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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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 호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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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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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 진영에서 2차 사절단을 보내왔다.
사절단의 우두머리는 유해인데 그는 강홍립과 박난영을 데리고 왔다.
강인은 인질로 잡아 두었다.
일테면 먼저보다 중량급으로 사절단을 구성한 것이다.
조정 내에서 강홍립과 박난영은 항복한 포로이니 임금이 접견해서는 안 되며 잡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일단 접견하기로 결정했는데도 언관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사신과 강홍립을 죽이고 나서 우리 모두가 배수의 진을 치고 사직을 위해 함께 죽어야지
어찌 전하를 적의 사자에게 달게 모욕받게 해야겠습니까?"
이귀가 "화의하지 않으면 망한다" 는 말로 이들을 달랬다.
인조는 먼저 달려온 강홍립과 박난영을 접견했다.
강홍립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후금군 내부에서 한쪽에서는 돌아가자고 하고 한쪽에서는 진격하자고 주장합니다.
양곡과 말먹이가 모자라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유해가 보내온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금 두나라 백성들이 도탄 속에 허덕이고 있어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구나
가슴아파합니다.
이번에 와서 강화하는 문제를 완결짓고자 함은 분쟁을 풀고 전란을 끝내자고 말한 옛 사람의 뜻을
본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귀국 임금이 한 가지 소견만 고집하고 임기응변할 줄 모르며
작은 문제에 매달리고 시급한 일에 마음을 쓸 줄 모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호걸이 변고에 대처하는 솜씨와는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한때의 굴욕을 참아낸다면 틀림없이 나라가 길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농사철이 다가오는데다 백성들이 도망가서 혹은 재물이 거덜나고 혹은
형제가 포로가 되어 날마다 화친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에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5년)
끝에는 자기네 말을 듣지 않으면 수도를 분탕질하고 팔도를 뒤집어버리겠다는 공갈을 늘어놓았다.
얼마후 유해가 강화도로 들이닥쳤다.
임금은 유해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용상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유해도 버티고 서서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유해가 손을 들어 여러번 읍하려고 했으나 임금은 자기 신하를 대하듯 손을 들어 답례하지 않았다.
유해는 자신을 후금국의 사신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며 성을 내고 나가버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귀가 땅을 치며 한탄했다.
"허허, 일이 글렀구나, 일이 글렀어."
이즈음 후금군이 임진강을 넘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도대장 김상용이 서울을 버리고 강화도로 달려왔다.
서울에서는 큰 난리가 났고 분노한 백성들이 선혜청과 호조 창고에 비축되어 있는 양곡을 훔치다가
그대로 불을 질러버렸다.그렇게 어렵게 모아놓은 양곡을 공급할 운수 수단도 갖추지 않고 있다가
백성들의 손에 날려버린 것이다.
조정에서는 유해에게 은 700냥을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유해는 이를 거절하고 사향,수은,붓,먹 등
특산물을 요구했다. 양쪽은 설왕설래를 거듭한 끝에 화의의 조건을 정했다.
첫째, 두 나라는 형제가 될 것을 맹세할 것.
둘째, 임금의 동생을 인질로 보낼 것.
셋째, 명나라나 대금(후금)의 연호를 쓰지말 것.
넷째, 요구한 물품을 보내줄 것.
이 조건에 따라 왕족인 원창령을 원창군으로 삼아 인조의 동생으로 가장해 보내기로 했으며,
국서에 양쪽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
화친서약을 하기전에 무명 1만 5천필, 명주 200필, 모시 250필, 호피 60장,녹비(鹿皮)40장,
일본도 여덟자루, 말 한 필을 보냈다.
후금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가 없어 이 정도로 끝내려는 의도에서 서둘러 보낸 것이다.
화의 진행에 불만을 품은 언관들을 대표해 간관 윤황이 격렬한 소문을 올렸다.
-오늘의 화친은 이름이 화친이지 실제로는 항복입니다.
전하께서는 간악한 신하들이 요행수를 노리는 꾀에 빠져 공론을 굳세게 배척하고
적에게 흔연히 굴복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오랑캐가 보낸 사람을 친히 만나
갖은 오만 무례한 모욕을 받고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시니 신은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적은 후방의 지원이 없는 군사를 가지고 이미 천리를 지나 깊이 들어온데다가
후속 군사도 없고 군사와 말이 지쳐 있어서 강한 활로 쏜 화살이 마지막에 힘이 다하는 형세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는 지금 한창 모여들어 혹은 강나루를 지키며 들을 텅 비우고
기다리기도 하며 혹은 험한 곳을 차지하고 군사를 매복시켜 움직이는 기병을 쫓아버리고 있습니다.
적은 앞으로 나오면서 싸울 수도 없고 뒤로 물러가도 노략질할 것이 없게 되므로
열흘이 못가 제풀에 궤멸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빨리 오랑캐가 보내 사람의 목을 베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화친을 주장해서 나라일을 그르친 신하들을 참형에 처해 불순한 말을 막아버리며,
동요해 도망친 장수의 목을 잘라 군율을 엄격히 세워야 합니다.
이와 함께 오랑캐에게 준 물건을 회수해 삼군의 군사를 먹여야 합니다.('인조실록' 5년)
이것이 젊은 언관들의 공론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전장에서 활고 칼을 들고 싸울 자들인가?
말로는 무엇을 못하나..말로는 천 냥 빚을 갚고도 남는다.
과잉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사람은 현실을 보는 눈이 어둡게 마련이다.
인조와 원로대신들이 이러한 의견을 억눌렀으나 사림(士林)이 여기에 동조해 벌떼처럼 일어나
관련자를 걸고 넘어졌다. 후금에 대응하는 문제에서는 당파나 노소에 관계없이
명분파와 실리파로 나뉘어 분란을 일으키다가 끝내는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라졌다.
-화친을 맹세하고 형제의 의를 맺었지만...
명,후금의 연호를 모두 쓰지 않는 것은 이래저래 타협을 보았으나 느닷없이 아민(후금군 총사령관)
이 화친을 서약하는 의식을 갖자고 제안했다.
지난번에 유해가 원창군과 함께 강화도 갑곶 연미정에서 간단한 맹세의 의식을 치렀지만
화친 국서를 받아본 아민은 그것을 서약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유해에게 "한 번 싸워 승부를 결판내 보자" 는 글을 들려 보냈다.
어물쩍 넘어가려했던 조선 조정의 꾀는 먹혀들지 않았다.
유해는 한신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 고사를 들먹이며 조선의 대신들을 설득하려들었다.
최명길이 흥분하여 임금 앞에서 장도칼로 유해를 찔러죽이고 화친 교섭을 깨겠다고 소리쳤다.
한동안 옥신각신하다가 인조는 맹세의 의식을 베풀되 자신은 피를 마시지 않고 대청에서
의식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1627년 3월 3일 밤, 인조는 검은 옷을 입고 대청으로 나갔다.
동쪽에는 조선 대신들이,서쪽에는 후금의 사자들이 늘어섰다.
승지,사관,장수 들은 전각 위에 늘어섰다.
인조가 향을 피우자 좌부승지 이명한이 맹세의 글을 읽어나갔다.
-조선국왕은 이해 정묘년 3월 3일에 금나라와 맹세합니다.
우리 두 나라는 좋은 관계를 맺기로 합의했습니다.
앞으로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기 자기 땅을 지키며 꼬투리를 가지고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물품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나라가 금나라에 대해 원수로 여기고 좋은 관계를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하는 경우에도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금나라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하는 경우에도 하늘이 화를 내릴 것입니다.
두 나라의 임금과 신하는 각기 신의를 지키고 다함께 태평한 시대를 누릴 것입니다.
하늘과 땅, 높은 산과 큰 강의 신령께서 이 맹세를 굽어봅니다.('인조실록" 5년)
읽기를 마치고 서쪽 섬돌에 놓인 탁자위에서 서약문을 불살랐다.
의식이 끝나자 인조는 대궐로 돌아갔다.
다른 참석자들은 문밖으로 나와 제단 앞에 늘어섰다.
제단 앞에는 소와 말의 피와 뼈를 담은 그릇이 놓여 있었다.
조선 대신들이 또 맹세하는 글을 읽었는데 내용은 임금의 것과 비슷하다.
다음으로 후금국 사자가 맹세의 글을 읽었다.
-조선 국왕이 금나라 둘째 왕자와 맹세하여 두 나라가 이미 좋은 관계를 맺었으니 앞으로
마음을 같이할 것입니다. 만일 조선에서 금나라에 대해 원수로 생각하며 군사를 정비하고
새로 성을 쌓으며 나쁜 마음을 가지는 경우에는 하늘이 화를 내릴 것이며, 금나라 둘째 왕자가
나쁜 마음을 가지는 경우에도 하늘이 화를 내릴 것입니다.
두나라 임금이 마음과 덕을 같이해 공정한 도리를 지키고 화목하게 지낸다면 하늘이 도와
끝없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인조실록'5년)
이렇게 해서 후금군이 침입한 지 한 달 20일 만에 정식 화의가 성립되었다.
두 나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는데 아우는 조선이었다.
두 나라의 임금이 같이 참석하지 않고 후금군을 대표하는 아민마저 대리인을 보내 치렀으니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의식은 아니었으나 항복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조 역시 격식에 맞지않는 맹약의 의식으로 진행했는데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치욕을 당했다고
분개했다. 어쨋든 이 의식을 끝으로 전쟁의 막이 내렸다.
곧바로 강화도에 차린 행재소가 철폐되고 남쪽에서 강화도로 들어온 근왕병을 돌려보냈다.
이 전쟁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후금군은 철수하면서 포로 2천여 명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보냈고 예물도 강요하지 않았다.
강홍립과 박난영은 아들을 대신 볼모로 보내고 놓여났으며 한윤은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으나
데리고 갔다.한윤을 돌려주면 처형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후금군은 돌아가는 길에 임진강 언저리에서 한바탕 노략질을 했다.
2개월에 걸친 이 전쟁으로 북쪽 지대 특히 황해도 백성들은 엄청나 피해를 입었다.
후금군은 처음에 노략질을 삼갔으나 후퇴할 때는 서슴없이 약탈행위를 자행했다.
황해도에서는 이런 보고를 올렸다.
"적병이 비록 물러갔으나 산골과 해안 지대에 쏟아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죽이고 약탈해 아들 딸과
재물을 남김없이 쓸어갔습니다. 지금의 화친은 처음부터 백성을 살리려는 계책에서 나왔는데
백성들이 어육으로 돌아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인조실록' 5년)
게다가 조선 군사 사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후금군은 화친이 성립된 뒤에도 지방군이 자신들을 습격해 맹약을 어겼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동강 서쪽을 돌려줄 수 없다고 버티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주둔했다.
그들은 조선여자를 현지처로 삼고 농사 준비를 서둘렀다.
후금군은 조선군 때문만이 아니라 의주 언저리에 출병한 명군이 퇴로를 가로막고 있어서 쉽사리
압록강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 후금군의 한 부대가 바닷가로 나가 선천의 사포를 공격해서
이곳에 도망해 있던 명군과 주민들을 몰살했다. 후금군을 인도한 자들은 조선의 부역자 들이었다.
모문룡은 재빨리 사포의 남은 군사를 철수시키고 가도에서 몸을 빼 신미도로 달아났다.
-번번히 딴지르 거는 국제 사기꾼 모문룡
인조는 광해군과는 달리 모문룡을 감싸고돌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간상모리배의 행동을 벌이고 무리한 요구를 거듭하자 그를 견제하며 적당히 구슬렸다.
낌새를 알아차린 모문룡은 명 조정에 "조선이 금국과 내통해 배반하고 있다" 는 따위로 무고를 거듭하고,
자신은 후금국에 타격을 입히며 공을 세우고 있다고 계속 거짓 보고를 해댔다.
인조는 김상헌을 동지와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북경에 보내면서 모문룡의 무고에 대해
변명하도록 했다.그래서 후금군이 침입할 때 김상헌은 북경에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에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모문룡이 가도일대에서 가로막아
원병요청은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모문룡은 화친이 성립된 뒤 명 조정에, 조선이 배반하고
적과 맹약을 맺었다고 보고했다. 명나라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 은밀하게 군사를 보내
배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2월에 선발대로 등주의 군사 1천여 명을 보내고, 3월안에 등주,영원의
육군, 수군 등 1만 7500여 명을 보낼 준비를 서둘렀으며 모문룡에게도 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선을 도와준다는 것은 명분이고 조선과 요동에 널려있는 명나라 군사와 주민을 보호한다는 목적이
더 컸다.허지만 국력이 쇠잔해진 터라 느려빠지기만 했다.
김상헌은 화친이 성립된 뒤인 3월 9일에야 후금군의 침략사실을 알았다.
그는 명나라 병부 등에 글을 보내 사르후전투를 변명하는 한편 급박한 사정을 호소하며
시급히 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따로 예부에 글을 올려 모문룡이 무고한 사실을 낱낱이 밝혔다.
그런 과정에서 명나라의 원병 출동 계획을 알았으며 그는 황제에게서 조선의 충성심을 잘 알고 있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들었다.
3월말경 명의 원병이 요동과 압록강 일대로 진출했다.
후금군은 명군 3만 5천여 명이 의주 등지에 머물러 있어 후퇴하기가 어렵다고 하며 평양에서 더이상
나아가지 않았다.그러나 요동,의주일대에 들어온 명군은 후금군의 공격을 받아 전투 한 번 제대로
벌여보지 못하고 깨졌다.
조정에서는 전쟁 발발의 과정과 화의를 진행시킨 전말을 상세히 적어 명나라에 보고했다.
"그들이 화의를 제의했을 때 차라리 나라가 망했으면 망했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회답했습니다.
연호를 결단코 쓰지 않고 그쪽 사자의 목을 베었습니다. 끝내 화친을 맺었으나 만 번 꺾이어도
변할 줄 모르는 충성은 뒷날에 가서 명백히 드러날 것입니다.
감히 사실대로 적어 보고하면서 죄주기를 기다립니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는데 명나라 편에서 보면 신실한 주문(奏文)일지 모르나 변명과 과장이 심한
글이었다.
후금군은 한동안 선천,철산 일대에 머물면서 포로 3만 명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후금군이 포로들에게 변발을 시키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골머리를 앓았다.
이들을 강화도에 남겨두면 모문룡군이 전공을 과시하려고 들어와 머리를 베어갈까 염려되고
내지에 살게 해 주민과 뒤섞이면 기찰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대개 남쪽 출신의 백성인데 마침내 모두 원적지로 보낸다는 방침을 세우고 모문룡에게
이들을 죽이지 말라는 통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모문룡은 뒤늦게 육지로 올라와 후금군과
싸우는 시늉을 하다가 발길을 돌려 우리 고을로 들이닥쳐 노략질을 일삼았다.
모문룡은 도망쳐온 조선의 포로를 잡아 머리를 베었으며 후금군과 아군이 없는 지역을 골라 주로
여자와 소년의 목을 베었다.그리고는 머리 모양을 일체 후금 사람의 것처럼 꾸몄다.
그는 4~5천 명 정도의 수급(首級)을 본국에 보내 적을 벤 것이라고 보고하고 포상을 요구했다.
나라의 힘이 약하거나 위정자들을 잘 못 만나면 이래 저래 어육의 신세를 면치못하는 것은 언제나
백성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힘없는 여자들과 어린아이 들이었다.
용골산성에서는 조정에 비밀보고를 올리는 사자를 잡아 문서를 빼앗고 죽였으며,
자신의 사자를 뇌물과 함께 후금군 진영에 보내 내통했다. 그는 중간에서 철저하게 두 나라의
화친을 방해했다.이 사실을 조선 조정에서 뒤늦게 알고 항의했으나 그는 못 들은 척하고
피난민이 우글거리는 섬에서 해적 행위를 계속했다.
4월에 모문룡 휘하에 있는 배 다섯 척이 안주에 들이닥처 창고의 곡식을 빼앗고
여염에 들어가 방화하고 백성들을 죽였으며, 곧 이어 정주로 들어가 방화,약탈, 살인을 저질렀는데
피난민 1만여 명 중에 물에 뛰어들어 살아남은 자가 겨우 3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평안감사 김기종이 이 일을 조정에 보고했다.
"시체가 들판에 널려 있어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군사 100여 명을 보내 한편으로는 군사의 위엄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타일러 만일 살육을 계속한다면 한판 전투를 치르라고 지시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 대책에 부심했지만 의견만 무성했지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해마다 모문룡에게 공급하는 양곡이 국용(國用:조정의 용도)의 삼분의 일 분량이나 되는데
이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결정을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 넘어갔다.
이 무렵 명군 패잔병 1천여 명이 압록강 상류로 올라와 영변 등지에서 민가를 약탈하고 다녔지만
조정에서는 방관하면서 한숨만 쉬었다. 오히려 후금군이 백성들을 죽인 명군을 잡아 인계하면서
죽이라고 당부하면 지방관이나 장수들은 손을 내저으며 도망쳤고, 더러 인수를 받더라도
슬그머니 놓아보냈다. 이러니 명군의 횡포가 줄어들 리가 없었다.
-겉으로는 가깝고 속으로는 먼 두 나라
5월에 들어 후금군은 청천강을 넘어 마지막 보루인 의주에 집결했다.
선발대는 먼저 봉황성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즈음 후금국의 태종이 정식 국서와 예물을
유해와 용골대에게 들려 보냈다. 강홍립,박난영이 거느리고 있던 중국인 250여 명과 조선 사람
30여 명, 마소 30여 필, 수레 5대 등의 예물도 보내왔다.
조정에서는 대책을 논의한 끝에 보내온 중국인 문제에 대해서는 "작은 나라의 신하로서
큰 나라의 백성을 부릴 수 없다. 매우 감격하기는 하지만 감히 받을 수 없다" 고 대답하고
예물을 받되 사신으로 부터 직접 전달받지 않고 담당 관리가 챙기기로 했다.
임금이 사신 접견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유해는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예물을 도로 가지고 가겠다고 했고 용골대는 말을 돌려
곧장 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인조는 인질로 갔다 돌아온 원창군과 이흥망을 불러 앞뒤의 사정을 들었다.
"그들을 접견하는 절차대로 만나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당신네 나라에서 모문룡을 쫓아버리지
않아서 우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의주에 군사를 남겨둔 것은 모문룡을 대비하기 위해서 이지
다른 뜻은 없다' 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전해 인조는 사신을 접견하기로 결정했다.
유해는 오는 도중 조선 조정에 비빌보고를 보냈다.
자신이 화의를 주선하고 귀국을 친절히 대함은 명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한 것이며
후금군이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면 멸망에 빠질 것이다.
어제 명나라의 비밀 지시를 받았는데 바로 조선이 명나라를 섬기는 문제였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지난날의 위험한 길을 다시 밟지 말라.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유해는 명나라의 첩자였다.
후금의 사신이 궁궐로 들어올 때 접근하는 벼슬아치가 문밖에서 맞이하지 않아 통역관과 함께
400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 들어왔다.
이 때문에 두 사신은 잔뜩 화가 나 있었는데 임금이 좋은 말로 달래고 태종의 국서를 받았다.
'명나라는 자기만 하늘의 아들이라 하고 모든 나라의 사람들을 아랫사람으로 여기며
갖은 방법을 다해 속이고 침해했습니다. 이를 참아낼 수가 없어 하늘에 고하고 정벌했습니다.
하늘의 이치는 아주 공정해서 나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그가 하는 일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
우리를 도와주고 저들을 죄주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두 나라는 길이 형제의 좋은 관계를 가지며 절대로 세력을 믿고 남을 속이는
명나라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맹약을 맺은 뒤로 귀국 사람이 도망쳐 우리나라에 오는 경우에는
우리가 당장 찾아내 돌려보낼 것이며 금나라 사람이나 중국 사람 또는 조선 사람 포로로 귀국(조선)으로
도망친 자가 있으면 역시 찾아내 돌려보내야 합니다. 서로 숨겨, 찾아내 보내주지 않는다면
두 나라의 화친을 유지하는데 신의가 없고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인조실록' 5년)
조선 조정에서는 중국 포로에 대한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큰 나라의 사람을 부려먹을 수 없다.남쪽 섬에 보내 살게 해야 한다.
모문룡에게 돌려보내주자는 등 의견이 분분했으나 인조는 시끄러운 논란을 중지시키고
23명의 중국인 포로를 받아들여 충청도와 전라도에 나누어 보냈다.
지금 서산일대의 해안 지방에 가(賈)씨 등 중국 성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사는데 이때에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7월에 들어 몽골의 니르 부대는 거의 다 돌아가고 일부만 남아 여진 니르 부대와 의주에 주둔해
간간이 선천 등지에서 모문룡군이나 조선군과 충돌을 빚었다.
이즈음 박난영 등이 후금국 사자와 함께 호행관(護行官)이라는 이름으로 압록강을 넘어갔다.
이들에게 사신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가는 길을 보호해주는 벼슬아치'라는 뜻의
임시 명칭을 붙인 것은 물론 명나라와의 관계를 의식해서이다.
하지만 이름만 그랬을 뿐 말할 나위 없이 외교 사명을 띤 사신이었다.
일행이 7월 7일 심양 십리 바깥에 있는 혼하가에 도착했을 때 후금의 장수들이 나와 잔치를 베풀며
융숭하게 접대해주었으며, 국서에 들어있지 않은 요구까지 말해보라고 했다.
조선 사신은 세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첫째, 우리 경내에 주둔한 군사를 철수할 것.
둘째, 일단 화친을 맺었으니 두 나라 사이에 근거없는 말을 꾸며 이간질하는 자를 서로 잡아 보낼 것.
셋째, 교섭하러 온 우리 사신 네 명을 돌려보낼 것.
두번째 요구는 바로 모문룡을 암시한 것이다.
사신은 태종과 왕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국서와 예물을 드렸다.
국서는 상투적인 내용이었으나 그 기저는 싸우지 말고 잘 지내자는 것이었다.
사신 일행이 돌아올 때 그쪽 사신으로 아질월개가 왔고, 이 편에 오신남 등 억류인사를 딸려 보냈다.
후금이 보낸 국서에는 모문룡이 출몰해서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켰다는 사실과
포로를 교환하자는 제의를 하면서 은근히 싸움을 돋우지 말라는 위협을 한 자락 깔았다.
두 나라는 사절 교환으로 평화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8월경에 후금군이 의주 일대에서 거의 다 철수했다.
전쟁이 벌어진 지 7개월 만에 실제적인 종전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 1차 전쟁으로 우리나라의 북쪽 지대는 엄청난 피해를 겪었다.
평안도, 황해도 주민의 40퍼센트가 죽거나 도망치거나 이주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임진왜란 기간에 별 피해를 입지 않았던 지역인데 이번에는 더 큰 참화를 당한 것이다.
모문룡군이 끊이없는 노략질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행패인데도 조정에서는
항의 한 번 못하고 방치했다.
그런데다 여름에 홍수가 지고 전염병이 크게 퍼져 고통을 가중시켰으며 화의를 성립하고
하늘에 맹약한 뒤에도 서로 약속을 어기고 전쟁 행위를 계속했다.
후금은 조선을 믿지않고 조선은 대명 사대에 빠져 속임수로 화친을 맺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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