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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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 호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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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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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모문룡이 조선 조정에 양곡 10만 석을 요구하는 한편 의주 절제사 이완을 교체해 달라고 요청했다.
모문룡은 가도에 있으면서 인조 조정의 후한 대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횡포를 부렸다.
가도를 거쳐 북경에 들어가는 사신 길을 막는가 하면 조선에서 명나라로 보내는 보고서를 가로채기고 하고,
자신이 연달아 후금군을 공격해 타격을 입힌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
그는 의주를 건너 후금 지경을 넘나들면서 물건을 사고파는 모리행위에만 몰두했다.
조선에서도 사정을 어느정도 알고 있어 이완이 별로 협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은 모문룡을 믿지못해 이완의 교체를 거부하고, 지난해에 흉년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양곡 3천 석을 보내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완은 이순신의 조카로 이순신이 전사할 때 곁에서 지키며 그 사실을 숨겨 장졸들의 동요를 막은 인물이다.
후금의 태종은 마침내 출정을 지시했다.
병력은 기병과 보병을 합해 3만 5천여 명으로 편성했다.
이왕자(二王子)라 불리는 아민(누르하치의 조카)이 총사령관으로 부대를 지휘했으며
선봉장은 유해(劉海)였다.유해는 조선의 진주 출신이라고도 하고 만주의 요동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확인할 수가 없다.그는 명나라 지위관인 유정의 휘하에 있다가 사르후전투 무렵 후금에 투항해서
공을 세워 아민의 사위가 되었다.
침략군은 몽골, 중국 사람이 포함된 혼성부대였다.
강홍립,박난영 등 조선 장수들과 통역관이 동행했으며 한윤도 행군대열에 끼였다.
후금은 뒷날 보내온 국서에서 출병 동기를 네가지로 밝혔다.
첫째, 두 나라는 본디 원수진 일이 없는데 아무 까닭도 없이 명나라 군사를 도와 우리나라를 공격했다.
둘째, 우리나라가 요동을 차지했으나 조선은 이웃 나라로서 일찍이 한마디 좋은 말이 없다가
모문룡을 숨겨주고 그에게 양곡과 말먹이를 공급했다.
이를 고치지 않아 글을 써서 조선에 보내 모문룡을 결박해 와서 두나라 사이에
좋은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했으나 달가와 하지 않았다.
신유년(1621년)에 우리가 모문룡을 잡으려고 조선에 들어갔을 때 민간에 아무 피해도 주지 않았는데
조선은 사례조차 않고 무시했다.
셋째, 모문룡을 조선에 놓아두고 우리의 도망치는 백성을 유인해 우리 지경에서 도둑질 하게 했다.
도망민은 여진족과 한족이 섞여 있는데 이들 1천여 명이 만주 땅과 우리 땅을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았으나 조선은 늘 방관했다.
넷째, 우리 황제가 죽었을 때 원수 사이인 명나라도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예물을 가져와
새 황제를 축하해 주었다.더구나 우리 황제는 조선과 털끝만큼도 좋지않은 마음을 가진 적이 없는데
조선에서는 한 사람도 조문하거나 축하하러 오지 않았다.('인조실록'5년)
1627년 1월 13일 새벽, 침략군의 선발대가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국경을 넘는 시간,
의주의 군사들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후금군은 순식간에 의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조선군은 하루 내낸 맞서 싸웠는데 해가 저물 무렵 화약과 화살이 바닥나자 군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명나라 옷을 입은 한윤이 사냥꾼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와 문을 열어 후금군을 끌어들이고
군기 창고에 불을 질러 성안은 혼란에 빠졌다.
사로잡은 도망병으로 부터 성밖의 수로와 성문을 연결하는 지하로를 알아낸 적군은 한밤에
지하로로 잠입해 성안에 불을 지르고 내응한 조선군과 함께 성문을 열어 젖혔다.
갑자기 대군이 쏟아져 들어와 세찬 공격을 퍼붓자 성안에 남아 던 조선군이 항복했다.
적군의 장수가 남도 군사와 북도 군사를 가려낸 뒤 남도의 군사를 모조리 죽이고
항복한 군사의 머리를 깎아 자기네 군사에 편입시켰다.
책임자인 이완은 전투 도중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적군이 가마솥에 삶아 하늘에 제사지냈다고도 전한다.
후금군은 공격로를 세 길로 나누었다.
하나는 서쪽 용천의 용골산성을 거쳐 사포로 가는 길,
하나는 남쪽 곽산의 능한산성으로 내달아 선천쪽으로 내려오는 길,
바다를 통해 가도와 철산의 신미도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두 성은 방어의 요새인데 후금군의 공격을 받아 능한산성은 쉽게 함락되고 용골산성에서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모문룡은 후금군의 칩입 소식이 전해지자 군진을 가도에서 신미도(운종도)로 옮겼다.
후금군은 일주일 후에 얼음을 타고 청천강을 건너 안주 방면으로 내려왔다.
적은 진격 도중 어디서나 이렇게 떠들었다.
"오늘의 일은 옛 임금(광해군을 지칭)을 위해 수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하면 10년 동안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줄 것이다."
이 작전은 한윤의 건의에 따른 것인데 충분히 민심을 충동질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강화도는 단골 피란지
조정에서는 후금군이 침입한 지 나흘이 지나서야 수령들로 부터 엉성한 보고를 받았다.
그저 적이 물밀듯이 안주 방면으로 내려온다는 정도의 보고였다.
임금은 대신들과 대책회의를 열어 병조판서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총지휘를 맡기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근왕병을 모집하면서 안주,황주,평산에 방어진을 구축해 적의 남하를 지연시킨다는 작전을 쫬다.
장만은 3만 명 정도의 군사면 충분히 적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임금은 군사를 모집하는 책임자를 전국에 파견했으며, 임진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정하고
장만이 이끄는 군사를 이곳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황해도가 점령당하면 임금이 강화도로 피란간다는 계획도 세웠다.
고려 말기 이후 조용했던 강화도가 또다시 전쟁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강화도에 비축한 양곡이 2~3만 석에 지나지 않아 장기전에 대비하기는 어려웠다.
세자를 전주로 내려보내 임진왜란 당시처럼 분조(分朝)의 구실을 맡기는 한편 김상용을 서울을 지키는
유도대장으로 임명했다.
결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지만 장만은 어찌된 영문인지 성대한 출정식을 갖고도 이틀이 지나서야
벽제를 출발했고 닷새가 지나서야 임진강 방어선을 넘어 개경에 이르러 전진을 멈추었다.
후금군은 8일 만에 안주성을 포위했다.
짐을 싣고 오는 낙타의 걸음은 말보다 느렸지만 방어군이 거의 없어 행군속도가 빨랐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었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군제(軍制)를 직업군 위주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소위 속오군(束伍軍)제도로 고쳤으나 양반과 관청의 종이 부역과 신공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자 이들 상전이 손해를 보게됨에 따라 실시한지 10여 년 만에 이들을 모두 돌려보냄으로서
이때부터 이 제도 역시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따라서 훈련된 상비군이 없는 상태에서 또다시
외침을 맞았으니 임진왜란 당시와 똑 같이 적은 신속하게 수도로 진격해 오고 이와함께 국토 또한
다시 한 번 무인지경으로 유린되어갔다.
평안병사 남이홍이 군사 3천여 명과 함께 안주성을 지키고 있다가 적정을 살피기 위해
군관 한 명을 골라 적진으로 보냈다. 적군 장수가 그를 만나 호되게 꾸짖었다.
"너희 나라는 무엇 때문에 호패법을 만들어 백성을 학대하며 사신을 보내 이웃 나라와
우호를 다지지 않고 국교를 끊는가?"
남이홍은 결전을 서둘렀다.
그는 성안의 여염집을 한 채도 남기지 않고 불태워 결사항전의 결의를 보였다.
적군은 심한 타격을 입으면서도 줄기차게 성벽을 기어올라와 성안으로 들어왔다.
열세에 몰린 아군이 성 중앙에 있는 건물로 집결했다.
적군 사령관 아민이 앞에 나서서 항복을 권유했으나 대답은 거절이었다.
조선군은 각자 몸에 화약포대를 두르고 옆에 있는 화약고에 불을 붙여 한꺼번에 폭사했다.
가까이에 있던 적군 수백명도 불길에 휩싸여 죽었다.
이들의 장렬한 전사에 아민도 감동을 받았다.
아민은 성안의 사람들을 죽이는 병졸들을 말리고 남은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후금군은 거의 장애를 받지 않고 내려오면서 조선 조정에 글을 보내 화의를 제의했다.
이 글을 받은 조정에서는 화의를 맺어 군사를 돌려달라는 요청의 글을 보냈다.
그때 평양에는 8천 병력이 있었는데 적군이 가까이 이르자 대부분 도망치는 바람에 감사 윤훤도
어쩔수 없이 달아나고 말았다.
후금군은 평양을 무혈점령하고 계속해서 황주로 진격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마침내 1월 27일 강화도로 파천의 길을 떠났다.
임금을 실은 수레가 자취를 감출 때쯤 서울을 호위하는 책임을 진 장수들까지 덩달아 몸을 숨겨버렸다.
백성들은 엎어지고 자빠지며 서울을 벗어났고 피란가지 못한 백성들은 양반집 개와 닭을
마구 잡아 먹고 빈집을 털었다.
포졸이 막으려고 하면 칼을 들고 대항하는 험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궁궐과 관아 건물을 불태우지는 않았다.
장만이 후금국의 선봉장 유해가 평산에서 화의를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다고 알리면서
옷감 5천 필을 주어야 화의가 성립될 것이라는 강홍립의 글도 함께 보냈다.
후금의 사자는 장만이 보낸 사자가 조금 기다리라고 부탁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않고 행재소로 내달렸다.
행재소에서는 사자들을 강화도에 들이면 우리의 실정을 캐내려고 할지 모르니
임금이 광성진을 건너가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는 따위 의견이 분분했다.
바닷길이 험한 승천포에서 갑곶으로 인도해 그들로 하여금 강화도롤 오는 길이 위험한 형세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해 후금의 사자들을 이 해로를 따라 인도했다.
후금의 사자들은 갑곶에서 국서를 전달했다.
"대금국의 둘째 왕자(아민)는 조선 국왕에게 회답합니다.
두 나라는 똑같이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훌륭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귀국이 진심으로 화친을 바란다면 그대로 남쪽 조정(명나라를 낮추어 부르는 말)을 섬길 필요가 없으며
그들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우리나라는 형이되고 귀국은 아우가 되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남쪽 조정에서 노여워한다 해도 이웃나라인 우리가 가까이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참으로 이 의견에 동의한다면 우리 두 나라가 하늘에 고하고 맹세한 다음 길이 형제의 나라로서
다같이 태평시대를 누릴 것입니다. 성사된 뒤의 표창은 귀국의 처사에 달려 있습니다.
국사를 담당할 대신을 보내 빨리 결정하여 일을 마무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은 먼길을 왔다가 돌아가는 우리를 붙들어 두고 오래 지체시켜야 할 것이니
거북한 노릇입니다.
나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보지 마십시오."('인조 실록' 5년)
국서는 부드럽게 표현됐으며 위협적인 언사가 없다.
그러나 후금은 무명을 비롯해 많은 물품을 요구했다.
후금에서 요구하는 강화조약의 핵심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어라는 것과 자기 나라를
형의 나라로 대접하라는 것이었다.
행재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논란을 벌였다.
결국 명나라와의 단교는 영의정 윤방의 의견에 따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후금을 형의 나라로 섬기는 문제는 이정귀의 의견에 따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기본방침에 따라서 사자를 접대하는 벼슬아치들이 두 나라가 우호을 맺을 뿐이지
대의에 관련되는 부당한 말은 제기하지 말자고 설득했다.
유해는 푸짐한 대접을 받으며 만족해했으며 강홍립이 말한 옷감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후금군은 중화에서 일단 후퇴해 귀추를 기다렸다.
인조는 진해루에서 돌아가는 사자를 접견하고 간단한 회답의 글을 보내면서 뒤따라 고관을 보낼 때
자세한 내용을 알리겠다고 적었다.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균관 유생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오랑캐의 사자와 박난영의 목을 베어 함에 담아서 명나라에 보낼 것이며,의리를 내세우고
화의를 배격하며 마지막까지 한바탕 싸워야 합니다."
이 주장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화의를 반대하는 글을 올렸지만 허공을 치는 메아리였다.
조정에서는 강인을 회답사로 선정했다.
강인은 강홍립의 숙부인데 벼슬살이를 하지않고 야인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를 가짜 형조판서로 만들어 회답사로 보낸 것이다.
이 일은 후금국 외교에서 사술을 부린 단초였다.
그뒤 조선은 왕자까지 가짜로 만들어 보내는 등 속임수를 많이 썼다.
회답서에서 인조는 두 나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와 갑작스런 침입으로 놀라 마지않았다는 점을
말하고 명나라에 사대은의를 늘어놓은 뒤 이렇게 이었다.
...큰나라를 섬기고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는 데는 본디 마땅한 방도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귀국과 화친함은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이고,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지 않음은 큰 나라를 섬기기 위해서 입니다.
이 두가지 일은 함께 시행해도 서로 어긋남이 없습니다.
오직 제각기 나라을 지키면서 양쪽이 자기 도리를 다하고 서로 안락하게 지내며 대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간절한 소원이며 하늘도 기뻐할 것입니다.
귀국은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인조실록' 5년)
글의 내용이 뻣뻣한 편이고 더구나 끝에다 명나라 연호인 천계(天啓)를 썼다.
상대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답서였다.
강화를 놓고 국내외적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사림츨신의 벼슬아치들은 이귀와 최명길이 화의를 주장해 대의와 나라를 그르쳤다고 탄핵했으며,
장만이 임진강 요새를 버리고 달아난 죄를 물어야 한다고 소동을 벌였다.
후금에서는 천계 연호를 쓴 사실을 지적하며 강경하게 나왔다.
"이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는 서울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을것이오."
곧이어 인조는 적군이 진군해 서울로 내려오고 있다는 강인의 보고를 받았다.
임금은 양쪽 틈바구니에 끼어 어쩔 줄 몰라했다.
더욱이 후금군은 옷감 4만 8천 필,소 4천 마리를 달라고 통기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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