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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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 호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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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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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종 즉위식에서 절하기를 거부한 조선사신
용골대가 돌아간 지 한 달쯤 지나 두 사신이 심양에 도착했을 때 태종은 이미 대금국의 이름을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내걸었다.
그는 아버지 누르하치가 여진족의 제국인 예전의 금나라를 동경하고 역사적인 이미지를
이으려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좁은 세계관이라 본 것이다.
태종은 단호히 만주는 여진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가 다스리는 땅 곧 중국 영역이었던 요동,요서와 내몽골에는 중국족,몽골족, 그리고 북쪽의 소수민족과
조선족의 일부가 섞여 있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주민의 삼분의 일 가량이 이민족이었다.
그러니 단일민족인 여진족만을 표방한다는 것은 세계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태종의 야망에 걸맞지 않는다.
여진에 대해 야만스럽고 미개하다는 고정관념을 지닌 중국족(漢族)과 조선족의 의식을
해소할 필요도 있었다. 태종은 민족연합의 이미지를 풍기는 나라 이름을 찾았다.
청(淸)은 '세계를 맑게 한다' 는 뜻이니 여러 민족을 끌어안는 제국의 이름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
'덕을 숭상한다' 는 뜻의 '숭덕' 이라는 연호도 여러 민족을 표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는 예전 금나라 태조보다 뛰어난 리더쉽과 자질을 갖추었으며, 휠씬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1636년 4월에 치러진 청태종의 즉위식에서 껄끄러운 일이 벌어졌다.
즉위식에서 신하들은 '너그럽고 온화하며 어질고 성스러운 황제' (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바쳤으며,
외국에서 온 축하객들이 절을 올렸다.물론 명나라 조정에서는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 만이 국궁배례를 하지 않았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나라로 맹약을 맺었으니 군신관계가 아니었다.
이 관계를 적용시키면 뜰 아래에서 절을 하지 않아야 의리에 맞는다.
만약 뜰 아래에서 절을 하면 '두 임금을 섬기는 것' 이 된다.
조선의 임금나라는 어디까지나 명나라였다.
유교의 가르침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고 하지 않았던가.
두 사람은 본국의 지시에 따라 완강하게 국궁배례를 거부한 것이다.
만일 본국의 지시를 어기고 돌아가면 난처한 경우를 당하게 된다.
그들은 마지못해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행사에 참여했다.
평안감사 홍명구는 "날마다 몰려다니면서 북을 치고 음악을 올리는 자리에 참가하였다.
여러 오랑캐에게 끌려다니면서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했다고 변명한다" 고 조정에 보고했다.
어쨌든 후금에서 조선 사신들을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은 보나마나였다.
두 사람은 잡혀들어가 문초를 받았다.
'청사고'(淸史稿)에 따르면 태종은 그들의 처형을 만류했다고 전한다.
그 나라 임금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서 짐이 사신을 죽이게 해서 구실을 찾고자 한다.
풀어주어 돌려보내라.
두 사람은 죽음 직전에 놓여나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관례대로 용골대와 마부대가 준 후금의 국서를 뜯어보려 했으나 단단히 봉해져 있어
뜯기가 어려운데다 마부대와 용골대가 미리 뜯어보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두 사신이 국서를 뜯어보고 내용에 문제가 있으면 시정해 달라고 요구할까봐 사전에 봉쇄한 것이다.
사신들은 용골대 등이 돌아간 뒤 통원보에 이르러서야 국서를 뜯어볼 수 있었다.
국서에 태종은 대청황제라 일컫고 조선을 '너희 나라' 라고 표현했으며,명나라에서 조선에 보내는
문서 형식과 용어를 썼다.태종은 인조의 태도를 나무라면서 인질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두 사신은 국서를 베껴 급히 조정에 보고한 뒤 원본을 객관의 잡동사니 속에 처박았다.
형식적으로 따지면 국서를 받지 않은 것이다.
두 사신이 본국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홍명구가 그들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두 사신이 즉위식 참석을 강요받았을 때 칼을 품고 죽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축하행사에 참석했고,
국서를 즉시 뜯어보지 않은 죄가 크다고 전제하고 이렇게 주장했다.
의로운 지사 두어 명으로 하여금 두 사신의 머리를 가지고 가서 '칸' 의 대문에다 던지고
큰 의리에 따라 준열하게 꾸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저것들이 개나 양과 같은 놈들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설사 성이나서 침입의 우환이 빚어진다 해도 우리나라의 장수와 군사치고 누군들 분연히 떨쳐일어나
창검을 무릅쓰고 북쪽을 향해 저마다 앞을 다투어 죽을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까.('인조실록' 14년)
이 주장은 사림의 여론을 대변한 것이다.
비변사에서도 절충안을 내놓았다.
"의리에 따라 자결하지는 않았으나 의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국서를 받아왔고, 뜯어본 뒤 되돌려보내지 않고 몰래 버린 처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사명(使命)을 욕되게 한 죄는 징계해야 합니다. 나덕헌을 다시 보내
국서를 객관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칸에게 정식으로 항의해야 합니다."
김상헌 등은 강경하게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조는 일체 사신을 보내지 말고 침입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나덕헌은 백마성으로,
이확은 선천으로 유배보내는 조치를 내렸다.
곧이어 김상헌을 이조판서로 삼아 인사권을 맡겼다.
김상헌은 척화파의 선봉이 되어 주화파의 선봉인 최명길과 사사건건 맞섰다.
김상헌은 속속 자기 패거리를 정치일선에 등장시켰으며 ,타협적인 의견을 내는 사람을 배척했다.
김상헌의 처사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하루는 인조가 경연 자리에서 붕당의 폐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최명길에게 김상헌의 사람됨을 물었다.
최명길의 입에서 칭찬의 말이 나올 리가 없다.
"그는 도량이 좁은데 기개는 강직해서 좋은 길에 들어서면 천길 벼랑처럼 우뚝 솟아 있는 기상이고
잘못 들어선 길에서는 휘어잡아 고치는 의지가 없으니 그의 식견에 미흡한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상헌은 종묘 제관(祭官)이었을 때 무더운 6월에도 두꺼운 흑단령을 입고 온종일 재계했으며
임금이 병을 앓고 있으면 대궐문 밖에서 밤을 세운 뒤 아침 일찍 문안을 드리니
다른 사람은 따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김상헌은 융통성이 없는 강직한 성격에다 형식과 예절을 중시하는 주자의 문도였다.
인조도 이런 행동을 높이 평가해 중요한 자리를 맡겼던 것이다.
척화파는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자 또는 교조주의자였다.
그들에게는 '명나라를 섬기는 기본' 에서 벗어나는 일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척화파의 기개는 하늘 끝까지 닿을 만큼 당당했다.
인조는 척화파의 주장에 따라 군사를 징발해 북쪽지대에 배치하고, 양곡과 무명과 소를 보냈다.
그런데 이해 여름 극심한 가뭄이 연이어지다가 7월에 들어 홍수가 져서 많은 농토가 물살에 쓸려나갔다.
설상가상으로 서북 지방에서 시작된 소의 전염병이 금방 남쪽으로 퍼져 연일 소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평안도에는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다" 고 기록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심각했을까 짐작이 간다.
하루가 다르게 소값이 폭락해 너도나도 소를 잡아먹는 지경까지 이르러 인심이 요동쳤다.
최명길이 국교 단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일어 인조는 청나라에
글을 보내기로 결정했다.그런데 국서 형식으로 사신편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격문이라는 이름으로
의주를 통해 청나라 사람들 편에 전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 내용은 종전과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고 앞에 '청' 이라는 국호를 쓰지 않았으며,
정례의 추신사도 보내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즈음 가도의 백등용이 서울로 들어와 인조와 단둘이 비밀회담을 가졌다.
백등용: 이번에 진계성 도독이 황제의 승인을 받아 요동평정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오랑캐의 내부사정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귀국이 비록 국교를 단절했더라도 적의 형편을 내탐할 만한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내 독부(가도)에 비밀스럽게 알려주면 명나라 황제께서 베푸는 은혜가 많을 것입니다.
인조: 화친관계가 이미 끊어져 적의 실정을 정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날짜를 정하지 않는다면 천천히 주선해보겠습니다.
요컨대 첩보활동을 벌이라는 통고였다.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와 외교관계를 트는 길밖에 없었다.
얼마 후에는 명의 감군(監軍)인 내시 황손무가 숭정제의 칙서를 들고 서울로 들어왔다.
명나라의 요구는 청나라 내부를 이간질시킬 것.
청나라 사람이든 명나라 사람이든 그쪽에서 귀순해 오는 자들에게 대우를 잘해주어 장려할 것.
의주 등지의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대비할 것.
출정할 때 필요하니 말 3천 필을 보내라는 따위였다.
이 말 저 말 많이 늘어놓았지만 목적은 말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의논 끝에 말 300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비록 요구의 십분의 일을 들어주는 것이지만 이쪽에서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성의 표시였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국교를 재개해 청나라의 실정을 알아내느냐에 있었다.
인조는 명나라의 요구에 힘이 솟고 방향이 잡히는 듯 열정을 가지고 일을 처리해 나갔다.
가을로 접어들 무렵 마부대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의주에 인삼값을 가지고 와서 개시를 요구했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 묵혀두었던 격문을 꺼냈다.
그는 조정의 정책을 철저히 따르려고 직접 가지않고 한 나라에서 전달하는 글을 일개 군관에게
들려보냈다. 마부대는 내용을 알아보고 수령을 거부했다.
"우리는 오로지 물건값을 치르기 위해 왔소.
이 글은 황제의 지시가 없어 가지고 갈 수가 없소. 꼭 보내고 싶거든 정식으로 사람을 시켜
보내야 할 것이오." 그들은 인삼도 받지 않은 채 가 값만 놓고 갔다.
호조에서 황손무에개 인삼 300여 근을 뇌물로 준 참이라 사실 팔아먹을 인삼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조정에서는 정탐을 목적으로 통역관 박인범,권인록을 심양으로 보내면서 의주에 묵혀둔
격문을 들려 보냈다.
이와 함께 추신사를 보내지 못한 일을 사과하고 인삼값에 따라 수량대로 물어주겠다는
부드러운 편지도 보냈다. 이 편지에는 최명길의 주장을 받아들여 '청' 이라는 공식 명칭을 쓰고
황제는 '칸' 이라고 썼다.
통역관들이 의주로 떠난 뒤 오달제가 최명길을 지적해 탄핵했다.
"아무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행동한 죄를 다스리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윤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화친에 대한 의논이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오늘만이 아니라 예로부터 그러했지만 오늘처럼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를 구차하게 보존해서는 안됩니다.
청나라의 칸이라는 말 한마디를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아, 수백 년 동안 당당하게 전해 내려온 종묘사직이 마침내 최명길의 말 한마디에 망하다니
어디 말이 됩니까?"
인조는 반대의견을 눌렀다.
"위로는 임금의 손을 묶어놓고 아래로는 자기들과 의논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혀를 얽어배놓는 뒤에야
마음이 시원하겠는가?"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최명길은 압력을 못 견뎌 사직을 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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