격하겠다는 허풍으로 조선을 현혹시켰다.
한편 박인범 일행은 심양으로 들어갔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의 국서를 아예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과 다름없이 사신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용골대가 사신들에게 청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지금이라도 우리를 따라 명나라 공격을 작정하고 척화대신과 왕자를 인질로 들여보내시오.
우리와 혼인을 맺으면 우리 군사가 압록강에 이르렀더라도 화친을 할 수 있소. 그렇지 않으면
우리 태종 황제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갈 것이오.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소."
박인범은 본국에 보고해 타결짓겠다는 말로 그들의 요청을 누그러뜨리려 하지않고 무조건
완강하게 거절했다.
사신들은 지난날 나덕헌의 사례를 겪은 터라 겁이 나서 이렇게 대처했을 것이다.
박인범 일행이 떠난 뒤 용골대가 뒤쫓아와 당부했다.
"혼인을 요구한 것은 참말이 아니오.그대들은 이 사실을 알고 가시오."
일테면 안심을 시킨 것이다.
죽이지 않고 융숭한 대접을 해서 돌려보낸 뜻은 침략을 감추기 위한 전술이었다.
"저들이 곧 압록강을 넘어올 것이나 우리나라와 관계를 끊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인범이 알아온 정보는 고작 이 정도였다.
도대체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군사 규모나 동향을 거의 몰랐다.
첩보 활동은 초보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비변사에서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특별사신을 파견해 한편으로는 청나라의 동태를 살피고
한편으로는 관계를 끊지 않는다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조정에서는 서둘러 박난영을 특별사신으로 임명했다.
최명길은 조정의 미온적인 대처를 그대로 놔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조정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글을 올려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건의했다.
요즈음에 와서 오랑캐에게는 딴 마음이 없는데 우리나라에서 먼저 도리에 어긋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춘신사편에 보내는 예물 중에 아직 약속한 대로 보내지 않은 것을 보내고,
계속해서 추신사를 보내야 합니다. 신사를 곧바로 파견하되 당상관인 문신을 정사로 임명하고
박난영을 부사로 임명해 이 일을 무게있게 하여야 합니다.
해마다 바치는 예물과 장사꾼, 지금까지 붙잡은 오랑캐들을 한꺼번에 같이 들여보내면서
국서에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우리의 마음이야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단지 구구하게 신조를 지키는 바는 명분에만 있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써서 보내면 화친 문제는 처음처럼 될 것입니다.('지천집')
('지천집'-최명길의 시문집, 손자인 최석정이 편집,간행)
그동안 사기적인 수법으로 전개한 사신 교환을 전면 수정하고 정식 절차에 따라 사신을 보내
침입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나라가 흉년으로 궁핍해진 현실과 산성 작전에 따른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들어
전란이 일어나면 쉽게 무너질 것을 염려했다. 지켜낼 만한 군사도 없고 계속 이어댈 만한
식량도 없으면서 한바탕 싸우겠다고 온 나라에 선포한 것에 대한 국내사정을 지적했다.
인조는 최명길의 소를 읽고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화친을 강구하느냐 끊어버리느냐 어느 하나를
확정해야 옳다" 고 강조했다. 대신들은 대부분 화친 쪽으로 기울어 추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먼저 보냈던 춘신사는 심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도망쳐 돌아왔다.
1636년 내내 척화파와 주화파가 첨예하게 대립해 싸움을 벌이는 동안 인조는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느라 무엇하나 제대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조선은 오로지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대의' 하나만을 붙들고 소모의 세월을 보내면서
전쟁이라는 참혹한 화를 자초했다.
인조는 후금의 위협이 고조될 무렵 수도의 방어선을 남한산성과 강화도에 두기로 결정하고
1624년(인조 2년)부터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벌였다.
남한산성은 원래 백제 초기에 쌓은 토성인데 고려 시기에는 소흘하게 취급했다.
개성의 방어에 별로 영향을 끼치는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은 동쪽의 한봉에서 서쪽의 청량산을 거쳐 남쪽에 이르기 까지 8천 미처 가량의 길이인데 처음에는
이 부근에 있는 절의 승려을 모아 인부로 동원하다가 전국의 승려을 모집해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를 시작한지 2년만에 완성한 남한산성은 서울 방어성으로서 도성 다음 가는 큰 규모였다.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을 두어 군사를 배치했는데 그곳의 평상시 주력군은 승려들이었다.
성안에 승도청을 별도로 두어 승병을 총괄했으며 그 안에 9개의 절은 승병들의 막사와 숙소로 사용했다.
승병조직은 지휘관, 훈련관 등을 포함해 500여 명으로 편제했다.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에 따라 승병이 전국의 절에서 번갈아 불려나왔다.
승병은 아침 저녁으로 예불하면서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고 낮에는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았다.
이곳의 총지휘자인 수어사는 광주유수가 겸임했는데 정치권의 실세인 잉시백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맡아보았다.
한편 강화도에 읍성을 수축하고 건너편 갑곶에 성 쌓는 일을 서둘렀다.
갑곶을 요새로 만드는 것은, 육지에서 강화도로 침입하는 적을 바다를 건너기 전에 차단시킨다는
작전에 따른 것이다.
갑곶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에 별류(別流)를 이루는 지형에 위치해 있다.
고려 고종이 몽골군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건너올 때 군사의 갑옷만 벗어 쌓아도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좁다고 해서 '갑옷의 곶' 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몽골군고 한때 이곳에 주둔한 적이 있다.
다행히 강화도에는 고려 시기에 쌓았던 성이 잘 보존돼 있어서 새로 성을 쌓을 필요는 없었다.
후금국의 위협이 가중되자 조정에서는 중심 방어선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
김자점, 김류 등은 적의 침투로인 평안도와 황해도의 주요 요새를 중심 방어선으로 설정해
적의 침입을 서북 지방에서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귀와 이서는 서북 지방이 후금군의 침입으로 피폐되어 있으니 일단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최후의 방서선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기에는 이귀의 주장에 따라 남하산성의 수어청군을 강화했는데 김자점이 도원수로 병권을 장악하면서
의주, 안주, 평양, 황주, 평산을 주요 방어선으로 삼아 산성을 수축하고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163년대 중반에 들어 청나라의 위협이 가중되자 전방위체제로 전환했다.
수어청 군사는 속오군에 편성되어 둔전을 일구며 전쟁에 대비했다.
조청전쟁을 앞둔 시기에 수어청군 1만2700여 명 정도가 8교대로 복무했으니 상비군은
정원의 8분의 1인 셈이다.
도성 방어에 동원하는 병력을 4만 5천여 명 선으로 정하고 군사를 점검했지만 일시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1만 5천여 명 정도였다.
병력을 교대로 동원해야 하고 도망병의 숫자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 1만 4300여 섬의 군량미를 비축하고 강화도에도 군량미를 실어보냈지만
이 정도로는 일년치의 소모량도 되지 않았다.
청천강 이북 지방에 배치할 3900명의 무관을 시험을 통해 뽑았는데 이때에도 재물을 받고
부정 합격자를 만들어냈다.
이어 남쪽 출신의 군사 1600여 명을 백마산성으로 보내고 조총 100자루, 활 200개, 화살 1300개를
의주로 실어보냈다.
다각도로 힘을 기울인다고는 해도 군사 수나 무기의 양은 현실적으로 어림없이 모자랐다.
어느 정도 규모의 침략군이 쳐들어올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물량이 확보되는 대로 보냈을 뿐이다.
김자점이 정방산성(황해도의 요새)을 쌓을 때 모진 형벌과 매질을 함부로 해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을 쌓거나 보수하는 경비를 주변 주민들에게 들씌우고 양곡을 모질게 훑어갔다.
최명길은 이러한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을 강한 어조로 지적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다 도망치고 말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전쟁의 암운이 짙어지자 조정에서는 겨우 의주, 안주, 평양, 황주, 평산에 주둔한 군사들에게
가까운 산성으로 들어가 수성으로 장기전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북쪽에서 오래 버텨주면 남쪽 세 도의 군사를 징발하는 시간을 벌고 이것을 토대로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방어를 보강해 장기전을 치르겠다는 전략이었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3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갔고,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은 평양 주둔군 3천여 명을 이끌고 자모산성으로 들어갔으며,
황주 주둔군은 정발산성으로, 평산 주둔군은 장수산성으로 들어갔다.
이 산성들은 큰길에서 무려 30~40리나 떨어진 곳에 있다.
도원수 김자점은 정방산성에 총지휘부를 설치했다.
대사간 윤황은 이러한 전략을 적극 반대했다.
그는 임금이 강화도로 들어가면 우리나라 땅에 오랑캐 군사가 별 저항도 받지않고 물려들어
모든 사람들이 이리떼의 밥이 될 것이니 임금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 항의하고,
윗자리에 앉은 임금은 편안한 곳으로 피란갈 궁리를 하면서 백성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끓는 물속으로 들어가라고 강요해봤자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보관돼 있는 무기와 식량을 모조리 서북 지방으로 보내고
임금이 직접 나가 평양을 지킬 결심을 굳게 한다면 온 나라의 군사와 충신 열사들이
벌떼처럼 떨쳐일어나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임금이 직접 출정군을 일선에서 지휘해야 한다는 요구가 여러차례 올라왔지만 그때마다
흐지부지된 것은 인조 자신이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의 눈치를 살펴 출세한 벼슬아치들은 오히려 국가의 안위를 핑계대고 강화도 파천설을
줄기차게 주장했고 인조는 마지못한 척 동조했다.
청태종은 사신 박인범에게 큰 소리를 쳤다.
"조선이 산성을 많이 쌓고 있으나 나는 큰 길로 당당히 나가 서울로 들어갈 것이니
산성으로 막을 수 없으며, 조선이 믿는 곳은 강화도이지만 우리가 만일 팔도를 유린하면
조그마한 섬 하나로 나라 노릇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귀국의 의논을 이끄는 선비 출신의 벼슬아치들이 붓을 들어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병자록')
('병자록': 조청전쟁 때 조정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나 일을 '나만갑' 이
일기체로 기록한 책. 저자가 직접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보고 들은 바를 적었기 때문에
내용이 정확하다고 함.)
태종은 당당하게 압록강을 넘어가겠다는 자신의 전략을 숨김없이 밝혔다.
결과적으로 한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 한 임금은 일선에서 지휘했으니
힘의 균형을 따질것 없이 처음부터 전쟁은 판가름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