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46
|
병자 호란(8)
|
|
|
글쓴이 :
…
/img/icon_view.gif) 조회 : 378
|
-불신의 벽은 높아가는데..
후금은 조선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가을 개시를 일방적으로 중단하면서 예물을 더 많이 요구했다.
조선에서 또 그대로 보내자 예물을 거절했으며 국서의 회답도 보내지 않았다.
두 나라 사이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인조는 추신사(조선과 후금간의 국교성립이후 조선에서
후금으로 가을에 보내는 사신, '추절사'라고도 함, 봄에는 춘신사 또는 춘절사라고 함)
신득연을 심양에 보내 변명하도록 했다.
후금은 군사를 내서 자기들을 도우라고 강요하고,명나라와의 사신 왕래를 끊어라고 강박하면서
온갖 말로 신득연에게 모욕을 퍼부어댔다.
후금에서 끝내 예물을 받지 않아 신득연은 그대로 싸들고 돌아와 후금의 국서를 전달했다.
내가 이번에 물건 수량을 많이 지정한 것은 탐욕스러운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저 정성과 신의로서
이웃과 좋은 관계를 가지자는 것이었는데 정의가 점점 없어져서 잇속을 탐내는 것으로 서로
속이니 이는 진정 나의 생각과 어긋납니다.('인조실록' 11년)
처음에는 이렇게 부드럽게 시작했으나 뒤이어 명나라의 끝없는 요구는 기꺼이 들어주고 도와주면서
까닭없이 우리를 침해하며,도망친 우리 백성을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그리고 가도를 정벌하려 하는데 전선 300척을 빌려주면 귀국이 우리와 우호를 맺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예물을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으려면 사신 왕래을 끊자고 위협하면서
3월 1일을 기해 의주에서 개시하자고 제의했다.
후금은 교역물품에 금,은 등을 추가하고 통상적인 교역의 열 배를 웃도는 물량을 요구했다.
조정의 논의는 대체로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려는 의도이며,굶주리고 있기 때문에
물건을 많이 얻어보자는 심사이다.나라의 힘을 쏟아부어도 그들의 욕심을 채울 수 없다.
큰 계책을 정한 다음 사람을 보내 관계를 끊는다고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며 전국에 척화(斥和)교서를 내렸다.
나라가 불행해 강한 오랑캐와 이웃해 있다. 그들은 간사한 것만 잘하는 일로 여기면서
거스르고 순종하는 천지의 이치를 무시하니 사람의 도리로서 따를 수 없다.
큰 원칙과 관련되어 다른 것은 생각할 겨을이 없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 관계를 끊는다는 것을
알리고 맹약을 저버린 데 대해 따지려고 한다.
그러나 짐승 같은 것들을 의리로 타이르기 어려울 것이니 변경의 말썽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만약 저마다 충성과 의리를 떨쳐 상하가 함께 원수를 친다면 어찌 천 리의 국토를 가지고
남을 무서워하겠는가.('인조실록' 11년)
바로 일전불사의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었다.
임금은 관서지방의 군량미 4개월 분을 미리 마련해 실어보내고,청천강 이북의 산성에
5~6개월 분의 군량미를 비축했다.
전국적으로 벼슬아치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쌀을 거두었으며 남쪽의 수군을 동원했다.
군사조직을 정비해 김시양을 도원수로,정충신을 부원수로 삼아 총지휘를 맡기고 역전의 장수 임경업을
청천강 이북을 지키는 방어사로 삼았으며, 남한산성을 최후의 방어성으로 지정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조선에서 가지고 간 국서에서는 그동안 신의를 지키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고 개시 제의를 거절한다고
밝혔다. 국서는 강경한 어조로 끝을 맺었다.
"귀국에서 헛걸음을 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되어 사신을 보내 나의 뜻을 알리는 바이니 한 번 크게
고쳐 생각하기 바라오."
두 나라가 국교를 연 이래 처음으로 이처럼 강경한 내용의 회답을 보냈다.
이 방침을 정할 때 인조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벼슬아치들은 감히 반대하지 못하고 "예 예" 소리만 내고
우물거리며 물러갔다.
사신이 이 글을 들고 나가자 벼슬아치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내놓고 반대하지 못했는데 최명길만이
글을 올려 "화를 불러오는 잘못된 계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는 뜯어보지도 않았다.
회답사가 의주에 이르자 김시양과 정충신이 도강을 만류하고 연명으로 조심스레 반대 의견을 냈다.
"지금 서쪽 변경의 군량미는 2만 명의 군사가 반 년 동안 먹을 정도도 못됩니다.
만일 오랑캐들이 맹약을 저버렸다고 소리치면서 침입해오려다가 ,한발 늦추어 우리 군사들이 대비하느라
지치고 군량미가 완전히 떨어진 다음에 몰아쳐온다면 어떻게 맞서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조의 결심은 단호했다.
"오늘날 무사들이 목숨을 내걸고 나라에 몸을 바친다면 이 교만한 오랑캐를 쳐부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임금은 두 사람을 파면하고 김자점을 도원수로, 윤숙을 부원수로 삼았다.
만일 후금군이 침입하면 인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다가 후금에서 위협적으로 나오자 인조는 친정을 포기하고 춘절사를 보내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려 했다. 후금의 요구대로 예물 목록을 늘려주되 금은과 활을 만드는데 쓰는 뿔을 제외하고
다 보내기로 지시하고 개시도 일단 열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조선 쪽에서 한발 물러났으나 앙금이 그대로 남아 두 나라 관계는 회복하지 못할 지경으로
빠져들었고 인조의 척화교서도 그대로 유효했다.
이즈음 등주의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의 옛 부하 경중명과 공유덕이 반란을 일으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발해만 일대의 연해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들은 후금과 내통해 요동반도의 마지막 보루인 여순을 점령하여 위세를 떨쳤고, 용강, 철산 등지를
거쳐 압록강 언저리로 진출했다.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가도의 명군이 출동했으며,
조선 쪽에서는 임경업이 출동해 부분적으로 타격을 입혔다.
후금은 조선에 1만 병의 원병과 양곡을 내라고 요구했으나 단호히 거절했다.
조선은 계속해서 가도의 명군에게 전선과 양곡을 보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후금이 요구하는 교역장은 열어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두 나라의 불신의 벽은 더욱 높아졌으나 사신 왕래는 그대로 유지하되 한동안
큰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1635년 12월 초순, 조정에서는 왕비의 초상을 당해 관례대로 빈전도감과 산릉도감을 설치하고
초상준비를 서둘렀다.
인조의 슬픔은 남달랐다. 인열왕후는 그가 잠저에 있을 때 얻은 아내이니 조강지처인 셈이다.
조정의 벼슬아치와 종친,그리고 백성들은 6개월 동안 지루하고 복잡한 국장을 치러야 하고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지내야 한다.
바로 이 무렵 후금의 사신 마부대가 찾아왔다.
마부대는 봉황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장수로 여러 차례 압록강을 넘어들어와 가도의 명군과 싸운
경험이 있는 조선문제 전문가 였다.
그는 특별 사명을 띄고 왔지만 인조는 초상을 당해 만나볼 수 없다고 핑계를 댔다.
만일 명나라 칙사가 왔을 때 이런 대접을 했다면 벼슬아치나 선비들이 온갖 전거를 끌어다 붙이며
반대 여론을 폈을 것이다.
마부대는 할수없이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며 국서를 예조로 보냈다.
국서의 내용은 여러 가지였다.
자신들의 군사가 이르는 곳마다 승리해 내몽골까지 아울러 천하의 반 둘레를 하나로 뭉쳐놓았다고
위력을 과시하고, 조선이 가도를 지원하는 것을 질책했다. 무역 문제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었으며,
조선의 국서에 예전과는 달리 '바친다'(奉)를 '보낸다'(致)고 쓴다고 트집잡았다.
왕은 명나라의 운수가 쇠퇴하지 않아 영구히 이어질 것으로 보십니까?
나는 명나라가 기울어지고 무너질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 나라는 신하가 임금을 속이고 임금이 신하를 의심하며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중상과 간계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곳곳이 소란스럽건만 숭정황제는 이를 평정하지 못하며,
번번이 지면서 장수만 잃어버립니다.우리 군사는 이제부터 다시 서쪽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인조실록' 14년)
후금은 명나라 조정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농민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나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으며, 이자성 세력이
큰 집단을 이루어 조정을 위협했다.
조선의 답서은 상투적이었다. 다만 '바친다' 라거나 '보낸다' 라고 한 것은
"아무 생각없이 쓴 데 지나지 않는다" 고 변명하고 개시는 다시 열기 곤란하다고 답변했다.
인조는 마부대에게 후한 뇌물을 주는 것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후금의 협박은
단순한 으름장이 아니었다. 명나라 정벌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조선에 보낸 1차 경고였다.
1636년 2월에는 큰 규모의 사신을 보내왔다.
용골대와 마부대는 사절단 대표로 오면서 내몽골 장수 77명과 수행원 98명을 데리고 나왔다.
사신들은 내몽골 장수를 데리고 온 경위를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대원(大元:몽골의 나라이름)을 점령하고 옥새도 얻어 그쪽의 여러 왕자들이
우리 칸에게 큰 칭호 올리기를 원해 귀국과 이를 의논해 처리하려고 장수를 보내왔습니다.
그들만 보낼 수 없어서 우리고 함께 따라왔습니다."
의주부윤이 이 내용을 조정에 알리자 언관들은 내몽골 장수들을 도성 문안에 들여서는 안된다고 건의했다.
특히 홍익한이 장황하고 격렬한 글을 올려 적극 반대하는 의견을 펼쳤다.
신이 듣건대 이번에 용골대가 온 것은 바로 금나라의 칸을 황제라고 일컫는 문제 때문이라 합니다.
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지 명나라 천자가 있다는 말만 들어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예의가 밝은 것으로 세상에 소문이 나서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리며,
선왕들은 큰 나라를 섬기는 한결같은 마음을 이어 내려오면서 정성을 다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랑캐의 사자을 죽인 다음 그 글과 함께 머리를 궤짝에 넣어
명나라에 보고해야 합니다.('인조실록' 14년)
그리고 칸이 황제에 올라와 이웃나라에 대고 "조선에서 나를 높여 천자라 한다" 고 공포하려는
속셈이라고 지적하고 그들이 참칭(명분에 맞지않는 호칭)하는 잘못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글이 올라오자 너도나도 목청껏 소리를 높였다.
"보내온 글을 태워버리고 오랑캐의 목을 베십시오."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나.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그들의 목을 베지 않으려면 내 목을 베십시오."
물댄 봄논에 개구리 울어대듯 온 조정이 와글거렸다.
홍익한의 주장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한 벼슬아치는 오달제와 윤집 이었다.
삼학사라 불리는 이 세 사람은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서 뒷날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을 맞게된다.
인조는 이들의 뜻에 동감했지만 일단 후금의 사절단을 맞아들였다.
사절단은 서울에 들어와 편지 세 장을 내밀었다.
하나는 봄철의 문안편지이고 하나는 국상에 대한 조문 편지이며 하나는 제사에 바치는 물건 목록이었다.
이는 의례적인 것으로 문제삼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중한 예절에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정작 임금에게 올리는 두 통의 문서가 말썽이었다.
하나는 겉봉에 보내는 사람이 '금나라 정사를 잡고 있는 여덟 대신'(金國執政八大臣)이라 쓰여 있고
하나는 '금나라의 변방인 몽골' 이라고 쓰여 있었다.
곧 후금의 임금이 보낸 것이 아니라 대신들과 몽골의 왕자들이 보낸 문서였다.
담당 벼슬아치들은 이웃 나라의 신하도 같은 신하의 처지인데 임금에게 함부로 글을 보낼 수 없다고
따지면서 밀쳐버리고 뜯어보지도 않았다.
대신들과 몽골의 왕자들이 문서를 보낸 일이 격식상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후금의 칸을 황제로 추대하면서 조선의 동의를 구하려 한 것이다.
명나라의 예부와 병부 역시 그동안 늘 이런 글을 조선 임금에게 보내왔다.
용골대는 조선 조정의 처사에 거세게 항의했다.
"여러 대신들과 몽골의 왕자들이 우리의 칸을 황제로 추대하려 하자 우리 칸이 조선과 형제를 맺었으니
의논해보아야 한다고 말했소.그래서 이 사람들이 글을 가지고 온 것인데 왜 받지 않소?"
그는 문서를 도로 집어넣으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내일 떠나겠소. 말을 주면 타고 갈 것이나 주지 않으면 걸어가겠소."
용골대가 나간 뒤 이 문제로 조정이 떠들썩했다.
대사간 정온은 명분론을 폈다.
"몽골과 같이 명나라를 반역한 자는 사신에 낄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면 저것들이 겉으로는
성난체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분명 의롭게 여길 것입니다."
성균관 유생133명은 홍익한보다 더 격렬한 주장을 폈다.
한데, 용골대 일행은 왕후의 빈소에 가서 조문하는 등 애써 자제하는 행동을 보였다.
벼슬자리에서 쫓겨나 있던 최명길이 이 문제에 대한 글을 올렸다.
오만한 글은 칸을 황제에 추대하는 내용뿐이며, 일반 관례에 따른 편지에는 회답을 보내야 마땅하며
후금국 사신은 만나보아야 하며, 내몽골 사람들을 야박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만 그 편지 내용만은
엄격하게 배척하는 정도로 마무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번 잘못해 기회를 놓치면 뒤에 아무리 후회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거듭 심사숙고할 것을 촉구했다.
다음날 아침 용골대 일행이 훵허니 성문을 나가버리자 그제서야 당황한 비변사에서
그들을 만류해야 한다고 건의해 박난영을 보냈다.
박난영은 뒤를 따라가 만류했으나 용골대는 두 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들어갈 필요가 없다며 뿌리쳤다.
최명길이 제시한 방법도 먹혀들지 않았다.
인조는 크게 당황하며 사신들이 나가도록 내버려둔 담당 관리들을 잡아들여 문초하고,
사신들의 목을 베라는 말을 흘린 통역관을 찾아내 목을 자르라는 지시를 내렸다.
벼락은 엉뚱한 데 떨어지고 현실은 긴박해졌다.
조정에서는 물론이고 전국 곳곳에서 전쟁이 터질 것은 어김없는 현실이라고들 떠들어 댔다.
이 점만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인조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온 나라 사람들에게 교서를 내렸다.
지금 이 오랑캐는 방자하게 세력을 뻗치고 감히 참칭을 떠들면서 서로 의논한다는 핑계로
갑자기 편지를 보내왔다. 이 어찌 우리나라의 임금과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누가 강하고 약한지, 나라가 존재할지 망할지 하는 형세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올바른 의리로 결심을 내려 그 글을 뿌리치고 받지 않았다.
서울 안의 남녀들은 전쟁의 참화가 눈앞에 박두했음을 알면서도 오히려 오랑캐를 뿌리치고 거절한 일을
통쾌하게 여긴다. 만약 팔도에서 조정에서 내린 이 공명정대한 조치와 위급하고 절박한 시기가 닥쳐왔음을
알게 된다면, 소문만 듣고도 격동하고 분발해 죽기를 각오하고 원수를 갚으러 나설 것이니,
거리가 멀거나 가깝거나 신분이 귀하거나 천하거나 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인조실록' 14년)
얼토당토않은 아전인수요 생판 거짓말이었다.
서둘러 전시체제로 돌입하고 총동원령이 내려졌지만 말만 무성하지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다.
사헌부에서도 이 점을 우려했다.
"온 나라가 위급한 처지에 놓여 아침에 어떻게 될지 저녁에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는데
깊은 궁궐의 침묵은 전날이나 다름이 없고 의정부의 태평스런 태도는 여느 때와 같으니
오랑캐의 손발을 얽어맬 만한 승산이 있는지 아니면 승리를 이룩할 만한 방략이 별도로 있는데도
신들이 알지 못하는지 궁금합니다.
훈련원에 소속된 4천 명의 군사를 징발해보니 수백 명 뿐이고 사방의 정병은 각 관아의 군관에 소속되어
오히려 은신처로 삼으니 설사 변란이 일어난다 해도 강변에서 유유히 거닐고 말 것입니다."
도성민들은 임금의 허풍을 믿지 않고 이미 피란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인조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지 황급히 후금에 회답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내가 병이 있어 빨리 만나보지 못하자 사신이 성을 내고 돌아갔습니다" 라고 쓰는 따위
거짓말을 늘어놓은 회답 국서를 보냈다.
새로 임명된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의 발길이 바빠졌다.
이들은 군량미를 거두고 군사를 징발하느라 밤낮으로 뛰어다녔다.
남한산성의 수어청(守禦廳)군사와 강화도의 수비병은 무기를 점검하고 양곡을 실어나르는 일로
밤잠도 자지 못했다.
조정에서 능력있는 장수를 추천받아 북쪽 지대에 배치했는데 여기에 나덕헌이 들어있었다.
나덕헌은 나주 출신으로 무과에 합격해 출세한 장수로서 용맹을 떨쳐 의주부윤 등 여러 곳의
수령을 지냈다.안악군수로 있을 때 관가의 재물을 착복한 사실로 논란이 일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이때에 춘신사로 뽑혀 심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춘신사로 뽑힌 것은 후금에 여러차례 왕래해 누구보다도 그쪽 사정에 밝기 때문이다.
그는 회답사 이확과 함께 후금으로 들어갔다.
이확은 종실인데 임진왜란 시기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는 무과에 합격한 장수로 인조반정에 가담해 공을 세웠고 평산부사, 자산부사 등 북쪽 지대의
수령을 역임해 서북쪽 사정에 밝았다.
조정에서는 일부러 중견 무장들을 골라 위험한 적지에 사신으로 보냈다.
고위 문관들은 늘 빠지려 했고, 임금 역시 격이 높은 벼슬아치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
용골대는 태종의 즉위식에 조선 사신을 참여시키는 문제도 의논하려 했는데 박차고 나오는 바람에
축하사절 문제는 꺼내보지도 못했다.
조선에서는 그들이 돌아간 뒤 어쩔 수 없이 일반사절을 보내 얼바무리려 한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