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1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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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밝혀진 거북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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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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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고의 화려한 함선 그림 대한민국 국보 가치 -
- '가라'(韓)의 발음이나 앞변의 모양은 자라나 거북의 이미지 -
다시한번 우리의 역사가 해외에서 찾아졌다. 오늘 뉴스에 의하면 이번에는 거북선의 실체의 모습이 뉴욕에서 드러나고 있다. 한번도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 적이 없는 거북선이 드디어 위용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동안 납작 1층으로 돛이나 깃발 하나만 달고 있던 한국 지폐의 거북선 그림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아직 그림의 정확한 연대 측정 등이 남아 있지만,
1640년대 전후의 거북선으로 그 모습이 1층으로 된 것이 아니라 거북선의 오리지날 모습의 중요한 함선의 모양에는 일부 학자들이 추측한대로 3층
규모의 거대 함선이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다음은 지금까지 우리 화폐에 그려져 온 거북선의 한 예이다.
새로 밝혀진 거북선의 위용은 영국에서 발행된 <1421>에서 보여주는 명나라 정화의 세계 일주 함선보다 더 멋지고 생생한 칼러라는 면에서 적어도 우리나라 국보 가치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거대한 돛을 다는 마스터 기둥들이 있는 것을 보면 거기에 돛을 달았을 경우 거북선의 위용은 더욱 대단하게 보였을 것 같다. 거기에 특히 배 위에 둥근 돔식 지붕이 있는 것도 당대에 보기드문
세계적인 함선이란데 자랑스러운 우리의 거북선이 다시한번 드러나는 순간이다.
임진왜란의 승전 이상 거북선의 그 위대한 선체의 모습은 가히 '외계'에서나 왔을법한 상상 이상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적인 뉴스는 보다 더 크게 보도되었으면 한다.
사진에서 드러난 것은 함선 갑판 가장자리에 나선형의 방패같은 것이 있다. 아마도 바다에서 비상시에 던질 구조물인지 아니면 방패역할을 했던 구조물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이러한 나선형은 울진 암각화의 나선형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바다와 관련한 그 이미지 연구도 보다 깊이 추구되어야 할 것 같다.
이번에 새로 밝혀진 거북선의 화려한 위용과 자태를 도입한 거북선에 대한 박물관은 물론 새로운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순신이 마지막 유탄을 맞아 순직한 자리인 3층 높이 지휘 전망대는 세계적인 함대의 위용을 자랑하는 전투함의 함장과 함께
거북선의 그 풍모와 기개가 새롭게 그려지고 조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거북선은 단순하게 바다 거북을 모사했다고 보면 안된다. 적어도 가야시대의 우리나라 고대 구지가에서 보는대로 거북의 의미는 바다와 더불어
대단히 신화적인 전통을 이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거북선을 이야기할 때마다 언급되어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서 말하는 일본열도는 “두 사람의 ‘카라카미’가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카라카미’즉 ‘한신(韓神)’이고 그것은 가야지방의 지배세력이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열도에 새로운 국가를 형성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리아'란 말은 고려에서 나왔지만, 가야시대의 옛발음의 하나인 '가라'(韓)와도 그 발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도 염두에 두자.
최근에 뉴스가 된 바 있는 박정화씨의 연구에서 보는대로 일본인들이 왜(倭)라는 지명을 ‘야마토’로 읽는 것은 가야의 별칭인 ‘야마이(거북)’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할 때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이 일본함대를 무찌른 것은 대단히 역사적 그리고 신화적 배경이 있다.
나는 성산가야 특히 벽진 가야 지역에서 자라면서 '자라'란 말은 어쩌면 '가라'(韓)과 그 어떤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韓'이라는 글자의 앞변을 볼 때마다 자라나 거북의 모습을 느낀다. 거북선은 그만큼 우리의 역사적 자랑이며 오랜 가야(가라)의 역사를 연면히 이어온 민족적 위대성이 숨어 있는 것이다.
▲ 재미 기업인 윤원영씨가 17일 공개한 300여년 전 거북선 그림. 3층짜리 군선의 모습과 배 위에서 회의 중인 장수, 병사들의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 그동안 알려진 거북선과 문헌에서 보이는 거북선
- 돛대를 뉘었다 세웠다 했다는 기록이 그림에서도 뒷받침 되다 -
기록에만 남아 있던 거북선에 대하여서는 상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실물을 가늠할만한 기록들은 있다. 그것들을 토대로 데이타를 확립해본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의 승조원은 130여 명이었고, 속력은 이순신의 보고를 바탕하면 약 6kn 정도다.
두껑인 개판의 재료는 우리나라 문헌에는 판(版)·후판(厚版)을 덮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 문헌에는 철(鐵)이었다고 했다. 그만큼 거북선은 적의 화시(火矢)나 총환(銃丸)으로는 뚫지 못하는 16세기
세계 최강의 전투함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거북선이라는 말은 이순신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거북선’이라는 말의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세종임금의 아버지인 태종 13년 (1413년) 5월 초에
“거북선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2년 후인 1415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북선은 우리나라 고대 전함 전통에서 내려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의 실체가 강조된 것은 해전이 벌어진 임진왜란 때부터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베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을 비롯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장계 등에도 거북선에 관한 내용이 나타난다.
이렇게 본다면 기록상으로 태종의 거북선과 이순신의 거북선으로 대별된다. 이순신이 고유 창안한 거북선은 아니지만, 그는 임란 당시 거북선을 군관 나대용(羅大用) 등과 함께 개량 건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본래 거북선의 불을 토하는 곳은 용머리[龍頭] 뙈는 거북머리[龜頭]였다. 이순신의 장계에는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못[鐵尖]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서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북과 용머리는 사신도에 나오는 북현무의 모습에 무관하지 않은 면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야시대의 <구지가>에서 보는대로 거북과 남해 바다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의 크기는 임진왜란이 지난 두 세기 후인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거북선에 대한 또 다른 기록으로는 정유재란 때 종군한 이분(李芬)의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에 나온다.
“크기는 판옥선(板屋船)과 같고, 위에는 판자로 덮었다. 판상에는 좁은 십자로(十字路)를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하고, 그 외에는 모두 도추(刀錐)를 꽂아서 사방에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였다.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그 아가리가 총구멍[銃穴]이 되게 하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龜尾]를 만들어 붙이고 그 꼬리 아래 총구멍을 내었다. 좌우에 각각 6문의 총구멍을 내었는데,
그 전체의 모습이 대략 거북과 같으므로 그 이름을 거북선이라 하였다…”
위에 언급한 1795년 간행된《이충무공전서》에는 통제영 거북선의 구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
"좌우 뱃전에는 속명을 신방(信防)이라 하는 난(欄)을 만들고, 난 머리에 속명을 가룡(駕龍)이라 하는 횡량(橫梁)을 건너질러 뱃머리 앞에 닿게 하여,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씌운 것과 같았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패(牌)를 둘러 꽂았으며, 패 위에 또 속명을 언방(偃防)이라 하는 난(欄)을 만들었는데, 뱃전 난간 위에서부터 패란(牌欄)까지 높이는 130cm이다."
"패란 좌우에 각각 속명을 개판(蓋版) 또는 귀배판(龜背版)이라 하는 11매의 판자를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그 등에 45.5cm 되는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내용이 이번에 뉴욕에서 발굴된 거북선의 그림에서도 증명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은 항해 거리에 따라 노와 돛을 번갈아 사용한 것이다.
주로 먼 곳을 항해할 때는 돛을 사용하였으며, 돛대는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돛대는 가까운 거리에서 노를 저을 경우 바람을 덜 타게 했던 면이 있었겠지만,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적들이 간파하게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마스터를 눕히는 기능을 가지는 구조로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뱃머리에는 거북머리를 만들어 붙였는데, 길이는 130cm, 너비는 91cm이며, 그 속에서 황(黃)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하였다.
"좌우의 노(櫓)는 각각 10개씩이고, 좌우의 패에는 각각 22개씩의 포구멍을 뚫었으며, 12개의 문을 만들었다. 거북머리 위에도 2개의 포구멍을 뚫었고,
그 아래에 2개의 문을 만들고 문 곁에도 포구멍을 1개씩 두었다. 좌우 복판(覆版)에도 또한 각각 12개의 포구멍을 뚫었으며, ‘귀(龜)’자 기를 꽂았다."
"좌우 포판(版) 아랫방이 각각 12칸인데, 2칸은 철물을 간직하고, 3칸은 화포 ·궁시(弓矢) ·창검(槍劍)을 간직하며, 19칸은 군사들의 휴식소로 하였다. 왼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선장(船將)이 거처하고,
오른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장령(將領)들이 거처하였다. 군사들이 쉴 때는 포판 아래 있고, 전투시에는 포판 위로 올라와서 포를 여러 구멍에 걸고 쉴새없이 쏘았다."
경상도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구조가 다소 달랐던 것 같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에 대한 구조는 “치수 ·길이 ·너비는 통제영 거북선과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신머리[鬼頭]를 새겼으며, 복판 위에 거북 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2개의 문이 있으며,
거북 머리 아래에 2개의 포구멍이 있고, 현판 좌우에 포구멍이 각각 1개씩 있고, 현란 좌우에 각각 10개씩의, 북판 좌우에 각각 6개씩의 포구멍이 있고, 좌우의 노는 각각 8개씩이다”
선봉 돌격선의 임무를 띤 전선으로서 별도로 귀선돌격장(龜船突擊將)이 선장으로 임용되어 이순신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의 기록은 거북선의 능란한 '부딪쳐 깨뜨린다'는 뜻의 당파(撞破)전법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거적으로 개판(鎧板) 위의 도추를 덮고 맨 먼저 적진에 돌진하였는데, 적병이 배 위에 올라 덤벼들다가는 도추에 찔려서 거꾸러지고, 또 에워싸고 엄습하려 하면 좌우 전후에서 일시에 총을 쏘아
적선이 바다를 덮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공격하므로,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놈이 없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해전에서 이것으로써 항상 승리를 하였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초기에 3척이 건조되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전란 중의 나머지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명함대가 명함장의 손을 떠나면 사라져야 하는가.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 할 때에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패전할 때 거북선은 거의 상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다시 거북선을 건조하여 “여러 진포(鎭浦)에 배속시켰다”고 하였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1980년 우리나라 해군에서 거북선을 복원 건조하여 해군사관학교 앞바다에 띄워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원형은 전혀 어땠는지 몰랐다가 이번에 뉴욕에서 발견된 1640년대의 '거북선 원형' 그림을 토대로
모든 기존 거북선 모형들과 자료들이 재 정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아테네 올림픽 개회식에서 그라운드에 물을 대어 바다 기분을 내고 봉화대가 물 뉘었다 세웠다 하는 것을 선보였다. 어쩌면 우리나라 거북선의 마스터의 기능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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