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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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 호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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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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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의 출병
조선 조정은 이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요동출병을 주장하는 세력은 말할 것도 없이 명나라의 은혜를 생각해야 하며 명나라를 도와
오랑캐를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을 들고나왔고, 요동출병을 반대하는 세력은 후금에 원한을 사고
국력이 소모된다는 실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출병 찬성파가 압도적인 우세였다.
광해군과 비변사에서는 명나라에 출병할 수 없는 형편을 설명한 뒤 '후방을 수비하는 것도 중요한 전술'
이라는 변명을 내세워 거부의사를 밝힌 글을 사신에게 들려 보냈다.
사신 일행이 북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중간에서 명나라 장수들에게 잡혀 1만 명을 출병시키라고 강요당했다.
명나라는 1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양호는 47만 명이 출정했다고 떠들어 댔다.
이해 여름에 들어 후금은 무순에 이어 요동 부근까지 점령했다.
광해군은 국내의 출병 찬성파와 명나라 장수들의 압력에 못 이겨 마침내 7월에 1만3천여 명의 출병을
결정했다..
★ 明의 패전과 광해군의 원모심려(遠謀深慮)
조선원병의 총사령관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임진왜란 당시 명장 김응서의 바꾼 이름)
였다. 원병이 출발하기에 앞서 광해군이 강홍립을 은밀히 불렀다.
광해군과 이이첨은 강홍립과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 나눈 뒤 "정세를 잘 살펴보고 행동을 결정하라"(觀形向背)
는 비밀지시를 내렸다.
싸우는 척하면서 귀추를 엿보아 명군이 이기면 적극적으로 싸우고 후금이 유리하면 항복하라는 말이다.
강홍립은 7월에 서울에서 출발하였으나 느리게 행군해 겨울에 들어서야 압록강변에 도달했다.
그는 양곡과 무기 등을 준비하느라 늦을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를 댔다.
조선원군의 양곡운반과 연락책임은 평안감사 박엽이 맡았으며, 후금에서 조선을 공격할 경우를 대비해
별도로 3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국경 지대에 배치했다.
강홍립은 여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통역 김언춘 등을 대동했다.
모두 치밀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원병은 1619년 1월말경 압록강을 넘어갔다.
明軍은 북로,동로,서로, 남로 등 네 길로 나누어 공격전을 펴기로 했는데 조선군은 진군하면서
남로군의 사령관 유정(劉綎)의 군사와 합류했다.
유정이 누구인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와서 온갖 횡포를 저지르고 왜교성 전투에서 무고한 양민의 목을 잘라다
전공으로 내세운 인물이 아니었던가.
마침 눈이 몇 자나 쌓여 진군을 늦추는 핑계거리가 되었다.
명군도 눈이 녹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은 진군하면서 통역을 후금 진영에 보내 마지못해 출병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유정은 강홍립에게 빨리 진군하라고 독촉했다.
조선 원병은 3월 2일 무순 근처에 있는 '사르후'에 도착해 후금군의 한 부대와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후금군의 주력군은 누르하치의 지휘아래 무순 동쪽 사르후 근처의 산에서 명군을 크게 격파하고
방향을 동로군의 진격로로 돌렸다.
다른 지방을 공격하던 명군은 전투의 패전 소식을 듣고 제풀에 무너졌다.
강홍립의 거짓 투항과 조정 신하들의 반발
조선군은 明軍을 따라 진격해 사르후 부동(富洞)에 있는 작은 산 아래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양쪽 군사가 치열한 격전을 벌였는데 명군이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유정이 죽고 조선의 장수 김응하도 죽었다.
김응하는 강홍립의 작전 지시를 따르지 않고 분전하다가 죽었다.
이때 누르하치의 사위와 셋째 아들이 조선 군사에게 죽음을 당했는데 이 전과는 후일
명나라의 문책에 변명거리가 되었다
조선 원병은 싸우는 체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군사를 일단 산골에 숨겨두고 후금군에 투항을 통고하면서
"우리 군사는 마지못해 출병했다" 는 임금의 뜻을 전달했다.
후금군의 장수는 사자와 통역을 융숭하게 대우했다.
"우리는 그대들과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겠소."
후금의 조선에 대한 유화정책은 아직도 유효했다.
이렇게 화의가 성립되고 우리 군사들은 산골에서 내려와 며칠 만에 처음음식을 먹으며 안도했다.
후금의 장수가 도원수를 만나보기를 요청해 강홍립이 예목을 입고 그들 진영으로 들어갔다.
후금군은 강홍립이 돌아오기에 앞서 기수(旗手)를 보내 조선 군사의 무장을 해제했다.
장수에게만 말타는 것을 허락한 뒤 군사를 양떼 몰듯하여 자기들 진영으로 데리고 갔다.
후금의 장수는 우리 군사를 사장(射場)에 모아놓고 손바닥을 검사해 살결이 고운 군사와
거친 군사로 나누어 거처를 별도로 지정했다. 양반과 상인을 구별한 것이다.
후금군은 결국 양반 출신 군사 4500명을 죽여 버렸다.
왜 이들을 죽였을까? 바로 이들이 존명(尊明)주의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강홍립 등 장수들도 억류당했으며, 죽고 도망친 군사를 뺀 나머지 8천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강홍립은 그동안의 과정을 적은 장계(狀啓)를 노끈에 꼬아 숨겨서 여러 번 조정에 보고했다.
중간 연락 책임을 맡은 박엽은 강홍립의 보고와 아울러 다른 장수의 보고를 별도로 받아 전달하기고 했다.
후금은 사신을 보내 사르후전투의 승리를 알리고 조선의 출병은 사세로 보아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
한다고 강조하면서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우호관계를 맺자고 했다.
그런데 내막을 모르는 박엽이 강홍립이 투항해 신하의 절개를 잃었다며 그의 첩과 아들을 잡아
감옥에 가둬놓고는 조정에 처분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광해군은 "항복한 것과는 다르다" 는 판결을 내리고 그의 가족을 석방해 서울로 보내
편안히 살게 하라고 지시했다.
광해군과 강홍립사이의 밀약의 내막을 모르는 조정 신하들이 이 사실을 알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강홍립은 사대의 은의를 저버리고 항복했으니 죽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후금의 국서를 갖고 온 정응정(鄭應井)을 처벌해야 한다고 우겼다.
후금을 정벌해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하고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려 사죄해야 하며
후름의 국서를 찢고 사신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폐모론 논의 때는 겁을 집어먹고 입을 다물었던 자들이 더 거세게 죽을 둥 살둥 쌍심지를 켜고 나왔다.
-임금의 고뇌
광해군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경들은 이 오랑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나라의 병력으로 적의 작은 군사라도 막을 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난번 명나라에서 군사를 요청하는 글이 왔을 때 내가 생각한 바는 원병을 징발해 보내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인심이 본디 굳건하지 못하고 평소에 군사 훈련이 돼 있지 않아
하루아침에 몰아가더라도 전투에 도움을 주지 못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경들은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조건 내 말을 틀어막았다.
지난해에 군사를 파견할 때 경들은 마치 북 한 번 울리면 적을 싹 쓸어버릴 것같이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고서야 어찌 병가(兵家)의 일이 두렵지 않겠는가.
명나라가 군사를 주둔시키고 용맹을 빛내 국경을 엄하게 지키되 범과 표범이 산에 웅크리고 있는 형세와
같이했다면 적이 아무리 맹렬히 일어난다 하더라도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을 생각지않고 경솔히 진격해 깊이 들어갔으니 반드시 패배할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내가 이것을 두려워해 밤낮으로 근심 걱정한 나머지 마음의 병이 덧들어 발광할 지경에 이르렀다.
('광해군 일기' 11년)
광해군의 노심초사를 잘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신하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강홍립에게 밀령을 내린 일은 대신들에게 숨기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의 계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군신 상하가 여러일을 제쳐두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기르고 장수를 뽑고
인재를 거두어 쓰고 백성에게 끼치는 폐단을 펴주어 인심을 기쁘게 하며,크게 둔전을 개간하고
병기를 조려하여 성지를 잘 수리하고 망보는 일을 정리한 뒤에야 어떤 위급한 형편에 처하더라도
믿음직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태만히 하거나 소흘히 하면 큰 화가
곧 바로 이를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광해군 일기' 11년)
광해군은 비변사의 대책이 소흘하다고 지적하고 후금의 국서가 들어온
지 7일이나 되었으나 회답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나무랐다.
그가 속마음을 내보이며 호소해도 벼슬아치들은 그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다.
늘 여론과 인심을 살피며 내조를 아끼지 않는 왕비 유씨까지도 조정의 분위기를 느끼고
언문으로 글을 올려 존명사대를 지성껏 해야 한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광해군은 전쟁 과정을 알리러 온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한편 은밀하게 후금의 국서에 회답을 보내야 했다.
명나라 사신 상가(尙哥)를 만난 광해군은 먼저 사죄부터 했다.
"우리나라 군사들이 나약해 접전도 하기 전에 붕괴되고 강홍립이 투항한 일은 실로 가슴아프며
명나라의 근심을 덜어드리지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부끄럽고 통분해 음식도 먹지 못하고 몸둘 바를 모릅니다."
그는 김응하의 죽음에 대해 애써 그 용맹성을 부각시키려 노력했으며 한마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해오면 한 지역의 군사를 내보내 힘껏 구원해주십시오."
비변사에서는 임금의 성화 독촉에도 불구하고 후금에 보내는 국서를 마련하지 못했다.
광해군은 일부 벼슬아치들이 사죄하라느니 귀순하라느니 따위의 문구를 넣자고 주장하자 빼라고 지시했다.
또 "부모의 지시가 있으면 자식으로서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구절이 들어가면 뒷날 다시
쳐들어오는 일이 있을 것" 이라고 우려했다.
광해군은 후금의 사자가 만포 건너편에 와서 초막을 치고 조선의 국서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 안으로 불러들여 정성껏 대우하고 푸짐한 선물을 안겨주면서 회유했다.
광해군은 최종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라는 말을 이해하며 왜란 때
구원군을 보내주겠다고 한 옛일과 정응정을 보내 우호를 제의한 일을 감사하게 여기며
이웃 나라로서 좋은 관계를 가지겠다" 는 내용을 삽입하라고 지시했다.
완성된 글이 올라오자 '건주'(建州) 를 '귀국'(貴國)으로 고치는 등 손질을 해서 내려보냈다.
'후금'이라는 國名을 정식으로 선포하고 조선에도 진작 이를 알렸건만 국서(國書)에
이 나라이름을 호칭하지않고 '건주'(建州)로 호칭하는 것은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낮추어 보겠다는 자세이니 조선 조정의 신하들이 주변정세에 얼마나 아둔하며
사대가 얼마나 골수에까지 미치고 있는지 이 하나만 봐도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한 편 끊임없는 반대상소 등 사대주의 신하들에게 포위된채, 이에 맞서 나라를 격랑으로부터
구해나가려고 몸부림치는 임금의 고뇌가 한 없이 안쓰러워 보이니, 불과 얼마 전
임진왜란 당시의 임금(선조)과 신하간과 비교시 너무나 대비되는 광경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것이다.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과 후금의 사신이 맞닦드리지 않게 서로 분리시켜 놓은채 양쪽을 오가며
아슬 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전개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후금의 국서를 깔아뭉개고 아예 회답을 보낼 생각을 하지 않은채 밍기적거리고 있는
신하들을 달래고 설득해가면서 한달 가까이만에 겨우 작성한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하들의 눈치를 살펴가면서,명의 권위와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후금에게는 책 잡히지 않으려고 고심한 흔적이 행간마다 역력히 베어있다고 하겠다.
-생각컨대 두 나라는 강토가 서로 잇닿아 있고 다함께 황제의 신하로서 큰 나라를 섬겨온지
200년이 지났으나 털끝만치도 원망하는 뜻이 없었습니다.
뜻밖에 요즘 귀국에서 큰 나라와 말썽이 생겨 전란이 이어짐으로써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온 나라가 군사가 머무는 보루로 가득차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웃 나라만의 불행이겠습니까.
이는 귀국에도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큰 나라(명나라)와 우리나라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으니 아버지의 지시가 있을 때
아들이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대의가 있으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웃끼리 좋게 지내려는 인정이 어찌 없겠습니까.
귀국에서 정응정을 먼저 보냈으니(정작 사신에게 국서를 보내지 않았다는 뜻)의심을 사게 된 뜻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내온 편지에 "내 마음에 본디 큰 나라 황제의 뜻을 거스를 생각이 있었다면 저 하늘이 어찌
내려다보지 않겠는가"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인하여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왕업을 보존하고 하늘의 복을 영구히 누릴 수 있으니
어찌 훌륭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부터 큰 도리를 함께 지킨다면 총애하고 안정시키는 큰 나라의 은전이 며칠 안으로
두 나라에 크게 내릴 것이니 각기 자기의 강토를 지키고 옛날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실로 두 나라의 복일 것입니다.-('광해군 일기 11년')
이 회답의 글을 국서의 형식과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일개 지방장관인 박엽을 시켜 전달했으며,
그쪽에서 글이 온 뒤 20여일이 지난 뒤에 보내면서 조정에서 늦게 들은 것으로 가장했다.
명나라의 눈치를 살피면서 후금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뜻이 깔려 있으며,후금을 새 나라로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귀국(貴國)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정도로도 외교술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으나 좀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광해군은 사대주의 주장이 워낙 강해 이 정도로 마무리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두 나라는 일단 우호를 유지했고 요동으로 출동했던 군사들도 일부만 남겨두고 내부분
귀환시켰다. 다만 강홍립,김응서 등 장수들을 억류하고 식량 등 전쟁 비용을 대라고 요구했으나
조선 조정에서는 모르는 체했다.
명나라가 또 군사 1500여 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애매한 태도로 얼버무리며
보내주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사르후에서 전사한 김응하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국경지대인 의주에 사당을 세워 기렸으며
그의 행적을 모아 '충렬록'(忠烈錄)을 간행해 세상에 돌렸다.
명나라에서 그의 죽음을 조문하여 가족에게 황제의 선물을 전달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호응한 것이다.
조선은 이 책을 보내 사대정책이 변함없음을 알렸다.
김응하의 사적을 이용해 명나라에 배반할 뜻이 없음을 보이고 혹시라도 알려질지 모를
'관형향배'(觀形向背)의 실상을 감추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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