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38
병자 호란(4)
 글쓴이 : …
조회 : 380  
-철저한 숙청작업

반정 후 광해군의 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벼슬아치들은 도망가거나 자살하거나 처형당하거나 했다.
이이첨은 그날로 잡혀와 밤에 문초를 받고 다음날에 처형당했다.
박승종,박자홍 부자는 광주로 도망쳤다가 자살하고, 인목대비를 못살게 굴었던 정 소용은
궁중에서 자살했다. 궁녀들은 인목대비가 직접 다스렸다.
궁녀 11명이 잡혀와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사약을 받았다.
특히 상궁 김개히는 사지를 찢어 죽였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살생부(殺生簿)에 들어 있는 사람 가운데 도망쳤던 자들과
시골에 숨었던 자들이 속속 잡혀왔다.
정형(正刑)을 받아 벼슬아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화문의 서쪽 군기시 앞에서
처형당한 사람이 16명이고,사약 따위로 죽음을 받은 사람이 67명이었다.
그 다음으로 가시울타리에 갇히는 유배형을 받은 사람이 68명,단순한 유배형을 받은 사람이 80명이었다.
폐모(廢母)론에 가담했거나 하수인 노릇을 했던 벼슬아치들 중에 도망친 사람이 116명에 이르렀다.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금부 도사에게 잡혀왔다.
정인홍은 광해군이 두텁게 신임했으나 합천에서 나오지 않고 학문과 제자양성에 몰두하면서
조정에 일이 있을 때마다 의견을 냈다.
이이첨이 늘 그의 명망을 업으려 노력해 대북파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당시 90세의 노인이었는데 서울로 끌려와 문초를 받은 지 3일 만에 정형을 받았다.
이귀와 개인감정이 깊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그보다는 철저한 숙청작업의 일환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외 미온적으로 행동했거나 심부름꾼 노릇을 했던, 50여 명에 이르는 벼슬아치가 관직을 빼앗기고
쫒겨났으며, 단순히 죄인을 잡아들이는 일에 동원되었던 금부도사 이승헌 등과
폐모 논의에 눈치를 살피던 남이공 등 57명은 현직을 잃었다.
피의 보복과 싹쓸이로 350명 가량이 죽음을 당하거나 조정을 떠났다.
근세조선이 들어선 뒤 여러번 정변을 겪었으나 이처럼 철저한 숙청을 단행한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광해군과 왕비, 그리고 세자 부부는 한동안 궁궐 당직실에 연금해 두었는데 인목대비는
이들을 처벌하는 일에 안달이 났다.
새 임금에게 빨리 유배를 보내라고 독촉했지만 새 임금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두 번 절하며 요청한다" 는 구절을 넣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 하였다.
마침내 조정에서는 광해군 부부와 세자 부부를 강화도로 유배보내기로 결정했다.
광해군은 폐모 논의가 일어났을 때 "바닷가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 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이 씨가 되어 정말로 바닷가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교동도, 제주도 등지로 유배지를 옮겨다니며 살았는데, 조신스런 행동거지를 보여
제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렇게 해서 대북파가 이끌고 소북파가 참여했던 정권은 홍수에 쓸려간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뒤 대북파는 조정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며 그 후손들도 도망쳐 숨을 죽이고 살았다.
이 사건을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하는데, 가혹한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남인들은
불똥이 자기들에게 튀지않을까 한동안 눈치를 살피며 지냈다.

그런데 폐모논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던,온건한 박홍구와 이광정이
각 각 우의정과 이조판서에 등용되자 반정참가자들의 입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이귀가 "선비들이 오늘의 거사는 윤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 라고 하면서
적극 반대하여 예전의 잘못을 문제삼아 쫓아냈다.
이 말은 반정의 명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말(혁명의 명분이 윤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로서,
이 말 한다디만 가지고도 미루어 짐작컨데, 혁명주체나 당시 선비들의 의식이라는 것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말든 내 알바 아니고 사대와 공자의 윤리만 바로 세우면 된다는 것이니,
한 나라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자세가 이러고서야 어찌 나라가 온전히 보존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누구나 아니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세우는 것이 언필칭 윤리이지 사실상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부귀영달일 것이다.

또한 서인정권의 당파적 인사,사적친분에 의한 인사전횡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은 준절한 평가를 내렸다.

-옛날부터 나라의 흥망은 당파의 화가 원인이 되지 않은 적이 없다.
더구나 새로운 정사를 시작하는 시기에는 더욱 깊이 경계해 철저히 불식시키기에 여념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벼슬아치를 선발 등용하면서 아직도 사사로운 감정을 따르는 자취가 보이고,조정안에 대립하는
조짐이 날마다 자라고 있으니 벼슬아치들 사이에 서로 돕고 존대하는 성과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인조실록' 1년)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도 반정세력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반정 훈신 가운데 명망있는 이가 많았으나 그뒤의 처신과 마음가짐을 보면 당초에 털끝만큼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순수히 종묘사직을 위해 거사한 사람은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최명길,장유,이해 등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광해군의 비정을 바로잡기 위해 거사했다는 명분이 결국 당파적 이해로 퇴색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관직을 정돈한 뒤 서인정권은 쿠데타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봉하는 일을 추진했다.
정사공신 1등급에는 이귀,김자점 등 10명, 2등급에는 이괄,이시백 등 15명, 3등급에는 28명이 올랐다.
공신들은 이이첨 등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나누어 받았다.
반정공신 한 신하가 탐욕을 부려 "중종께서 반정을 단행한 뒤 연산군의 궁녀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이 관례에 따라 광해군의 궁녀를 나누어 달라" 고 했지만 인조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상급으로 주는 이 공신책봉이 오히려 큰 말썽을 빚었다.
어찌된 일인지 한때 총대장으로 추대된 이괄이 이귀의 아들인 이시백,이시방과 같은 2등급에 들었다.
이괄은 자신이 무관 출신이라 문관들이 낮추어 보아 이렇게 되었다고 불평을 품었으며,
다음해에 서인정권에 반대해 난을 일으켰다.
전열을 정비한 서인정권은 조정의 현안문제에 손을 대 광해군의 정사, 특히 외교관계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후금과 곧바로 교류를 단절하고, 그 동안 후금과 연락 임무를 맡았던 평안병사 박엽과
의주부윤 윤준을 명나라를 배반했다는 명목으로 처형했다.
후금과 벌이던 교역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인조는 가도의 모문룡이 보낸 사자를 맞이해 융숭하게 대접했다.
"도독부(모문룡을 가리킴)가 우리나라에 온 뒤 의로운 목소리로 하늘을 흔들었으나 간청을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소.
나는 도독부와 한 마음으로 협력해 기어이 이 오랑캐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릴 것이오."
그동안 광해군은 가도의 명군이 요청한 물품 공급 등을 거절하고 모문룡이 보낸 사자도 만나주지 않았다.
인조는 장만을 원수로, 이괄을 부원수로 삼아 평안도로 나가서 군사를 모아 훈련시키라고 지시했으며,
관서 지방의 내수사 노비를 군대에 편입시켰다.
장만이 1만 5천명의 병력을 길러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인조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적절히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의견을 나누던 중 인조는 야전보다는 수성 전술이 더 효과적이라고 일렀는데 이것은 후금의
정확한 실정을 모르는 채 주먹구구식으로 세운 전략이었다.
인조는 명나라에 반정사실을 알리는 일을 서둘렀다.
5월에 종친부에서 먼저 모문룡에게 글을 보내 광해군을 몰아낸 일과 그가 사대의 은의를 저버린 일을
설명하고 명군에게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다짐했다.
명나라에 보낸 공식 문서에서는 새 임금 인조의 공인을 부탁하고 명나라와 합동해 후금을
공격하겠다고 다짐했다.
반정 이듬해인 1624년 1월, 이괄의 변란이 일어났다.
이괄은 2등급의 공신호를 받은데다 병조판서 자리를 주지 않고 부원수로 삼아 지방으로 내보낸 조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도원수 장만은 평양에서, 이괄은 영변에서 군사훈련을 담당했는데 그의 휘하에는 정병과
항왜군(降倭軍)이 모여있어 군세가 강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정치권력을 다지려고 밀고를 장려했다.
공을 노리는 어느 인사가 이괄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자질해 순식간에 서울에 있던 기자헌 등
50여 명이 잡혀왔다.
의금부 도사가 이괄의 진영으로 쫓아가 연루자를 잡으려 했으나 이괄이 오히려 의금부 도사를
처단해버렸으며 내친 김에 군사 1만 여명을 동원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는 평양에 있는 장만군을 피해 황해도,경기를 거쳐오면서 앞길을 가로막는 관군을 격파하면서
승승장구로 내달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서울에 잡아놓은 기자헌 등 50여 명을 조사도 거치지 않은채
내응세력이라는 혐의만을 두어 그대로 처단해버렸다.
이 처사는 뒷날 큰 비난거리가 되었다.
반란군은 홍수가 밀려들듯 거침없이 개성을 거쳐 벽제에 이르렀다.
반란군이 코앞으로 들이닥쳤다는 소식에 놀란 인조는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한 채 피란길을 떠났다.

캄캄한 밤중에 한강에 당도해 뱃사람들을 찾았지만 모두 숨어버렸는지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선전관 한 사람이 헤엄을 쳐 강 한가운데 떠 있는 나룻배 한 척을 끌고 와 겨우 강을 건넜다.
임금이 된지 10개월 만에 이렇게 험한 꼴로 파천하게 된 인조의 머릿속에 할아버지 선조의
옛일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대비,왕비,세자는 길을 나누어 강화도로 도망가다가 수원에서 임금과 합류했다.
수원에 이르러 일부 신하들이 "부산에 거류하는 일본 사람들을 청해 반란군을 막자"고 제의했지만
그들이 본국에 연락해 군사를 보내려면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주장에 밀려 일단 논의를 중지했다.
왜군의 왜자(倭字)만 생각해도 일반 백성들은 치를 떨 정도인데, 직접 체험한 백성들이나
조정신하들이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임진왜란이 그렇게 "까마득한 옛일이 아닌데도
조정에서 왜군을 청하자는 논의를 했다고 하고 또 그것이 단지 일정이 안맞아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이 나라가 얼마나 얼빠진 위정자들에 의해서 다스려 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인조는 공주에 이르러 겨우 한숨 돌리고 금강 연안에 지방군을 배치해 방어했다.
반란군은 서울로 들어오면서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괄이 백마를 타고 의기양양하게 서울로 들어오자 호응하는 군사 수천명이 마중을 나왔다.
기병들이 앞장서서 크게 외쳤다.
"도성 사람들은 놀라지 말라. 새 임금이 즉위했다."
관아의 벼슬아치와 하인과 노비가 앞을 다투어 몰려나와 만세를 부러며 맞이했고 도성민은 길을 닦고
새 황토를 깔아 영접했다.
이괄은 선조의 열번 째 아들인 흥안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새 조정을 꾸몄다.
새 조정은 밀려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장만은 도성 백성들이 반란군에 동조할 시간을 주지않고 급박하게 공격한다는 전술을 세웠다.
그는 질마재를 점령해 도성을 내려다 보며 공격하고 반란군은 올려다보며 맞서게 되는 지점을 선택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괄은 항왜군을 앞장세워 응전했으나 서북풍을 안고 싸우는 바람에 흙먼지로 눈을 뜨기가 어려워
점점 밀려났다. 마침내 반란군이 도성 안으로 후퇴하려 하자 동향을 엿보던 백성들이 돈의문과
서소문을 닫아버려 숭례문으로 밀려났다.
이괄은 사세가 불리하자 반란군 수백 명을 이끌고 수구문으로 빠져나와 광주로 도망쳤다.
서울을 점령한지 겨울 이틀만이었다.
이때 부하 몇 명이 이괄과 한명련,이괄의 아들 등 9명의 목을 베어 장만에게 바쳤다.
이괄의 반란은 거사한지 10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반란군이 진압된 뒤 조정에서는 기찰을 강화하고 고변 고발을 적극 장려했다.
때를 만난 듯 사람들은 작은 혐의라도 있으면 서로가 고자질을 일삼아 민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괄의 반란 후유증과 무리한 호패법 실시는 국력을 소모시키고 민심을 이반시켰다.
게다가 서북 지방의 군사체계가 거의 무너져 후금의 칩입을 앞두고 국방의 수비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조정에서는 경기 일대의 수도권 외곽 지역 방어를 위해 새로운 군사조직인 총융청(摠戎廳)을 설치해
2만 명 가량의 병력을 속오군 편제로 소속시켰다.
그러나 군량미를 확보하지 못하는 등 군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누르하치는 하나의 작은 도둑일 뿐인데 수천 리 넓은 땅인 우리나라에서 어찌 도둑을 막을 사람이 없겠는가?"
인조는 입으로만 장담했지 정작 후금의 동정이나 군사력을 알아보려고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늘 "명나라를 멸망시키면 조선은 주머니에 든 물건과 같다" 고 말했다.
후금의 칩입 직전의 우리나라의 군사적인 대비상태나 민심이 이러한데도 군주의 자세가
이렇게 안일하였으니 어찌 치욕스런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후금은 사르후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수도를 흥경에서 요양으로 옮겨 명나라를 압박하다가
1625년(인조3년) 안전지대인 심양으로 옮겨가 성경(盛京)이라 불렀다.
그 다음해에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산해관' 을 공격하기 위해 그 앞쪽에 있는 영원성으로 쳐들어갔다.
영원성은 명장 원숭환이 지키고 있었다.
원숭환은 후금의 칩입에 대비해 마음을 다잡고 결전채비를 서둘렀다.
영원성이 함락되면 산해관이 함락되고 산해관이 함락되면 북경은 몸을 맡긴 처녀꼴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원숭환은 복건성에 지시해 포르투칼에서 유입한 홍이포를 실어오도록 했다.

새카맣게 모여든 후금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홍이포가 굉음과 함께 시뻘건 불을 토해냈다.
떼르 지어 몰려오던 후금군은 차례로 죽어 넘어졌다.
뜻밖에 고전을 겪은 누르하치는 후퇴를 명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짐은 25세 때부터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고 공격하여 무찌르지 못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해 이 작은 영원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는가.
하늘의 뜻이로다."
누르하치는 이 전투 후에 전선의 후방에서 여러 날을 울화병에 시달리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대포의 파편에 부상당해 죽었다고도 한다.

68세의 나이로 죽은 누르하치는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았다.
그에게는 1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칸의 자리는 야심에 찬 홍타이지(태종)에게 돌아갔다.
홍타이지는 여덟째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전선을 다니며 많은 공을 세웠다.
명나라와의 관계가 긴박했던 때라 이들은 후계자 다툼을 벌이지 않고 홍타이지를 칸으로 옹립했다.
태종은 조선에 대해 일찍부터 강경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조선을 혼내주어야 겠다고 벌렸다.

그의 마음을 알고나 있다는 듯 마침 한윤 패거리가 심양으로 찾아들었다.
이괄의 난 때 선봉장이었던 한명인이 부하에게 죽었는데 그의 아들인 한윤은 패거리와 함께
재빨리 귀주로 달아났다.그러나 그곳에도 일대 수색령이 내려져 있어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한윤은 패거리와 함께 국경을 넘어 만주땅으로 들어가 심양으로 내달렸다.

일행은 후금 장수의 안내로 강홍립 등 억류돼 있는 장수들을 만났다.
한윤은 한꺼번에 원한을 풀려는듯 광해군이 ?i겨난 것과 새 임금이 후금을 배반하고
명나라의 지시만을 따른다고 고자질 하고 강홍립과 박난영이 후금에 부역했다고 해서
가족을 처형했다고 거짖말까지 늘어놓았다.
그는 하루바삐 군사를 동원해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고 태종을 부추겼다.
태종은 그렇잖아도 시기를 재고 있던 참인데 이 말을 듣자 공격을 늦추
수 없다고 결단했다.
강홍립이 원수를 갚으려고 태종에게 출병을 독촉했다고 하는 얘기도 있는데 뒷날의 정황으로 보아
본국에서 꾸며낸 모략으로 보인다.
억류되어 있던 9년 동안 강홍립은 광해군에게 끊임없이 정보를 보고하며 대책을 강구하려 노력했고,
상투를 자르지 않은 채 고국에 대한 충성심을 지켰다.
강홍립의 속마음을 아는 태종은 그를 신임하지 않았으며 주머니에 든 장도쯤으로 여겨
적당한 시기에 꺼내 써먹으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