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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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 호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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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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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후금에 억류되어 있는 강홍립이 조정에 "금국이 조선의 변경으로 쳐들어 갈지 모른다" 는
비밀 보고를 올렸다.
광해군은 강홍립의 가족을 통해 뇌물로 쓸 물품을 보냈다.
그는 이 뇌물을 막후 외교를 벌이는 데 썼는데 실제로 강홍립의 이 막후외교는 뒷날 여러모로
유효하게 나타났다.
조선에서 보낸 미지근한 회답의 글을 받은 후금에서는 조선 정벌을 주장하는 장수들도 있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이들을 설득해 일단 조선과 화의를 유지하면서 본격적으로 명나라 공격에 나섰다.
明軍은 싸움마다 밀려 이리저리 흩어졌다.
1619년(광해군 11년), 한마디로 황제답지 못했던 명나라 만력황제가 죽음으로써
조일전쟁(임진왜란)의 주역은 모두 사라졌다.
그후 2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후금은 요양과 철령을 점령해 만주 땅에서 명나라 군사를 쫓아내고
명실상부한 만주 통일을 이룩했다.
이렇게 되자 요동 쪽의 육로가 막혀 조선은 명나라에 황제의 죽음을 조문하는 사절이나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을 뱃길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려 때와는 달리 배부리는 기술이 부족하고 항로에 익숙하지 않아,
사절들이 탄 배가 발해만에 들어서기 전에 난파당하기 일쑤였다.
명나라도 이쪽에 사신을 보낼 때 뱃길을 이용했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벼슬아치들은 사절단에 끼는 것을 기피해 뇌물을 주고 빠지려 했다.
새 황제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러 보냈던 오윤겸 일행이 겨우 돌아왔으나 광해군이 새 황제의
칙서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오히려 이 사절의 길이 막히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후금의 침략으로 요양에 살던 明軍과 한족(漢族)은 동쪽 지방으로 도망치거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다. 조선으로서는 난감한 사태였으나 막을 방법이 없었다.
여기에 요양의 군사를 지휘하던 모문룡(毛文龍)이 끼어 있었다.
모문룡은 군인과 유민을 끌어모아 강 건너의 후금과 맞섰다.
수천명에 이르는 후금군의 기병이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와 선천에서 明軍을 공격했는데
모문룡은 겨우 목숨을 건져 철산의 가도(枷島)로 도망쳤다.
가도는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갈 때 기항지로 이용되는 섬으로,압록강 아래쪽 철산 앞바다에 있는데
면적은 19제곱km쯤 된다. 가도는 그 주변의 신미도,대화도,신도와 함께 작은 열도를 이루고 있다.
조선은 이곳에 큰 목장을 두어 운영했는데 모문룡은 조선의 허락도 받지않고 가도를 무단 점령해
명나라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명나라는 이 섬을 피도(皮島)라 불렀는데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시끄러운 분란을 야기한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이 가도에 식량과 소금을 보내주는 등 모문룡에게 호의를 보였다.
하지만 후금군을 격파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도망쳐온 명군과 주민 1만여 명을 끌어모은 모문룡은
정작 명나라와 조선,그리고 후금의 물품을 중개무역하는 일에만 열을 올렸다.
조선이 모문룡을 후원한다고 생각하는데다 사신을 보내도 받아주지 않자 후금에서는 조선정벌론이
대두했다. 정벌론의 강경파는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였다.
당황한 조선 조정에서는 모문룡을 이리저리 따돌리고 관계를 끊었다.
나쁜 소식은 더 빨리 전파되는 법이다.
어느새 백성들 사이에 난리가 난다는 소문이 퍼져 인심이 흉흉했다.
벌써부터 보따리를 싸서 피란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도나도 피란 준비를 서둘렀다.
여기서 광해군이 축출된 인조반정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고 난 다음, 다시
본론에 들어가기로 한다. 왜냐하면 인조반정은 병자호란과는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보다 나이가 어린 계모(선조 나이 51세 때 선조보다 34살이나 어린,손녀뻘이나 되는 17세의
김제남의 딸을 왕비로 들였음)인 인목대비의 유폐 논의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이귀(李貴)는
평산부사로 나가 있었다.
그는 선배이자 서인 계열의 원로인 이항복이 폐모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유배되는 모습을 보고 분개했다.
이항복은 서울을 떠나면서 김류를 불러"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할 사람은 그대뿐이다" 라는
여운을 남기며 뒷날을 부탁했다.
이귀와 김류는 절친한 사이였으나 이귀는 덜렁대는 성격이고 김류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이 무렵 개성과 평산 사이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을 잡아먹는 바람에 파발의 길이 끊어질
지경이었다.광해군은 이귀가 평산부사로 부임할 때 특별한 당부를 했다.
"호랑이를 잡아 사람들이 편안히 다니도록 하라."
평산에 부임한 이귀는 군사를 동원해 여러 마리의 호랑이를 잡아 임금에게 바치면서 효과적인
방법을 건의했다. "호랑이를 잡는 곳이 경기와 황해도의 경계인데 호랑이가 다른 도로 달아나면
규정에 따라 경계를 넘어 추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군사를 동원해 잡으면서도 늘 중간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청컨대 호랑이를 쫓을 때에는 경계에 구애받지 않게 해주소서."
광해군은 이를 허락하고 장단과 개성에서도 평산과 힘을 합해 호랑이르 잡으라고 지시했다.
이귀는 합법적으로 군사를 모아 장단 등지에 출동하면서 서울을 들이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서울에 사는 심기원을 평산으로 불러 모의를 거듭했다.
서울에서는 그의 아들 이시백이 최명길, 김자점과 내통해 거사를 주선했다.
무리는 은밀하게 움직여 신경진,이정구,김상헌 ,장유 등을 끌여들였다.
이들은 모두 서인이면서 이항복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폐모론을 반대한 벼슬아치들이었다.
어느 부하가 눈치를 채고 "이귀가 반역을 도모한다' 고 조정에 알렸다.
이귀가 잡혀와 문초를 받았지만 박승종과 유희분은 이이첨이 또 옥사를 일으킬까봐
이귀의 벼슬을 떼는 정도로 마무리지었다.
이귀는 안협(安峽)에 있는 농장을 아지트로 삼았다.
궁궐 호위 책임을 맡은 훈련대장 이흥립은 이귀와 한 마을에 살면서 친분이 두터웠고,
장유의 동생 장신은 그의 사위였다.
이귀와 장유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 이흥립도 동조하기로 했다.
무관 이괄과 장만도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들 무리는 김류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홍제원에 있는 장만의 집에 군사를 집결시키기로 밀약했다.
그리고 새 임금으로는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뒤에 인조)을 추대하기로 결정하고
그의 동의를 받아냈다.
이 무렵 이귀의 역적 모의에 대한 고변이 연달아 올라왔으나 광해군은 옥사가 지긋지긋했는지
적극적으로 체포령을 내리지 않았다. 병에 시달리고 있어 만사가 귀찮았는지도 모른다.
이흥립의 가담 사실이 포착되어 박승종이 그를 잡으려 했으나 두 사람은 사돈 사이여서 머뭇거렸다.
거사가 있기 전날,반군에 가담한 훈련대장 이흥립에게 궁성을 호위하도록 하고 일부 군사를 보내
서쪽 창의문 밖을 수색하라고 지시했으나 한밤중이라고 핑계대고 나가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리는 음침한 날씨였다.
1623년 3월 13일 밤.홍제원 장만의 집에 모인 반란군은 2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총대장 김류도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았고 장단에서 오기로 한 군사도 도착하지 않았다.
김류는 마침 고변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체포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변 사실을 전해 들은 반란군은 다급한 나머지 이괄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서둘러 영천고개를 넘었다.
무리가 모화관에 이르렀을 때 뒤늦게 김류가 올라왔고 심기원이 2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류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능양군이 연서역으로 나가 장단에서 이서(李曙)가 이끌고 올라온 군사
700여 명을 맞이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거사에 가담한 군사는 1400명 가량이었다.
반란군이 창덕궁 돈화문 앞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날씨가 맑게 개고 동쪽 하늘에서 먼동이 트고 있었다.
반란군이 하늘이 돕는다고 서로 부추기며 기세를 올렸다.
반란군은 돈화문 문짝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가 영문도 모르는 문지기와 궁내를 살피고 있던
선전관을 죽이고 미리 준비해놓았던 장작더미에 불을 질렀다.
성공적으로 궁궐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흥립은 즉각 시위병의 무장을 해제하고 반란군을 맞아들였으며, 다른 궁궐의 호위군사들은
도망치거나 흩어졌다.능양군도 조심스레 뒤따라 들어왔다.
떠들썩한 소리에 잠을 깬 광해군이 불빛을 보고 내시에게 어느 곳에 불이 붙었는지 알아보라고 일렀다.
"역성혁명이라면 먼저 종묘에 불을 지를 것이고 나를 쫓아내는 것이라면 종묘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종묘 쪽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한 내시가 종묘에 불이 붙었다고 아뢰었다.
"내 대에 이씨의 종묘가 망하는구나." 광해군은 한숨을 내쉬며 북문으로 도망쳤다.
반란군이 저마다 횃불을 들고 수색하던 중 불이 풀로 만든 주렴에 옮겨붙어 여러 채의 전각이 불탔다.
창덕궁은 화염과 비명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광해군은 궁녀 한 명이 앞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어린 내시의 등에 업혀 청계천가에 있는 의원
안국신의 집을 찾아갔다. 능양군과 이귀 등은 임금과 왕비를 찾아내지 못했다.
안국신은 무서워 벌벌 떨다가 사태가 이미 기울었음을 알아차리고 광해군이 자기 집에 숨어 있다고 알렸다.
광해군은 그 즉시 창덕궁으로 끌려왔다.
이귀가 급히 서궁으로 가서 인목대비를 모시고 능양군이 있는 창덕궁으로 나오려 했지만
인목대비는 전후의 사정을 듣고도 서궁에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이귀는 어쩔 수 없이 능양군에게 연락해 서궁으로 가서 인목대비를 뵙도록 했다.
해가 저물 무렵 능양군이 서궁으로 나아갔는데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데려오고
국새를 가져오라고 앙칼지게 호통쳤다.
능양군은 창덕궁 후원에서 찾은 옥새를 가져다 바쳤다.
옥새를 손아귀에 쥔 인목대비는 살기등등한 얼굴로 소리쳤다.
"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다가 내가 직접 살점을 뜯은 뒤에야 새 임금을 책봉할 것이오."
" 이 지시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을 쫓아낸 일은 있으나 죽인 일은 없으므로 신들은 절대로 지시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직접 유희분과 이이첨을 심문한 뒤 새 임금을 책봉하겠다고 우겼다.
그런 관례가 없다고 하자 마지못해 옥새를 주었다.
"통분한 일에 대해 직접 심문하려는 것이 어찌 예절로 보아 안 될것이 있겠소?"
그녀는 자신이 수렴청청을 하겠다고 우겼다.
광해군은 입었던 옷 그대로 작은 가마를 타고 서궁으로 끌려왔다.
인목대비는 서궁 뜰에서 광해군을 노려보며 언문으로 적은 36가지 죄를 낱낱이 들어 꾸짖고는
기어코 그 자리에서 죽이려 하였다.
능양군이 길길이 날뛰는 그녀를 말리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10년 동안 쌓인 원한의 발로이겠지만 그녀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 줄 몰랐다.
드디어 서궁 뜰에서 새 임금을 책립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의식은 궁중 법도를 따르지 않고 약식으로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묵은 임금은 왕자의 지위로 강등되어 예전의 광해군으로 돌아가고 새 임금은 인조가 되었다.
일이 수습된 뒤 후원에 숨어 있던 왕비 유씨가 궁궐 수비대장에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오늘의 이 일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오. 그대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오?"
왕비 유씨는 의연한 품격으로 평소 내명부의 우르럼을 받던 인물이다.
인목대비는 전국에 교서를 반포해 광해군의 죄상을 알렸다.
-앞에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삼은 일을 후회했으며 임금이 된 뒤에도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
끝이 없었다고 했고 나는 그의 어머니가 되는데도 그는 역적들의 말에 현혹되어 제풀에 의심을 내
우리 아버지를 죽이고 우리 일가를 도륙냈으며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가두어
곤욕을 보였다고도 했으며, 계속해서 여러 옥사를 일으켜 형제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10년 동안 궁궐을 짖는다고 민가 수천 채를 헐어냈다고 지적했다.
먼저 임금 때의 오랜 원로들을 거의 다 쫓아내고 알랑거리는 인척과 궁녀와 내시만을 믿었으며,
정사는 뇌물로 이루어 지고 온 조정이 협잡과 사기로 가득 차서 돈을 받고 벼슬 팔기를 마치
거간꾼같이 했도다. 부역은 고되고 수탈은 한도가 없어서 백성들은 살길을 잃고
구렁텅이 속에서 신음하여 나라의 위험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광해군 일기'15년)
어느 부분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은 과장이 많이 섞여 있다.
그녀의 지적에 따르면 광해군이 한 일 가운데 잘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창덕궁 공사마저 비정의 하나로 꼽았다.
패군(敗君)은 이처럼 일방적으로 몰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이다.
역사는 승자(勝者)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라고는 하나...
한데 정작 광해군에게 들씌운 가장 큰 죄는 사대의 예를 저버렸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200년 동안 명나라를 섬겨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이고 은혜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아서 임진년(임진왜란)에 우리를 구원한 은혜는 만년을 가도 잊을 수가 없다.
(조정 벼슬아치들은 명의 구원을 위와 같이 만년을 가도 잊을 수 없는 은혜라고 말하지만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을 한갖 미물처럼 함부로 죽이고 아녀자 강간하고 재물 약탈하는 등의 악랄한 짖하기는
왜놈이나 명나라 군사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먼저 임금은(선조를 지칭) 임금 자리에 있던 40년동안 지성으로 큰 나라를 섬겨 평생을 두고
황제가 계신 서쪽에 등을 대고 앉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에 다른 마음을 품고는
오랑캐에게 성의를 보였다.
기미년(사르후전투)에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비밀지시를 내려 정세를 보아 행동하게 한 결과
결국 모든 군사가 오랑캐에게 항복함으로써 온 천하에 더러운 평판을 남겼다.
우리나라에 온 황제의 사신을 옥에 가두는 것 보다 더 엄하게 억류했고, 황제의 지시가 여러번 내렸으나
군사를 풀어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있는 우리나라를 짐승 같은 오랑캐로 굴러떨어지게 했으니
가슴이 터지고 머리가 아픈 일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광해군일기' 15년)
광해군이 사대의 예를 저버린 일을 인륜을 저버린 일보다 더 그릇된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그가 후금이라는 오랑캐와 타협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처사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매도했다.
이 글은 명문장가 장유가 대필했으나 그 기저는 구데타를 성공으로 이끌고 새로 집권한 세력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이다.
이들은 철저한 주자학파의 문도로 명나라의 자소(字小)-재조(再造)의 은혜(자소-재조의 의미: 지난회 참조)
를 길이 잊지 않는 사대주의자임이 이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에게는 실리외교나 중립외교로 국익을 도모한다는 따위의 현실 인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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