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17 19:38
터키사 (민족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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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사 (민족의 기원)

돌궐 민족의 기원은 대다수 북방 민족의 건국 설화와 같이 신비와 전설로 시작된다. 돌궐의 전설은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중국의 사서들(周書, 隋書, 北史)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돌궐은 흉노의 일파이다. 성(姓)은 아쉬나(Ashina, 阿史那)였다. 처음 독립된 부락을 이루고 살았으나, 인국(隣國)의 공격을 받아 전 부족이 몰살당하였다.
이때 10살 난 한 남자아이가 겨우 살아 남았는데, 적이 그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발을 잘라 근처 풀밭에 버렸다. 그곳의 암이리가 고기를 먹여 그 소년을 길렀다.
소년이 장성하여 암이리와 합하여 이리가 수태하게 되었다. 이때, 적의 왕이 소년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사람을 보내 그를 죽였다.

그 옆에 이리 한 마리가 있어 같이 죽이려고 하니, 이리는 재빨리 도망하여 고창국(高昌國)의 베이샨(北山)으로 갔다. 산 속에 동굴이 하나 있어 그곳에 기거하니,
굴 안은 평지에 풀이 무성하였다. 또, 주위가 수백 리이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리는 동굴에 숨어 아들 10명을 낳았다. 열 아들이 자라 밖으로 나가 부인을 얻고
자손을 낳으니, 제각기 10성(姓)을 가졌다. 아쉬나는 그중의 한 성이다. 자손이 차츰 번성하여 수백 가구를 이루었다. 몇 세대가 지난 후 모두 함께 그 동굴을 나와
연연(??, 茹茹)의 신하가 되었다. 알타이 산 양지바른 쪽에 자리를 잡고 철공으로 일했다."

위의 중국 기록처럼, 돌궐 민족은 흉노의 후예로서 초기 역사가 암이리와 연관된 설화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민족 기원의 이리 설화는 오래 전 아시아 흉노족에게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돌궐과 흉노 관계는 서로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아쉬나 부족이 한 소년을 제외하고 전멸당하는 위 설화의 배경은 흉노의 저거가(沮渠家)에 속한
몽손(蒙孫)이 일으킨 북량(北?, 397~439)이 북위(北魏)에게 멸망당하는 상황과 연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수서에는 돌궐이 북량 흉노인 저거 씨의 세력 범위, 즉, 칸수 지방에 있던 작은 부족으로 기술되어 있다. 더욱이 439년 북위가 북량을 멸하자 돌궐의 수령이
아쉬나계 부족 500가를 이끌고, 당시의 강국이었던 유연(柔然)에 항복하여 알타이 산(金山)에 정주하였다는 기록에 비추어서도 돌궐과 흉노와의 역사적, 민족적 일체성은
충분히 고려될 수 있다.

돌궐 제국의 멸망으로 스텝에서 새롭게 투르크의 종족적, 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국가가 위구르 제국이다. 위구르의 등장으로 돌궐 제국이란 체제 속에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투르크족의 연합은 다시 와해되었다. 필연적으로 본격적인 이합 집산이 시작되었고, 많은 투르크 부족들이 서아시아나 러시아의 스텝 지역으로 진출하여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과거 돌궐 제국의 중심지였던 북아시아 지역에 제국을 건설한 위구르는 13세기 몽골족이 이곳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할 때까지,
중국 문화권과 직접 대결한 마지막 투르크 민족 국가였다.

이 시기에 위구르 인은 전통적인 유목 생활에서 서서히 농경 정착 생활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로, 유목과 농경,
동서 문화를 두루 수용하고 융합한 수준 높은 위구르 문화가 성숙되기에 이르렀다. 위구르가 투르크 사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오르혼 비문에 기록된 717년의 사건 때문이다.
즉, 그 해 돌궐 제국의 빌게 카간이 셀렝가 강변에서 돌궐에 반기를 든 위구르를 평정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사서에는, 훨씬 이전부터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위구르에 대한 비교적 소상한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위구르 족은 아시아
흉노족의 먼 후예이다. 이는 위구르족이 흉노 공주와 이리의 교합(交合)으로 생겨났다는 민족 기원 설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위구르족은 북위 시대(384∼534)에는
고차(高車), 수나라 때는 위홀(韋紇), 당나라 때는 회흘(回紇), 회골(回?), 송·원(宋元) 시대에는 외오아(畏吾兒)라 불렸다.

특히 당나라 때에 회홀에서 회골로 명칭이 바뀐 것은, 위구르 카간이 788년 당 덕종(德宗)에게 간청한 결과인데, 회골은 빠르기가 매와 같다는 뜻을 가진다 하였다.
또, 위구르의 언어학적 의미는 '연맹, 군집(Uy+gur)'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위구르의 초기 역사에 대해 알려진 지식은, 그들이 5세기 후반 북아시아 전역을 석권하고 있던
퇼레스 부족 연맹의 일개 부족이었다는 정도이다. 위구르는 돌궐 제국 시대에도 독립된 부족 집단 형태로 독자성을 유지하며 셀렝가 강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흉노족과 돌궐족

고지도와 중국 사서를 통해본 투르크(터키:the Republic of Turkey)의 역사

중국의 천축전국시대 개념지도와 중국 사료에 적(狄)혹은 적(翟)으로 기록한 민족이 「투르크」에 관한 제일 오래된 기록으로 간주된다.
적(狄)은 주대(周代:기원전 1100년~기원전221년)에 중국의 북방(河北地方:山西省、河北省)에 활거 하여 위(衛)와 정(鄭)그리고 진(晋)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그리고 적(狄)은 적적(赤狄), 백적(白狄)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중국과는 동맹과 이반을 반복하면서 존속했다. 전국시대에는 백적(白狄)이 중원에
중산국(中山? 혹은 鮮虞)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기도 했다. 이는 기원전414년에 주(周)의 정왕(定王)인 손무공(孫武公)이 계승하였으나 기원전 296년에
조(趙)의 공격으로 멸망하면서 백적(白狄)의 상당수는 중국인에 동화하고 어떤 이는 북적(北狄), 융적(戎狄)으로 총칭되어 중국 주변으로 나가 유목을 하면서
후에 흉노(匈奴)와 정령(丁令Turk), 정영(丁零), 정령(丁?Turk),칙륵(勅勒Ti?le) 등으로 변천해 갔다. 후세에 북적(北狄)과 융적(戎狄)은 북방민족의 대명사가 되었고
사이(四夷:중국 사방에 존재했던 4민족 즉 東夷 北狄 西戎 南?)의 하나로 기록된다<지도-1>.

(狄)혹은 적(翟)->중산국(趙에 멸망)->색국(索?)->흉노(匈奴)->남북흉노->북흉노 훈족 정영->전조(前趙)·후조(後趙)·북량(北凉)·하(夏)->돌궐가한국의 건국->동돌궐,
서돌궐->回?(위구르)->몽골의 부마국->서쪽에서 온 셀주크조가 비잔틴제국을 축출, 동에서 온 투르크만(Turkmen)과
혼합 오스만제국(티무르제국의 공격을 받음)->제1차세계대전(투르크 혁명)->터키공화국(the Republic of Turkey)

지도-1. 춘추전국시대의 개념지도(주가 수도를 옮긴 B.C. 770년 ~ B.C. 403년 사이의 시기. 전국 시대 : B.C. 403년부터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B.C. 221년까지의 시기)

흉노(匈奴:Xi?ngnu)는 진(秦)과 대치하고 진(秦)은 이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주서(周書)에 [突厥者,蓋匈奴之別種,姓阿史那氏。別?部落(돌궐인은 흉노의 별종(오래전에 갈라진 동종이족)으로 성은 아사나(阿史那氏)씨라 하고,
다른 부락을 만들었다.)]는 기록에 돌궐이 흉노의 별종으로 기록한다. 이 별종은 정영(丁令Turk)으로 추정된다<지도-5>. 다음에 흉노족와 흉노의 별종인
정영의 사실(史實)을 살펴보기로 한다.

흉노에 대한 기록은 중국전국시대(中???時代:기원전403~기원전221)에 몽골고원에서 할거했던 유목기마민족인 흉노(匈奴)족이 나타난다<지도-2>.
흉노(匈奴)는 스키타이문화(Scythian culture: BC 7세기에서 BC 3세기에 걸쳐 흑해 북쪽의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성립된 기마 유목민족 의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외래의 문화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바이칼 호 남단과 몽골의 울란 바트라 사이에 남아 있는 노인울라유적 (Noin-Ula , ─遺蹟)은 흉노(匈奴)의 왕묘(王墓) 밝혀진 유적들이다.

흉노족이 강성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선우[單于]라고 불리는 단일 지도자 밑에서 광범위한 부족연합을 형성한 후부터이다. 흉노(匈奴)는 군주의 칭호를
단우(?于)라고 한다, 초대군주 두만(頭曼. 터키어: Tumen, Teoman: ?~기원전209년)이라는 단우(?于)를 중심으로 흉노 부족을 모아 유목기마연합을 형성하여 힘을 모아
중국을 침입하였다<백과사전>. 전국(戰國)의 제후로 후에 전국7웅(戰國7雄)에 오르는 연(燕:?~기원전222년), 조(趙:기원전403~기원전222년), 진(秦:기원전8년~기원전206년) 등은
흉노(匈奴)의 진출에 대비하여 부분적으로 성벽을 구축했다. 마침내 진시황제(재위: 기원전247~기원전210년)는 중국통일(기원전210)을 이루고, 통일국가로서 이민족과
흉노(匈奴)의 토벌을 계획하고 무장 몽념(蒙恬:?~기원전210년)을 파견했다. 몽념(蒙恬)은 30만 병을 이끌고 북쪽 국경인 올도스(Ordos:황하만 ?河?曲部?側 지역, 황토고원북부)로
진출하여 두만(頭曼)이 이끄는 흉노(匈奴)는 토벌되어 고비사막 북부로 패주시켰다. 진시황은 흉노(匈奴)의 재침을 방지하기 위하여 몽념(蒙恬)에게 명하여 연(燕), 조(趙) 등이
부분적으로 구축한 성벽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수축했다. 몸염(蒙恬)은 그 후 진시황으로부터 화북의 경비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올도스(Ordos)의 상군(上郡)으로 주둔했다
<지도-2>.

흉노는 한의 형님 국으로 행세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 뒤 흉노의 선우의 자리에 오른 모돈(冒頓)은 몽골 전 지역을 지배하고, 북중국 일대에 대한 침입을 재개했다.
이에 중국을 재통일한 한(漢)의 고조(유방: 재위 BC202 ~ BC195)는 흉노의 정벌에 나섰으나, 도리어 흉노에게 크게 패했다.
그 뒤로 한(漢) 고조는 흉노의 선우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해마다 많은 양의 견직물·술·쌀 등을 공물로 바치는 동시에 흉노의 선우를 형님으로 하는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이후 흉노(匈奴)는 서방경략에 나서 동투르키스탄 일대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모두 지배하에 두고 그 국가들에게 동서교역의 안전을 지켜주는 대가로 교역의 이익을 나눠주었다.
이후 흉노는 한(漢)과의 화약을 무시하고 몇 번이나 한(漢)나라를 침입했으며, 그럴 때마다 한(漢)은 굴욕적인 조건으로 화평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한(漢)은 무제(재위 BC.156 ~ BC.87) 때에 이르러 흉노를 무력적으로 격파하기 시작했다<백과사전>.

지도-2. 기원전 210년 진과 흉노의 대치관계

북방의 강력했던 흉노는 마침내 내분으로 남북으로 분열한다.
한(漢) 고조는 흉노의 (부족장)선우를 형으로 하는 형제의 맹약을 맺는 등 굴욕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AD48년 광무제(BC 6-AD 57)가 중국을 통일하여 후한(後漢)을 세웠는데,
그 직후 흉노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남북으로 분열했다. 남흉노<지도-4>는 후한(後漢: 광무제가 25세워-220년 위(魏)의 조비에게 망함)에 귀복하여
중국 북방경계지역인 간쑤(甘肅)·산서(陝西)·산시(山西) 등지로 이주했다가 나중에 5호16국시대[五胡十六?時代:304년의 한(漢, 前趙)의 부흥기에서
439년의 북위(北魏)에 의한 화북통일(華北統一)까지를 나타냄]에 이르러 전조(前趙)·후조(後趙)·북량(北凉)·하(夏) 등을 세웠다. 『진서(晋書)』에 의하면 남흉노의
선우를 배출한 연제부(攣?部)출신으로 어부라(於夫羅)의 손자인 유표(劉豹)의 적자 유연(劉淵)은 후한(後漢), 선비와 연합하여 북흉노와 싸웠다. 그리고 서진(西晋)대까지
중국왕조에 신복했으나 AD304년에 서진(西晋)이 쇠하는 틈을 노려 남흉노의 유연(劉淵)이 스스로 한왕(漢王)이라 칭하고 서진(西晋)에서 독립하여
전조(前趙)를 세웠다(5호16국시대)<지도-3>.

지도-3. 남흉노가 서진에서 독립하여 세운 전조의 위치

반면 북흉노는 선비(鮮卑:Xi?nb?i)·남흉노·후한의 잇단 공격과, 기근·질병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점차 몽골 고원의 서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여 2세기 후반 경에는
키르기스 초원지대로 이동함으로써 중국과는 더 이상 접촉하지 않게 되었다<사진-4>.

그러나 후에 북흉노는 이곳에서 점차 서로 이동하면서 주변의 여러 부족을 흡수하여 큰 부족을 형성하어 유럽 쪽으로 이동 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중국의 사서의 기록에
북홍노의 소식이 최후로 확인되는 것이 카스피 해 북동부의 아란 족(苑蔡=Alans: 카스피연안 현재 카자흐스탄과 러시아남부를 중심으로 활약한 이란계 유목민족)지역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부터 백여 년이 지난 후 375년 흑해지방의 엘마나릭 왕이(Ermanaric, ? - 376: 도이치의 고대민족인 고트족의 왕) 이끄는 고트족과 격렬히 대치하였는데
결국 이들을 물리치고 이 지역 대분을 차지한 것이 ‘훈(Hun)’족이라고 하여 기록에 등장한다. ‘훈(Hun)’족은 이어서 다뉴브강 하류의 서(西)고트족에까지 위협했다고 전한다.

‘훈(Hun)’족은 흉노족의 후예로서 「투르크(돌궐)」족의 조상일 것이라는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우세하다. 북흉노에 대한 기록은 5세기 이후 거의 나타나지 않았는데,
다만 7세기에 몽골 평원을 지배했던 유목민족인 「투르크(돌궐족)」는 스스로를 흉노족의 후예인 ‘훈(Hun)’족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흉노족의 많은 풍습이
「투르크(돌궐족)」의 것과 일치하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게다가 4세기에 동유럽을 석권했던 ‘훈(Hun)’족이 흉노의 후예라는 것은 문헌학상 고고학상 상당히 긍정적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 근거로
“흉노(匈奴)”의 중국 음은 현재는 “Xiong-nu”이지만, 고대중국음에서는 “xbron-no” “Hu-na”이다. 이는 유럽 사료에 나타난 “phryni”는
중국 원래 음에 가깝고, “phuni”, “hun”을 약식형태로 표기하는데 이는 고대중국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4세기 중엽 경 낙양(洛陽)의
소그드인은 흉노를 “xwn”라고 음사하고 있어 음역으로 볼 때 흉노와 훈은 같은 음사에 근거하고 동일 종족으로 본다는 견해이다.

*참고: 서고트족(동부 게르만족)의 일부는 훈족의 압박을 피하여 동(東)로마로 이주하였는데, 이것을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발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두산백과>.

돌궐족의 등장: 흉노의 북방에 있었던 정영(丁零Turk: 丁令, 丁?, 勅勒)을 북흉노와 함께 투르크계의 조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영(丁零:Tegrak의 음사)은 흉노의 북쪽에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5세기까지 바이칼 호 만에서 세렌게(러시아어:Селенга) 강 유역에 걸쳐서,
몽골고원북부와 남시베리아에 거주한 유목민족을 정령(丁令Telegem,Terege),정령(丁?Turk),칙륵(勅勒Ti?le)으로 표기하고 이들은 흉노의 별종으로
「투르크계의 조선(祖先)」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정영(丁零Turk) 혹은 정령(丁令Terege)으로 기록되는 민족은 흉노(匈奴)와 동시대에 몽골고원의 북방,
바이칼호변에서 카자흐스텝(Kazakh Steppe=Kirgiz Steppe:카자흐스탄북부에서 러시아 남부까지의 초원지대)에 거주했던 유목민으로 이들은 모두 「투르크(Turk)」의
발성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정영(丁零)족은 흉노의 북부에 존재하면서 흉노(匈奴)가 강성하면 복종하고, 흉노(匈奴)가 쇠퇴하여 가면 이반을 반복했다<지도-5>.

흉노(匈奴)가 남북으로 분열하여 몽골고원의 지배권을 잃게 되니 동의 선비(鮮卑:Xi?nb?i)가 몽골고원으로 침공하여 고원의 지배권을 장악했는데 이것에 대하여도
정영(丁零)은 그 추세에 따라 배반과 복종을 계속했다.

5호16국시대[五胡十六?時代:304년의 한(漢, 前趙)의 부흥기에서 439년의 북위(北魏)에 의한 화북통일(華北統一)까지를 나타냄]에는 선비(鮮卑)가 쇠퇴한 후는
정영인(丁零人)은 몽골고원으로 진출하고, 일부의 정영인(丁零人)은 중국으로 이주하여 적위[翟魏:388年 - 392년. 정령인(丁零人) 적요(翟遼)에 의하여 현재의
하북성 황하남안에 건국한 정권이다.]를 건국하기도 했다.

적요는 천왕을 자처하며 후연, 동진을 노략질하였다. 적요(翟遼)에 이어 적교(翟釗)가 뒤를 이었다. 392년의 새해가 밝자 후연의 모용수는 노략질을 일삼는
적위(翟魏)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적교는 이 전쟁에 패하여 단신으로 서연으로 도주하여 모용영에 휘하에 들어갔으나 1년 후 반란을 획책하다가 참수됨으로
적위의 역사는 사라졌다<지도-6>.

지도-4. 선비가 흉노의 영역을 거의 차지하고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했다.

지도-5. 기원전 2세기 흉노와 정영, 선비의 대립

지도-6. 394년 서연의 영역

정영인(丁零人)에 의한 고차국(高車)의 건립과 유연(柔然)에 의한 패망.

정령(丁零) 또는 고거/고차(高車), 철륵(?勒)등으로 기록되는 정영인(丁零人)은 투르크 계통의 유목 민족이다. 정령은 5세기 초엽 유연(柔然)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5세기 말 유연(柔然)이 쇠퇴하자 서쪽으로 이동하여 고차국(高車)을 세웠다<지도-7>.

정영(丁零:Tegrak의 음사)은 4세기~6세기에는 고차(高車:몽고어Terek,Telek), 6세기~8세기는 철륵(?勒: Turk를 음사한 Ti?le)으로 불렸다.
몽골고원으로 진출한 정영인(丁零人)은 남북조시대에 중국인(拓跋氏政?:척발씨정권)으로부터 고차(高車)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이동에 사용한
차량의 차륜이 크고 높았던 것을 뜻한다고 한다. 처음은 몽골고원을 둘러싸고 척발부(拓跋部) 대국(代?)과 북위(北魏)를 상대로 싸웠으나 점차 대두하는
유연(柔然)이 강대하여 져서 유연(柔然)에 종복하게 되었다<지도-8>.

5세기 말 487년 고차(高車)의 부복라부(副伏羅部)인 아복자라(阿伏至羅)는 유연(柔然)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아복지라국(阿伏至羅?),
아복지라국(阿伏至羅?)은 유연(柔然)과 헤프탈(英語:Hephthalite. 5, 6C 유목국가)과 싸웠으나 6세기에 유연(柔然)에 패하여 패망했다<지도-8>.

흉노족의 별종인 돌궐의 발흥과 유연(柔然)의 멸망.

중앙아시아 동부의 패자였던 유연가한국(柔然可汗?)은 단철노예였던(鍛?奴隷) 흉노의 별종인 돌궐에 의하여 멸망한다(555년). 한편 고차(高車)의 동족인 철륵(?勒)은
돌궐과 같은 시대에 존재한 투르크계민족으로 중앙아시아 각지에 분포하여 살았다. 중국사서에는 철륵(?勒)을「최다의 민족」으로 기록한다<지도-9>.

돌궐은 유연(柔然)의 구 영토를 거의 지배하고 중앙아시아를 대부분 지배하에 두었다. 때문에 동 로마제국의 사료에도 돌궐(突厥)을「투르크」로 기록하고 있다.
이 후 「투르크(突厥)」의 존재가 동서의 역사에 기록된다. 또한 「투르크(突厥)」는 스스로 언어(투르크어)를 스스로의 문자(돌궐문자)로 표기했다.

철륵(?勒)은 돌궐과 함께 돌궐가한국(突厥可汗?)의 중요한 구성 민족이었으나 돌궐이 쇠하면 독립하고 성하면 복속을 반복하였다. 마침내 철륵(?勒) 중에서
구성(九姓=토쿠스 오구스)이라 하는 회골(回紇: 위구르)이 대두하여, 갈라록(葛邏?), 발수밀(拔悉蜜)의 투르크계민족과 함께 동돌궐제2가한국(東突厥第二可汗?=동돌궐)을
멸망시켰다.

*참고:구성(九姓)은 昭武九姓(?音:Zh?ow?ji?xing)을 말하고 이는 중국의 남북조시대부터 수, 당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의 소그디아나(Sogdiana)지방에 존재했던
9개의 오아시스도시국가를 칭하다. 9개의 국왕은 모두 소무(昭武)를 국성(?姓)으로 했음으로 소무 국성(昭武?姓)이라 부른다. 또한 국민의 대다수가 소그드인(胡人)임으로
구성호(九姓胡)라고도 한다.『新唐書』以前의 『北史』와『隋書』에는 康?, 安?, ?汗?, 米?, 史?, 何?,烏那??, 穆?, 漕?의 9개 나라가 昭武를 ?姓한다고 했다.

돌궐(투르크(突厥))은 582년에 동서로 분열하고 8세기에 양 돌궐이 멸망한다. 돌궐의 발흥과 멸망의 역사를 사서를 통해 다음에 살펴본다.

지도-7. 5호16국시대(304년의 한(漢~前趙)의 발흥~439년의 북위(北魏)에위한 화북통일까지)의 토곡혼, 고차(위구르), 유연의 위치
지도-8. 6세기 유연, 토곡혼, 서위, 동위, 양의 위치(516년)
지도-9. 6세기 돌궐, 수, 진, 토곡혼의 위치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기록에 나타난 돌궐(突厥)의 신화

중국사서에는 몇 가지 돌궐(突厥)에 대한 전설이 기재되어 있어 이들 기록을 살핀다.

『周書』

[突厥者,蓋匈奴之別種,姓阿史那氏。別?部落。後??國所破,盡滅其族。有一兒,年且十歲,兵人見其小,不忍殺之,乃?其足,棄草澤中。有牝狼以肉飼之,及長,與狼合,
遂有孕焉。彼王聞此兒?在,重遣殺之。使者見狼在側,?欲殺狼。狼遂逃于高昌國之北山。山有洞穴,穴內有平壤茂草,周回數百里,四面俱山。狼匿其中,遂生十男。十男長大,
外託妻孕,其後各有一姓,阿史那卽一也。子孫蕃育,漸至數百家。經數世,相與出穴,臣於茹茹。居金山之陽,?茹茹鐵工。金山形似兜?,其俗謂兜??「突厥」,遂因以?號焉。]

“돌궐인은 흉노의 별종(오래전에 갈라진 동종이족)으로 성은 아사나(阿史那氏)씨라 하고, 다른 부락을 만들었다. 후에 인접한 나라에 격파되어 일족은 결국 멸망했다.
10살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병사는 죽이기 어려워(불쌍해) 발목의 근육을 자르고 풀밭에 버렸다. 암 늑대가 있어 고기를 주고 남자아이를 기르고 성장하자 암 늑대는
서로 합하였다. 인접국에서 왕이 남자아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병사를 보내 죽이게 했다. 병사는 근방의 늑대를 보고 일제히 달려 가 죽이려 했지만 암 늑대는
고창국(高昌?)의 북산 (보쿠타산맥) 으로 도망쳤다. 산에는 동굴이 있고 안에는 풀이 무성한 평편한 토지가 있고 주변은 수 백리 산으로 둘러져 있다. 늑대는 그 안에 숨어
10명의 남자를 낳았다. 10아이가 성장하니 밖에서 아내를 얻어 그 후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 아사나(阿史那)는 그 중 한사람이다. 자손은 번성하여 계속하여 수백 가를
이루었다. 수세대를 거치니 각각 동굴을 나와 여여(茹茹=柔然)에 신하로 복종한다. 그들은 금산(金山=알타이山脈)의 남측에 살고 여여(茹茹=柔然)의 철공이 된다.
금산(金山)의 모양이 두무(兜?:싸움에 쓰이는 도구)와 비슷하여 속언으로 두무(兜?)를 돌궐(突厥)이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칭하였다. 혹은 전하기를 돌궐(突厥)의 조선은
색국(索?) 출신으로 흉노(匈奴)의 북에 있었다. 그 부락의 대인(부족장)은 아방보(阿謗?)라 한다. 형제가 17명이었다. 아방보(阿謗?)는 어리석어 나라가 망하였다.
형제 중 한사람인 이질니사도(伊質泥師都)는 늑대에서 태어나 풍우를 불러오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하신(夏神)의 딸과 동신(冬神)의 딸 2사람을 아내로 삼아 4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중 한사람인 대아(大?)는 천사처절사산(踐斯?折施山)에 살고, 산상에 있는 아방보(阿謗?)의 일족을 찬서리(寒露)에서 구하기 위해 책임자로 추대되어
눌도육설(訥都六設)이 되어 돌궐(突厥)이라 칭했다. 율도육(訥都六)에게는 10인의 처가 있는데 모두 이들은 어머니 쪽의 일족 성을 따랐다. 아사나(阿史那)는 애처의 아들이다.
눌도육설(訥都六設)이 죽으니 10인의 어머니는 아들 중 한사람을 선정해 세워야 하는데 큰 나무 밑에 모여 나무위로 제일 높이 나는 자를 세우기로 약속했다. 아사나(阿史那)의
아들은 어렸지만 제일높이 날았음으로 여러 아들로부터 장으로 추대 받아 아현설(阿賢設)이라 칭했다.”


『隋書』

[突厥之先,平?雜胡也,姓阿史那氏。後魏太武滅沮渠氏,阿史那以五百家奔茹茹,世居金山,工於鐵作。金山狀如兜?,俗呼兜?爲「突厥」,因以爲號。或云,其先國於西海之上,
爲?國所滅,男女無少長盡殺之。至一兒,不忍殺,?足斷臂,棄於大澤中。有一牝狼,每銜肉至其所,此兒因食之,得以不死。其後遂與狼交,狼有孕焉。彼?國者,復令人殺此兒,
而狼在其側。使者將殺之,其狼若爲神所憑,?然至於海東,止於山上。其山在高昌西北,下有洞穴,狼入其中,遇得平壤茂草,地方二百餘里。其後狼生十男,其一姓阿史那氏,最賢,
遂爲君長,故牙門建狼頭纛,示不忘本也。]

“돌궐의 선조는 평량잡호(平??胡)이다. 성은 아사나씨(阿史那氏)이다. 후위(後魏=北魏)의 대무제(太武帝)가 저거씨(沮渠氏)를 멸망했기 때문에 아사나((阿史那)는
오백가(五百家)를 가지고 여여(茹茹=柔然)로 도망하여 대대로 금산(金山)에서 살고 철공(鐵工)을 종사했다. 금산(金山)의 형상이 두무(兜?)와 같아 속언으로 두무(兜?)를
돌궐(突厥)이라 부르기 때문에 돌궐이라 불렀다. 혹은 말하기를 그 선조는 서해의 북에 나라가 있는데 인접국에 멸망하고 남녀노소 모조리 죽였다. 한 아이만은 죽이기가
불쌍해 발의 근육과 팔을 절단하여 큰 소택지에 버렸다. 한 마리의 암 늑대가 있어 매일 그에게 고기를 주어 그 남아를 먹여주었음으로 죽지 않았다. 그 후 남아는 늑대와
교합하여 늑대는 아이를 잉태했다. 인접국의 사람들은 다시 명하여 이 남자를 죽이게 하니 그 곳에 여자 늑대가 살았다. 파견 된 사람들은 죽이려고 하였으나 여자 늑대는
신으로 변하여 홀연히 동해에 이르고 산상에 머물렀다. 그 산은 고창(高昌)의 서북에 있고 내려오니 동굴이 있었다. 여자 이리는 안으로 들어가니 사방 200여리의 풀이
무성한 평탄한 땅이 나타났다. 그 후 여자 이리는 10명의 아들을 낳고 그 중에 한 아이가 아사나씨(阿史那氏)로 제일 현명하여 군장이 되었다. 고로 아문(牙門)에는 늑대머리
장식을 설치하고, 본원(本源)을 잊지 않도록 했다.”

돌궐의 발흥과 돌궐가한국(突厥可汗?)의 건국

상기한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에 등장하는 눌도육설(訥都六設)의 손자인 토무(吐務)는 대엽호(大葉護)라 하였는데 유연(柔然)의 신하가 되었다. 그는 두 아들이 있고,
장남은 토문(土門), 차남은 실점밀(室點蜜)이라 했다. 토무(吐務)가 죽으니 토문(土門)이 후를 이었다. 5세기 후반은 유연예속하(柔然隷?下)의 노역부족(奴役部族)이 끊임없이
도망치고 반항을 계속하는데 487년에 고차제부족(高車諸部族:돌궐부) 10만인이 30년에 걸쳐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니 힘이 쇠하여 유연(柔然)의 돌궐부(突厥部)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었다. 규제가 풀리니 축산품(畜産品)과 단철(鍛?)에 의한 수공예품을 생산하여 서위(西魏)와 서역(西域)과의 무역을 행하고 6세기 초반에는 서위(西魏)와의 사이에 정식
통상이 맺고 힘을 키웠다.

서위(西魏)의 대통12년(大統12년. 546년), 북쪽의 철륵(丁零>高車>?勒)이 유연(柔然)을 공격하여 왔음으로 돌궐 왕 토문(土門)은 돌궐부족을 이끌고 맞아 싸워 5만여 부락을
항복시켰다. 돌궐 왕 토문(土門)은 이 힘을 과시하여 유연(柔然)에 구혼을 청했다. 그러나 유연가한(柔然可汗)인 아나괴(阿那?. 재위:520년 - 552년)는 돌궐이 ‘
단철노예(鍛?奴隷)의 신분인 주제’에 하고 격분하여 사자를 보내 이를 매우 모욕을 가하고 구혼을 거절했다. 돌궐왕 토문(土門)은 이 사자를 참수하고 유연(柔然)의
지배에서 벗어 나 이탈한다. 그는 서위(西魏)로 사자를 보내어 조공하고, 서위(西魏)에 구혼했다. 대통12년(551년) 6월 토문(土門)은 서위(西魏)의 장낙공주(長?公主)를
처로 맞이했다. 이 해 서위(西魏)의 문제가 붕어하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말 200필을 바쳤다. 폐제원년(552년) 1월 돌궐 왕 토문(土門)은 유연(柔然)을 치고 회황(?荒)의
북쪽을 대파했다<지도-9>. 그러자 유연의 아나괴(阿那?)는 자살하고 그 아들인 암라진(菴羅辰)은 북제(北?)로 도망치고 유연(柔然)의 나머지 무리는 아나괴(阿那?)의 숙부인
둥숙자(鄧叔子)를 내세워 가한으로 했다. 돌궐 왕 토문(土門)은 마침내 스스로 이리가한(伊利可汗)이라 칭하고 독립하여 돌궐가한국(突厥可汗?)을 건국했다<지도-10>.

지도-10. 돌궐과 유연

돌궐의 최성기(突厥의 最盛期)

돌궐의 이리가한(伊利可汗)이 죽은 후 아들인 을식기가한(乙息記可汗:재위:552~553)이 대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죽고 만다.
이로서 동생인 목한가한(木汗可汗:재위:553~572)이 뒤를 이었다. 목한가한(木汗可汗)은 즉위하자 유연(柔然)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유연가한(柔然可汗)인
등숙자(鄧叔子)는 서위(西魏)로 망명했다. 돌궐의 목한가한(木汗可汗)은 서의 언달(??: ??=Hephthalites)을 격파하고 동의 거란(契丹)을 패주시키고, 북의
계골(契骨:키르키스)을 병합하고 제 외국을 차츰 정복해 나갔다. 이로서 돌궐의 판도는 동은 요해(東海인가?)의 서쪽, 서는 서해(아랄 해=Aral Sea)에 이르고,
남은 고비(Govi)사막이북, 북은 바이칼 호(Baikal)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지도-11>,

돌궐의 목가가한(木汗可汗)은 서위(西魏)로 도망한 유연가한(柔然可汗)인 등숙자(鄧叔子)의 주살을 청원했다. 서위(西魏)의 자문태(宇文泰)는 이것을 허락하고
등숙자(鄧叔子)를 청문외(?門外)에서 죽였다. 이리하여 완전히 유연(柔然)을 멸망시킨 돌궐의 목한가한(木汗可汗)은 중국의 북조(北朝)와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인척관계를 이룬다. 처음은 북주(北周)과 북제(北?)의 양국으로부터 구혼을 받았는데 목가가한(木汗可汗)은 북주(北周)를 택하여 보정3년(保定3年:563)부터
4년(564)까지 북제토벌(北?討伐)에 참가했다. 이 전쟁에는 성과를 올리지 못했으나 후에도 돌궐과 북주(北周)의 관계는 좋았다.

그러나 다음의 돌궐가한인 타발가한(他鉢可汗. 재위:572~581)의 대에서 577년에 멸망한 북제(北?)의 잔당과 조직하여 종종 북주(北周)의 주변을 침공하였다.
북주(北周)는 몇 번에 걸쳐 돌궐과 교섭하여 대상2년(大象2年: 580)이 되어 마침내 북제(北?)의 잔당인 고소의(高紹義)를 연행하는데 성공했다.

지도-11. 6세기 돌궐의 최대판도(6C 東西突厥과 周??。Western Gokturk Khanate=西突厥Eastern Gokturk Khanate=東突厥, Chinese Sui Dynasty=隋,
Sassanid Persian Empire=사산朝)

돌궐의 동서분열과 수(隋)와의 대립관계

581년 돌궐의 타발가한(他鉢可汗)이 병사하고 아들인 암라(菴羅)가 즉위했으나 돌궐의 목한가한(木汗可汗)의 아들인 대라편(大邏便)이 심복하지 않고 제어되지
않았음으로, 대가한위(大可汗位=왕)를 이복가한(爾伏可汗)이었던 섭도(??)에게 이양했다. 국인들도 「4가한(四可汗: 乙息記可汗, 木汗可汗, 他鉢可汗, 褥但可汗)
의 아들 중에는 섭도(??)가 가장 똑똑하다.」라 하고, 섭도(??)는 정식으로 즉위하여 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이라 칭하고 도근산(都斤山=Utukan yi?)을 수도(都)로 했다.
섭도(??:이후는 沙鉢略可汗)은 대라편(大邏便)이 지금까지 관위를 가진 적이 없었음으로 아파가한(阿波可汗)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2월 북주(北周)의 정제(?帝)가
양견(楊堅)에게 선양하고, 수(隋)가 건국되니 북제(北?)의 영주찰사였던 고보녕(高?寧)이 북방민족을 결집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 돌궐의 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은
이곳과 합류하여 임유진(臨??)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 후로도 반란군은 수군(隋軍)에 승리하고 수(隋)의 북변을 침공했다<지도-12>.

지도-12. 581년의 돌궐제국과 대수제국의 대립관계

서돌궐의 분립과 최성기 그리고 수(隋)와의 관계와 멸망

개황2년(開皇2年;582) 겨울 수(隋)의 고조문제(高祖文帝: 수의 초대황제. 541년 ~ 604년)는 하간왕(河間王)인 양홍(楊弘), 상주국(上柱?)의 두로적(豆盧勣),
두영정(竇?定), 좌복사(左僕射)인 고경(高?), 우복사(右僕射)인 우경칙(虞慶則)을 원수로 하여 장성을 나와 돌궐에 반격을 가했다. 돌궐의 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은
아파가한(阿波可汗),빈한가한(貪汗可汗) 등을 이끌고 맞아 싸웠으나 패주하여 굶고 역병으로 고민하다가 패퇴했다. 돌궐의 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은 아파가한(阿波可汗)의
난폭한 성격을 위태롭고 두려워하여 먼저 아파가한(阿波可汗)의 영지로 향하여 그 부락을 습격하고, 아파가한(阿波可汗)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이로서 아파가한(阿波可汗)은
돌아 갈 곳이 없어 (西의) 달두가한(達頭可汗)의 진영으로 망명했다. 이 사실을 들은 달두가한(達頭可汗)은 아파가한(阿波可汗)에게 병력을 주어 (東의)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
을 공격하게 했다. 이 외에도 빈한가한(貪汗可汗)과 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의 종제인 지근찰(地勤察) 등이 이반하여 아파가한(阿波可汗)에 동조했는데 이로서 동서로 분리되고
이것이 서돌궐이 되었다<지도-18, 20>.

(東의)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은 서(西)의 달두가한(達頭可汗)이 쉽지 않고, 동(東)의 거란(契丹)이 두려워 수(隋)에 구원을 요청한다. 이로서 백도천내(白道川?)로 이주하여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 후 돌궐의 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은 수(隋)의 진왕(晋王)인 양광(楊?: 隋朝의 第2代皇帝, 在位:604년8월21일 - 618년4월11일)으로부터
보급을 받아 이것으로 (西의)아파가한(阿波可汗)을 공격하여 포로로 했다(587년).

이에 보답하여 개황7년(開皇7年:587) 1월 (東의)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은 아들을 파견하여 수(隋)에 조공했다. 이 해 (東의)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의 아장(牙帳:군막)이
화재가 발생해 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은 화상을 입었다. 그 수개월 후 사발락가한(沙鉢略可汗)은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동생 처라후(?羅侯)가 즉위하나 생질인
옹우려(雍虞閭)에게 양위하려하였으나 합의하지 못하고 결국 유언대로 처라후(?羅侯)가 (東의)엽호가한(葉護可汗)으로 즉위하고 옹우려(雍虞閭)는 엽호(葉護:대신)가 되었다.
그러나 엽호가한(葉護可汗)이 즉위 후 얼마 안 되어 화살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국인들은 옹우려(雍虞閭)를 세워 (東의)도람가한(都藍可汗:재위:587~599)이 되었다.
도람가한(都藍可汗)도 또한 조속히 견사를 보내 수(隋)에 조공했다.

한현 587년 서돌궐의 아파가한(阿波可汗)이 동돌궐의 엽호가한(葉護可汗)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서돌궐의 국인은 앙소특근(?素特勤)의 아들을 내세워
(서돌궐의)니리가한(泥利可汗)으로 했다. 그러나 서돌궐은 오래가지 못하고 601년 (서돌궐의)니리가한(泥利可汗)과 엽호(葉護)는 철륵(?勒)에 패배했다.
(서돌궐의)보가가한(?迦可汗)은 또한 수(隋)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지만 패배하고 토곡혼(吐谷渾)으로 급히 도망했다<지도-13>.

지도-13. 605년 서돌궐, 동돌궐, 철륵, 수

개황12년(開皇12年:592) 대의공주(大義公主: 北周의 황녀)는 서돌궐의 니리가한(泥利可汗)과 모반을 일으켰다하여 동돌궐의 도람가한(都藍可汗)은 대의공주(大義公主)를 참수했다. 한편, (東의)도람가한(都藍可汗)은 (西의)달두가한(達頭可汗)과 적대하여 종종 서로 정벌을 단행하였음으로 문제(文帝)는 이것을 화해시키고 병력을 철수시킨바가 적지 않았다.

서돌궐은 618~619년경 사궤가한(射?可汗)이 죽고 동생인 통엽호(統葉護)가 대가한(大可汗)된다. 통엽호가한(統葉護可汗.재위:619~628)은 지모가 뛰어나고 무용이 뛰어나
마침내 북으로 철륵(?勒)을 합병하고 서쪽의 파사(波斯:사산조)를 저지하고 남의 계빈(?賓)과 국경을 접하고 서역으로 패권을 떨쳤다<지도-15>.

그러나 그의 사후 내부분열이 반복되고 2가한병립(2可汗?立)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때 당의 태종이 죽으니,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가 일시적으로 세력을 다시 모으나,
고종의 토벌군에게 패하고,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가 포로가 되니 서돌궐도 당(唐)의 기미지배하(羈?支配下)에 든다.

기미정권하(羈?政策下)에서는 아사나하로정토(阿史那賀魯征討)에 공이 있었던 아사나미사(阿史那?射), 아사나보진(阿史那??) 두 사람에 의하여 서돌궐제부가 통괄되고 그
양가가 교대로 가한위(可汗位)를 세습하면서 당(唐)의 반란진압 등에도 참가한다.

장수연간(長?年間:692~694)에 미사가(?射家)의 흥석망가한(興昔亡可汗)이 도절되고, 741년경 서돌궐의 아사나씨(阿史那氏)가 죽은 후는 돌기시(突騎施)와 갈라록(葛邏?)이
실권을 쥐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서돌궐은 달리 십성(十姓:on-oq)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십성가한(十姓可汗)인 아사나흔(阿史那昕)이 돌기시(突騎施:Turuge?부의 수령)인 막하달간(莫賀達干)에게
살해되니 서돌궐의 아사나씨가한(阿史那氏可汗)은 멸망하고 서돌궐에서는 돌기시부(突騎施部)가 대두한다. 이후 돌기시부(突騎施部)는 황성(?姓)과 흑성(?姓)으로 나뉘어져
사로 다투게 되었다.

대력연간(大?年間:766~779)후는 갈라록(葛邏?:고대 투르크어 Qarluq)족이 성하게 되어 돌기시부(突騎施部)의 황성(?姓)과 흑성(?姓)의 돌기시 이성(突騎施二姓)은
갈라록(葛邏?)에 신종하고, 기타는 회골(위구르)에 복속하게 됨으로서 서돌궐은 완전히 멸망했다<지도-14>.

*참고:갈라록(葛邏?, Qarluq)은 7세기에서 12세기에 걸처 쥰갈(Dzungaria)분지와 일이(Ile, Ili)지방에 존재했던 투르크계민족으로 중국사서에는 가라록(歌邏?),
갈라록(葛邏?),갈록(葛?)으로 표시하고 페르시아어에서는 Khallokh, 아랍어로는 Qarluq로 나타난다.

지도-14. 갈라록(葛邏?=Qarluq), 위구르제국, 대당제국
지도-15. 7세기 서돌궐의 최대판도(7C, 西突厥의 最大版?。Western Gokturk Khaganate=西突厥, Eastern Gokturk Khaganate=東突厥, Chinese Empire(Sui Dynasty)=隋,
Tuyuhun=吐谷渾、Persian Empire(Sassanid Dynasty)=사산朝

동돌궐의 최성기와 멸망 그리고 회골가한국(回?可汗?)의 성립

동돌궐은 582년 돌궐이 동서로 분열될 때 동측의 세력이다. 동돌궐은 3시기로 분류하여 첫째 제1가한국기(第一可汗?期), 둘째 제2기미정책기(羈?政策期),
셋째 제2가한국기(第二可汗?期)로 구분한다. 744년 최후의 동가간(東可汗: 동돌궐의 가한)이 회홀(回紇:위구르)에 의하여 살해되고 동돌궐의 영토는 회골가한국(回?可汗?)으로
바뀌었다<사진-17>.

동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 - 609年)대는 매년 수회 수(隋:581년- 618년)에 조공했으나 아들 시필가한(始畢可汗:재위:609~619)대에 수조(隋朝)가 쇠퇴하여 가는 틈을 타서
중국으로 침공하고, 조공을 하지 않는다. 대업13년(大業13年:617)5월 당공(唐公:당조의 초대황제. 재위:618~629)의 이연(李淵)으로부터 원군의 요청이 있어
시필가한(始畢可汗)은 2천기의 원군을 파견하여 수조타도(隋朝打倒)에 협력하고, 그 익년(618)이 되어 양사도(梁師都)와 유무주(劉武周)와 함께 중국침입을 모의했다.
그러나 시필가한(始畢可汗)은 그 해 죽고 만다.

동돌궐은 힐리가한(?利可汗. 재위:620~630)대에 빈번히 중국을 침입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당(唐:618-907)은 그때마다 동돌궐을 격퇴하지만 그 세력이 약해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러나 정관원년(貞?元年:627) 설연타부(薛延陀部)를 위시한 철륵제부(?勒諸部)가 동돌궐에 이반하기 시작하여 동돌궐에 신종하고 있었던 여러 민족이 차차로 이반하니 정관3년(貞?3年: 629), 당(唐)의 태종은 대규모로 동돌궐토벌을 자행하고, 소가한(小可汗)의 돌리가한(突利可汗)을 투강시킨다. 그 익년(630)에는 대하간(大可汗)인 힐리가한(?利可汗)이 포로가 되고 동돌궐은 일시 망하여 당의 기미(羈?)지배하에 들었다.

동돌궐은 영순원년(永淳元年:682) 아사나골출록(阿史那骨??:동돌궐의 제2가한국기의 초대 가한)이 일테리슈가한(Iltiri?-qaγan=Iltiri?-qaγan=국가를 규합한 가한의 의미)라
칭하고 당(唐)의 기미지배(羈?支配)를 일탈하여 독립을 이룬다(돌궐 제2가한국<지도-16>). 아사나골출록(阿史那骨??)은 무측천정권(武則天政?)대에 당(唐)을 종종 침입하고
약탈을 자행하여 중국을 괴롭혔다. 그 런 중 당조(唐朝)는 무측천(則天武后)의 제위찬탈로 일시적으로 당조가 망하고 무주조(武周朝. 재위:690년10월16일 - 705년2월22일)가
건국된다(690년).

지도-16. 682년 돌궐제2제국

한편 동돌궐제2제국의 아사나골출록(阿史那骨??)이 죽고 동생인 아사나묵철(阿史那默?)대에 처음으로 무주조(武周朝)에 입조(入朝)하였으나, 점차 방만 해지드니 드디어
무주조(武周朝)를 멸하고 당조(唐朝)를 부활시키겠다고 중국침공을 도모했다. 그러나 무측천(武則天)은 당(唐)의 노능왕(廬陵王)을 황태자로 삼으니 동돌궐의 중국침공은
의미를 잃고 중단되었다. 그 후 신용원년(神龍元年:705) 무측천(武則天)이 노능왕(廬陵王)에게 양위하고 당(唐)은 부활을 이룬다. 만년 동돌궐제2제국의 아사나묵철(阿史那默?)은
서방공략에 매우 분주하여 철륵(?勒)토벌 중 전사한다. 아사나골출록(阿史那骨?)의 아들인 묵극연(默棘連)은 아사나묵철(阿史那默?)의 일족을 죽이고
비가가한(毘伽可汗:Bilga Qaγan. 재위:716~734)이 되어 궐특근(闕特勤)과 돈욕곡(暾欲谷)과 함께 안정된 국가를 만들도록 노력했다. 당(唐)과도 우호적인 외교를 계속했다
<지도-18>.
지도-17. 734년 돌궐제2제국의 성기

그러나 비가가한(毘伽可汗)이 죽은 후 동돌궐내부에서 내전이 빈발하고 가한이 단명하여 자주 가한(可汗)이 교대되었다. 이런 쇠퇴한 틈을 타서 철륵에서
나온 회홀(回紇: 위구르. 투르크계)족과 갈라록(葛邏?:투르크계), 발실밀(拔悉蜜:투르크계)등 3부족에 의하여 동돌궐의 가한(可汗)이 살해되고, 동돌궐은 멸망했다.

지도-18. 7세기 동돌궐의 최대판도(7C, 서돌궐붕괴후의 당 주변도, Eastern Gokturk Khanate=東突厥(第二可汗?), Tang Dynasty=당(唐), Kimak Turks=키메타,
Karluk Turks=크르르크, Guzz Turks=오구즈)

지도-19. 7세기 동서돌궐(Western Gokturk Khaganate=西突厥, Eastern Gokturk Khaganate=東突厥, Chinese Empire(Sui Dynasty)=隋、Tuyuhun=吐谷渾、
Persian Empire(Sassanid Dynasty=사산조)

투르크계인 위구르(??, 回紇)는 동돌궐을 멸하고 위구르가한을 건설한다.

『위서(魏書)』와『북사(北史)』등에 위구르는 위골(袁紇), 위골(韋紇)로 기록된다. 『구당서(?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는 회골(廻紇), 회골(回紇)로 기록한다.
그리고 정원4년(貞元4年:788年)과 원화4년(元和4年:809年)『?唐書』列?第一百四十五 ?紇에 「元和四年,?德曷里祿沒?施合密毗迦可汗遣使改???,
義取?旋輕捷如?也(원화4년(元和4年:809年)갈덕갈리록몰미시합밀비가가한(??曷里???施合密毘迦可汗=保義可汗)은 (唐)에 사신을 보내 (국명을)회골(??)로 바꾸었다.
그 의미는 매(?=골)와 같이 나는 가볍고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회골(??: 위구르)은 처음은 복수부족의 연합체로 그들 자신이 남긴 비문에 의하면 초기에는 구성철륵(九姓?勒=?勒: 돌궐이외의 투르크계 유목민족의 총칭)이라 불렀는데
이들 중에서 회골(??:위구르)이 대두했다. 「철륵(?勒)」이라는 표기는 칙륵(勅勒),정영(丁零)등과 같고, 투르크(Turk)를 음사한 것이라고 한다. 회골(??:위구르)부의
수장씨족인 약라갈시(?羅葛氏)의 특권후근(特健俟斤)을 추대하여 부족장으로 했다. 이 부족집단의 대표지도자가 추대되었기 때문에 구성철륵(九姓?勒*앞 참고문) 전체가
회골(回?=위구르)로 불리게 되었다<지도-20>.

742년 회골(回?:투르크계부족)부는 갈라록(葛邏?:투르크계부족)부와 함께 발실밀(拔悉蜜:투르크계부족)부를 맹주로 하여 반동돌궐동맹을 결성하고 대추장인
아사나시(阿史那施)를 세워 힐질이시가한가가한(?跌伊施可汗伽可汗)으로 했다.

이 회골(回?)부, 갈라록(葛邏?)부, 발실밀(拔悉蜜)부 삼자는 동돌궐을 공격하여 동돌궐의 오소미시가한(烏蘇米施可汗)을 죽였다. 또한 744년 회골(回?)부, 갈라록(葛邏?)부는
맹주인 힐질이시(?跌伊施)를 죽이고 대신 회골(回?)부의 힐질발(?利?:부족장)였던 골력배라(骨力裴羅)가 골돌록비가궐가한(骨??毘伽闕可汗)이 되고 당(唐)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회인가한(?仁可汗:재위:744年 - 747年)의 칭호를 받았다.

회인가한(?仁可汗)인 골력배라(骨力裴羅:?~747)는 영토를 넓혀 동은 실위(室韋), 서는 금산(金山:알타이 산맥), 남은 대막(大漠:고비사막)과 접하여 옛 흉노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지도-20>.

지도-20. 747년 위구르의 영역

위구르의 분산과 서위구르의 건국.

840년 위구르는 내란과 키르기스 족의 공격을 받아 유목위구르국가는 붕괴했다. 이 때 위구르인은 몽골고원에서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어
당(唐)의 북방으로 이주한 집단은 후에 원대(元代)의 왕고척(汪古?: 온구트. 몽골고원 음산산맥 부근의 투르크계의 유목민족)으로 살았다.

서의 천산방면(天山方面)의 갈라록(葛邏?)으로 이주한 일파는 후에 투르크계 이슬람왕조인 카라한조(이슬람 화에 큰 역할을 한 투르크계 민족)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감숙(甘?)으로 이주한 일파는 후에 960년 감숙위구르(甘?위구르)를 이룬다.

다른 주력의 일파는 동부천산(東部天山)의 비슈바리크(북정/北庭:천산산맥동부의 북쪽 기슭에 존재했던 도시, 천산투르크왕국의 수도), 카라샬(焉耆),
토르판(高昌)을 제압하여 서위구르왕국(천산위구르왕국)을 건국했다<지도-19. 21>.

사진-21. 위구르의 분산

이후 12세기에 동에서 멸망한 요(遼)의 유민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왔을 때 위구르는 병력을 제공하여 복속을 약속하고 서요(西遼)의 건국을 지원했다<지도-23>.
지도-22. 8C위구르제국(744?848:Asia in 800 AD, showing the Uyghur Khanate and its neighbors.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지도-23. 13C후반. 西위그르(=高昌回?=西州回?=Uyghur Khanates), Kara Khitai=西遼, Xixia=西夏


몽골제국시대에 위구르는 몽골의 부마국이 된다.

13세기에 몽골고원에서 칭기즈칸이 발흥하니 1211년 위구르 왕(Iduq qut) 파이술아이특적근(巴而朮阿而?的斤:Barchuq-Art tigin:1206-1230)은 몽골에 귀순했다.
칭기즈칸은 그의 귀순을 환영하고 딸 알 알튼(?l-Alta?)을 시집보내어 부마(駙馬)가 되었다. 또한 파이술아이특적근국은 죠지(Jo?i,:칭기스칸의 장남) 등 칭기즈의
4명의 아들에 준하는 「제5의 세사(第5位 世嗣)」라고 칭할 정도로 우대받았다. 이후 몽골제국에 위구르왕가는 「위구르부마왕가(駙馬王家)」로서 콘기라트
부마가(駙馬家)와 나란히 부마왕가 필두(駙馬王家筆頭)로 우대받는 몽골왕족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 몽골제국과 대원대몽고(大元大蒙古)<지도-24>에서는
위구르인 관료는 몽골궁정에서 중용되었고 제국의 경제를 담당하는 대신도 배출했다. 이 시대 위구르왕국 지역을 지칭하여「위구리스탄(?yghrist?n)」라고 부렸다.

위구르인은 몽골제국에서 이슬람 화를 촉진시켰다.

위구르가한은 사상최대의 몽골 제국에 흡수된 투르크계 민족이었으나 지배층인 몽골 인에 비하여 그 인구가 압도적 다수였고, 또한 문화적으로 투르크어가 보급되어
있었음으로 투르크의 몽골어화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도리어 이슬람권에 영지를 가졌던 차가타이 울즈(漢語:察合台汗國>Chagatai Khanate>칭기wm칸의 차남이 다스렸든 지역),
프레다 울즈(Hulegu, Hulagu, 旭烈兀, 1218년-1265년>英語:Ilkhanate=伊利汗?.>칭기스칸의 4남이 다스렸던 지역), 죠지 울즈(Ul?s-i J?ch??:칭기즈칸의 장남 죠지의 후예가
지배하다가 망한 유목정권)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동시에 투르크어를 말하는 몽골 인들까지 나타났다. 이리하여 몽골 여러 왕조는 투르크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몽골
여러 왕조의 해체 후는 투르크계의 국가가 순조롭게 건국하게 되었다<지도-21>.

지도-24. 1300-1405년 Mongol Empire

아나톨리아로 이주해 온 투르크계의 셀주크조와 투르크만

현재 가장 유명한 투르크계 국가인 투르크공화국(터키:the Republic of Turkey)은 아나톨리아 반도에 존재하는데, 투르크인의 고지(故地)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투르크계 최대의 민족인 투르크인이 살고 있다. 이것은 역사상 몇 번의 파도를 거쳐 투르크인이 이 땅으로 이주하여 왔기 때문이다.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동로마 제국이 존재하였고 주요언어는 그리스어였다. 아나톨리아로 최초로 침입하여 온 것은 셀주쿠조(현대 터키어: Buyuk Selcuklu Devleti)이고,
이 셀주쿠조에 의하여 동로마제국이 축출되었다. 또한 이 땅에 셀주쿠 왕권의 강화를 좋아 하지 않았던 투르크만(Turkmen) 등이 동에서 유입하여 왔기 때문에 아나톨리아의
투르크화가 시작 되었다.

셀주크조(Selcuklu)는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 현재 이란, 이락, 투르크메니스탄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이슬람왕조로 대셀주크조(Great Seljuq Empire)는 1038년부터
1157년까지 계속되는데, 최후의 지방정권인 룸-셀주크조는 1308년까지 계속되었다<지도-25. 26>.
지도-25. Great Seljuq Empire in its zenith in 1092,upon the death of Malik Shah I
지도-26. 1308년대까지 룸-셀주쿠조의 지배영역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제국이 발흥한다.

11세기에 투르크계의 이슬람왕조인 셀주크일파가 아나톨리아에 세운 룸-셀주크조의 지배하에 무슬림인(이슬람교도)인 투르크인이 유입하게 되고,
토착인 여러 민족과 대립과 혼교를 계속하면서 정착하게 된다<지도-27>. 그들이 세운 군소 투르크계 후국의 하나가 발전시킨 오스만(Devlet-i ?Aliyye-i ?Os?m?niyye)
조는 15세기에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스탄불을 수도로 하여 동은 아제르바이잔에서부터 서로는 모로코까지, 그리고 북은 우크라이나부터 남은 예멘까지 지배하는
대 제국을 건설했다<지도-28>.

오스만조는 1326년 비잔틴제국의 요도(要都)인 Bursa를 정복하여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1354년 이후 발칸반도로 진출한다. 1361년 경 Adrianople(현 Edirne)를 정복하고
이곳에 수도를 이전했다. 1389년 코소보, 96년에 Nikopolis, 1444년에 Barna의 전투로 점차 발칸의 제 군대를 격파하여 15세기 중엽에는 불가리아, 그리스, 알바니아.
세르비아 지역을 합병하고 비잔틴제국을 고립시켰다. 1453년 노프메트 2세(II. Mehmet. 재위1444-46, 1451-81)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을 공략하여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이 도시를 이스탄불로 개칭하고 국내각지에서 투르크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등을 이주시켜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 결과 16세기 중엽에는
이스탄불의 인구는 약 50만에 달하고 유럽의 최대 수도가 되었다. 이 사이 제국의 판도는 더욱 확대되어 15세기말에는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거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16세기에 들어 시리아 방면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이집트의 마무르크(maml?k)조와 대립하여 1517년에 세림1세(1465年10月10日 - 1520年9月22日)의 지휘하의 오스만군은
이집트를 정복하여 마무르크 조를 격파하고 동시에 메카, 메디아의 양성도의 보호권을 획득하고, 여기에 오스만조의 지배자(술탄)는 동시에 수니파 이슬람교도의 지도자
카리프의 지위도 수중에 넣었다. (술탄 카리프 제)

이슬람1세(재위:1520-1266)는 모하치(Mohac Muharebesi)전투(1526)에서 헝가리를 복속시키고, 1529년에는 빈을 포위 공격하여 유럽제국을 위협하여 유럽정국에 큰 영향을 입혔다. 지중해 방면에서는 1538년 스페인, 베네치아, 로마교황의 연합함대를 프레자(Preveza:그리스 서부) 해안에서 격파하고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위협했다. 이로서 제국은 지중해, 흑해, 페르시아 만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동서와 남북으로 광대한 국제무역 로를 장악하는데 성공하면서 제국의 최성기를 맞았다<지도-28>.

오스만제국은 중앙아시에서 이주해 온 투르크인에 의하여 서부 아나톨리아에 건국된 이슬람왕조(1299-1922)로, 단순히 오스만 혹은 오토만제국이라 부른다.
오스만이라고 하는 이슬람의 전사를 리더로 하는 소집단<지도-24>이 발흥하여 제1차세계대전후 멸망하기까지 600년 이상 서아시아, 발칸, 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세계사상에 큰 족적을 남겼다.

오스만의 쇠퇴

17세기 이후 제국의 번영을 지원했던 제 제도가 붕괴하고, 동서무역로가 지중해에서 인도양-대서양경유로 전환되면서 제국은 쇠퇴를 맞이했다.
18세기 이후 제국 내부에는 징세청부제와 대토지소유가 가능하게 되어 이것을 기반으로 아얀(Ayanlik)이라 불리는 지주층이 발흥하여 술탄의 전제지배를 위협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크리스트교도피지배민족의 독립운동이 활발해 졌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술탄은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제국의 교육, 기술, 제도, 법을 도입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했다(Tanzimat). 그러나 19세기후반 이후 제국의 경제는 유럽제국에 지배당하고 또한 방칸 제국은 제정 러시아 등의 지원으로 정치적 독립을 이루고,
이집트도 또한 무함마드조(Muhammad Ali Dynasty )가 성립되어 사실상 독립했다. 국내에는 청년장교의 주도로 민족주의적인 입헌혁명이 일어났다(1908녀 청년 투르크 당 혁명)

투르크공화국(터키:the Republic of Turkey)이 성립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측에 가담하여 패배하고, 아나톨리아는 연합제국에 의하여 분할의 위기를 맞아 그리스 군이 서 아나톨리아로 진공했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Ataturk)의 지휘아래 투르크 국민은 오스만 왕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동시에 연합제국에
대한 반제국주의운동을 전개했다(투르크 혁명). 그 결과 1922년 11월에 술탄제가 폐지되고 오스만 제국은 멸망, 투르크공화국(터키:the Republic of Turkey)이
성립되었다<지도-29>.

지도-27. 1300년경의 투르크의 위치
지도-28. 1739년의 오스만제국의 위치
지도-29. 현재의 투르크공화국의 의치

터키의 전신인 투르크계 돌궐 및 위구르제국과 한반도와의 관계

주서(周書)에 돌궐(突厥)의 조선(祖先)은 색국(索?) 출신으로 흉노(匈奴)의 북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중락>- 추대되어 눌도육설(訥都六設)이 되어 돌궐(突厥)이라 칭했다.
(본문참조)

논행(『論衡』『後漢書東夷?』『魏略』)에 「옛날 북이(北夷)의 색리국(索離?)이 있었는데 왕은 시녀(侍女)가 임신하였기 때문에 죽이려고 했다. -<중략>-.
그래서 동명(東明)은 부여(夫余)의 땅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는 신화적 기록이 있다.

*돌궐의 조선(祖先)은 색국(索?)에서 나왔다 하고 부여의 조선(祖先)은 북이의 색리국(索離?)에서 나왔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색국과 색리국은 같은 지역일까?

흉노와 돌궐의 뒤를 이는 위구르(회골:回?)는 고려사에서 회회(回回)로 표기하고 있다. 회골(回?:위구르)또는 회회족(回回人:위구르) 들의 한반도 진출은 1270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원(元)의 정치적 간섭이 시작되면서 본격화 되었다. 칭기즈칸의 부마국이 된 위구르는 몽골의 타민족 지배에 관리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고려가 원(元)의 정치적 지배를 받으면서 수많은 위구르(回?)인들이 사신이나 관리, 역관, 근위병 등의 명목으로 고려에 들어왔다. 당시 중국 북부 지역의 교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던 위구르 상인들은 개경(開京)에 직접 상점을 차리며 상당 규모의 거주 집단을 이루기도 했다.

특히 고려와 원(元) 왕실의 혼인 정책(부마국)에 따라 고려 왕비가 된 몽골 공주는 대규모 수행원을 이끌고 고려로 왔는데, 이 때 위구르 인 시종들이 몽골 공주를 수행했다.
이들은 몽골 공주를 배경으로 고려의 정치, 외교 등에 큰 영향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에 고려의 명칭이 바다로는 아라비아를 통하고 육지로는 실크로드와 위구르를 통하여
유럽으로 널리 알려져 지금 한국을 나타내는 영어표기가 KOREA로 되었다고 본다<지도-30>.

투르크계의 위구르는 몽골의 세력에 말려 극서의 아나톨리아반도까지 밀려나서 서로부터 이주해 온 셀주크조와 혼합하여 국가를 세워 오스만제국(오스만투르크)을 건설하였다.
잠시 몽골의 후예가 건설한 티무르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제국은 600년간 계속하였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제국의 영토는 반환되고 투르크의 혁명으로
공화제 국가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투르크공화국이다(터키:the Republic of Turkey).

과연 터키는 형제 국일까?

기원전 4,5세기부터 북이(北夷)의 색리국과 색국을 근간으로 하는 아시아의 극동의 한반도와 극서에 위치한 터키는 뿌리를 같이 한 것일까?

투르크계종족인 위구르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부족들이 상업 활동을 통하여 동서의 문물과 무역을 주도한 종족을 통합하고 관리했던 민족이다.
자연히 그들은 무역을 주도하면서 문자와 수학이 필요하게 되어 이를 유럽과 아랍문명권으로부터 받아들이면서 관리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광대한 중앙아시아로 단시일 내에 진입하였으나 점령지에 대한 관리능력이 부족했던 몽골은 광대한 지역을 통괄하는데
위구르의 관리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몽골이 한반도로 진입할 때도 한반도의 지배권을 위구르의 지식인들에게 맡기게 되었다.

이로서 한반도와 위구르의 역사적 만남이 12,3세기에 이루어 졌다. 그러나 몽골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그들도 자연히 조선반도를 떠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진출하였다. 역사적으로 극서 쪽으로 멀리한 투르크는 오스만투루크제국을 건설하여 로마제국에 맞먹는
대 제국을 건설하여 영화를 누렸으나 한반도와는 멀어진 상태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20세기 한반도의 전쟁에 남쪽의 연합국으로 참여하여 700여년 만에 조우했다. 2002년의 월드컵을 계기로 형제 국으로 등장했다.
터키와 한국은 고대 북방의 종족인 색리국과 색국에서 뿌리를 같이한 형제관계 국가였을까?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