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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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 호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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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혼미의 정국
모문룡은 조선 양민의 목을 적군으로 가장시키는 천인공노할 방법으로 전공을 과장해
총병으로 승진했으며,가도를 밀수 기지로 삼고 무역선의 통행세까지 챙겼다.
섬에서 상품을 파는 상인들에게서 커미션을 받아내기도 했다.
조선을 압박해 계속 쌀을 공급받고 북경의 고관들을 뇌물로 매수해 자신의 위치을 다졌다.
그런데 이즈음 모문룡에게 힘을 보태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해는 삼중첩자 노릇을 하면서 늘 불안에 떨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은 1만 냥의 상금을 걸고 그를 잡아오는 자에게 형주자사 자리를 주겠다고 공포했다.
후금 역시 그의 행적을 수상쩍게 여기고 있었다.수세에 몰린 유해는 또 한 번 꾀를 냈다.
자기 집에 불을 질러 다른 사람이 타죽게 만들어 자신이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가도로 망명했다.
후금은 감쪽같이 속아넘어갔고 조선 사신도 임금에게 그의 자살을 보고했다.
모문룡은 그의 망명을 반겼다.유해는 흥조로 이름을 바꾸고 세 동생과 함께 행동을 같이했다.
이제 유흥조는 모문룡의 부하가 되었다.
원숭환은 영원성을 지키면서 끊임없이 후금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모문룡으로부터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출동하였는데
아민이 군사를 이끌고 반격하자 모문룡은 그대로 가도로 달아나버렸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영원 앞바다에 있는 쌍도로 불러내 열두 가지 죄목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그 자리에서 처단해버렸다.그는 유흥조 등 모문룡의 부하를 데리고 갔다.
모문룡의 후임으로 부총관 진계성이 가도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그 아래에서 유흥조의 동생인
유흥치가 유력한 장수로 활약했다.
조선에서는 오죽하면 그동안 모문룡을 '해외 천자'라 불렀는데 식민지 총독과 같은 행세를 하던 그가
죽음으로써 인조는 앓던 이가 빠진듯 시원해했으며 그에게서 숱한 조롱과 모욕을 받아왔던
벼슬아치들도 기뻐해 마지않았다.
모문룡의 부하로 역전의 장수인 공유덕 등은 자신들까지 원숭환에게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후금으로 망명했다.망명객들은 빈손으로 가지 않고 홍이포라는 귀중한 선물을 태종에게 바쳤다.
더구나 기술자까지 대동해 갔으니 태종이 기뻐 날뛴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홍이포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괴력의 신무기이다.
이것은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무기였다.
후금은 영원성을 비켜 만리장성 쪽에서 북경으로 통하는 길을 골라 침입하면서 반간계를 썼다.
이 옆길을 원숭환이 터주었으며, 그가 자신들(후금)과 내통한다는 소문을 명나라에 흘렸다.
새로 황제가 된 의종은 귀가 얇고 의심이 많은 인물이라 금방 후금의 모략에 말려 원숭환을 잡아다
시장바닥에서 처형했다.
원숭환의 휘하인 조대수 등은 아무 죄가 없는 상관이 잡혀 죽자 명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여겨
기마병 1만5천여 명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했다.
이 무렵 후금은 잠시 휴식기간을 가지면서 홍이포 제작에 열을 올렸다.
1630년 4월 유흥치가 가도에서 난을 일으켜 진계성을 죽이고 총지휘관이 되었다.
진계성이 유흥조의 투항한 전공을 깎아내려 포상을 방해했기 때문에 복수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유흥치는 조선의 접반사와 수행원마저 묶어놓고 핍박을 가했다.
조선은 이들이 후금으로 달아나지 않으면 육지로 올라와 노략질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봉쇄작전을 폈다.
유흥치는 후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후금군 출신의 군사와 상인들을 마구 죽여
인심을 잃었다.
틈을 엿보던 명나라 장수 심세궤가 난을 일으켜 유흥치 형제를 죽였다.
유흥치의 무리가 후금에 투항하려고 육지로 올라오자 후금군이 이들을 지휘하여 곽산일대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가도의 분쟁이 종식되고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 까지 명의 관할령 역할을 했다.
가도는 그야말로 세 나라의 분쟁거리이자 눈속에 든 가시였다.
1627년 후금과 조선의 전쟁이 끝나뒤 명나라에서는 새 황제로 의종 곧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했다.
숭정제는 30대 중반의 연부역강한 청년이었으나 명 황실의 전통 탓인지 복잡한 시대 탓인지
의심이 많아 일을 자주 그러쳤다.
후금은 북쪽 내몽골 지방의 저항세력을 완전히 정복하고 명나라을 전면 공격하기 위한 준비로
잠시 남쪽의 도발을 자제하고 있었다.
-중강에 무역시장 개설
후금은 조선에 대해 실리를 챙기는 일에 나섰다.
조선은 약속대로 중강에 무역시장을 열었다.
중강은 의주와 구련성을 연결하는 압록강 가운데 있는 작은 섬인 난자도를 가리킨다.
이곳은 상류에서 내려오는 백두산 뗏목이 닿는 곳이다.
조선 초기부터 조선은 여진인에게 중강과 회령 등지에 개시(開市)를 허락해 필요한 물자를 교역해 왔다.
임진왜란 기간에는 극심하게 모자라는 양곡 조달을 위해 은과 동으로 요동의 명 상인들과 양곡을 교역했는데
건주여진이 일어난 뒤 잠시 중단되었다가 후금의 재개를 받아들여 무역시장 개설을 응낙한 것이다.
후금은 경제적으로 두 가지 현실에 봉착하였다.
하나는, 영토는 넓은데 인구가 적어 생산성이 떨어지는 문제였다.
그래서 정복활동을 벌이면서 몽골족,한족(漢族) 등 닥치는 대로 포로를 끌고가 인구를 채우려 했다.
다른 하나는, 수렵위주로 생활을 하느라 넓은 영토를 제대로 개간하지 못해 식량이 모자랐다.
수렵만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요동을 공격한 뒤 명나라와 완전히 국교를 단절해 무역의 길도 막혀 있었다.
후금은 명나라의 망명객과 도망민과 패잔병을 각 지역게 배치했다.
조선 포로는 장수들에게 나누어주거나 인신매매시장에 풀어놓아 조선인 포로는 대개
농노의 지위로 살아갔다.
후금은 처음 휴전 약속에 따라 포로를 되돌려줄 때와는 달리 이 무렵에 와서는 값을 받고
파는 형식으로 되돌려주었다.포로교환 문제는 계속 두 나라의 현안이 되었다.
일단 중강에만 무역소를 열었으나 서울 상인들은 그곳으로 진출하는 것을 꺼려했다.
이문을 제대로 챙길지, 도리어 물건을 빼앗길지 몰라 겁을 냈다.
조정에서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무슨 빌미를 잡힐지 몰라 대책을 세웠다.
서울의 상인들에게 종이,후추,옷감을 가지고 가서 은으로 바꾸어 오게 하고, 오는 길에 가도에 들어가
명나라 옷감을 사들여 후금 사자들에게 뇌물로 쓰게 했다.
후금 사자들은 명나라 옷감이나 조선산 특산품을 선물로 챙기려 했다.
현지의 수령들이 이를 도와 중강 개시는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그뒤 후금은 회령 개시을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예전에는 회령 등 변경 지대에 사람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교역이 잘 이루어 졌으나
지금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 교역장이 이루어 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회답을 보내 유보시켰다.
중강 개시 하나만도 조선으로서는 크게 부담이 되는 형편이었다.
-포로 한 사람 값이 옷감 65필
용골대가 사신으로 서울에 왔을 때 조정에서 값을 쳐주고 포로를 데려오겠다는 제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이 사람 장사에 군침을 흘렸다.
박난영은 용골대에게 포로 100명 또는 200명을 묶어 돌려주면 쌀 1천 섬으로 보답하겠다고 제의했다.
이 소문이 포로들 사이로 퍼져나가 틈만 있으면 박난영이 머무는 곳에 몰려와
우리를 데려가 달라고 울부짖었다.
측은하게 여긴 사신들이 가지고 있던 말과 인삼을 털어 22명을 샀으나 포로들이 고국에 돌아가도
부모형제가 없다고 하소연해 일단 그곳 본디 주인에게 맡겨두고 조정에 대책을 물었다.
소문을 들은 여러 포로 소유주들이 중강 시장에 포로를 팔겠다고 내놓았는데
박난영이 확인한 숫자만도 500여 명 가량이었다.
사신들은 포로들을 살 재물이 없었고 포로들은 대개 고국에 가족이 없어서 값을 대신 물어줄 상대가 없었다.
박난영은 안타깝다는 보고만 올릴 뿐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포로들은 그대로 만주 벌판에 내팽겨개졌다.
국경 지대도 이런 실정이었으니 만주 내지에 있는 포로의 참상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용골대는 본격적으로 포로장사에 나섰다.
그는 1628년 3월 정기 개시에 맞추어 포로들을 시장에 내놓았다.
그런데 조선쪽에서 사준 인원이 아주 적었다.
용골대가 의주부윤을 불러 따졌다.
"지난번에 서울에 갔을 때 접대 맡은 관리가 포로를 데리고 오면 값을 주고 찾아오겠다고 말했소.
이번에 200여 명이나 되는 포로를 데리고 왔는데 팔아넘긴 인원수는 삼분의 일도 못되오.
왜 이처럼 약속을 저버리시오? 주인들 가운데는 포로를 남겨두고 값만 약속하였다가
뒤에 와서 받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소. 값을 흥정해 사가지 않겠소?"
양쪽은 오랫동안 흥정을 벌인 끝에 포로 한 명의 값을 옷감 65필로 정하고 문서를 만들어 증빙했다.
의주부윤에서는 30명 만을 샀다.
용골대는 나머지를 도로 몰아갔는데 끌려가는 포로들은 조선 지경을 돌아보며 사무치도록 통곡했다.
포로들이 틈을 엿보아 속속 고국으로 도망치자 후금에서 항의하는 글을 보내왔다.
글의 내용은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준다. 도망친 포로를 돌려보내라.
성을 수리해 방비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회령개시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의 논의는 한결같았다.
다른 문제는 얼버무리되 도망쳐온 포로 송환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앞으로 계속 송환을 요구하면 전례가 되어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값을 치르거나 송환하는 대신 후한 뇌물을 써서 입을 막자는 해결책을 마련하고
회령 개시(開市)요구도 들어주자고 했다.
1631년 2월, 후금에서 용만(압록강 입구)에 무역장을 열어줄 것과 회령에서 쌀을 꾸어가겠다고
요구했다.
이 무렵 가도의 실권을 장악한 유흥치는 모문룡과는 달리 압록강 입구를 중심으로 무역을
능동적으로 벌이지 않고 몸을 도사렸다.
조정에서는 이런저런 사정을 들어 용만 개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용만에서 농사지을 소를 사가겠다는 요구는 난리통에 소가 거의 없어져 팔 수량을 채울 수
없다고 변명했다.회령에서는 쌀을 빌려주지는 않고 적은 양을 그냥 보냈다.
다음해 3월 후금은 중강 수준의 회령 개시를 요구하고 국경 너머로 도망간 후금 사람을
찾아가겠다고 연락했다.
귀국의 장사꾼들이 심양 지방에 들어오면 으례 우리가 경비를 공급했고 우리나라 장사꾼들이
귀국의 변경인 의주(중강)에 갔을 때도 경비를 공급받았습니다. 지금 회령도 왕의 경계에 속하고
이번에 간 장사꾼들은 모두 우리 사람들이니 공급하는 관례를 달리할 수 없습니다.
저자의 소값은 의주의 전례에 따르고, 베값은 한 필에 은 5푼을 더 드리겠습니다.('인조실록' 10년)
이어 교역할 여러가지 물품을 적어 보냈다.
후금은 이제 구체적으로 물목을 밝히는 등 적극적으로 교역에 나섰다.
이때에도 조정에서는 미온적으로 대처하며 시일을 끌었다.
요령껏 무역 물품을 점점 줄여나가고 예물의 수량을 줄였으며, 질도 나빠졌다. 이와 달리
명나라에는 최고급 예물을 바쳤다. 후금에서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중강 개시에서는 활발하게 무역이 이루어졌지만 조선 쪽에서 보면 밑지는 장사였다.
내부의 군량미도 모자라는 판국에 막대한 분량의 양곡이 유출되었다.
하지만 상인들의 상업적 욕구가 왕성해져 처음과는 달리 조선 상인들이 심양 지방까지 들어가
상업활동을 벌여 뒷날 책문후시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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