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2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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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이슬람의 만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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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이슬람의 만남 1>
한국과 이슬람세계 간의 교류상을 감안할 때, 한국은 결단코 은자의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
그러기에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은 신라에 이어 고려와 조선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왔던 것이다.
고려시대는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의 역사에서 새 장이 열린시대다.
이 시대의 초엽에는 아랍 상인들이 대거 몰려왔고,말엽에는 주로 이슬람을 적극 수용하고 십분 활용한 원제국(몽고)을 통해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영내에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으로나마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의 여러문헌에 의하여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고려사' 나 '고려사 절요' 같은 서적을 펼쳐보면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回回)' 나 무슬림을 일컫는 '회회인(回回人)'에 관한 기사가 간간히 보인다. 모두가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들이다.
'고려사' 의 기록에 의하면 1024년과 1025년,1040년에 열라자,하선,보나합을 비롯한 아랍 상인들이 100여명씩이나 무리를 지어 수은,물약,소목 같은 방물을 가지고 상역차 개경에 찾아왔다.
고려왕은 그들에게 개관까지 마련하여 후대하고,돌아갈 때는 금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고려말에 이르러서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는데,그것은 몽골초원에서 달려온 기마유목민과 통칭 '색목인'이라는 서역 무슬림들이 주도하였다.
원제국에서 색목인들은 몽골인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제국의 내정은 물론 원정을 비롯한 대외관계에서도 두뇌역할을 수행하였다.
원대 조정에서 '문화교수'의 특수한 입지를 갖고 있던 무슬림들은 타의반으로 원제국의 고려 정략에 동참하여 사신,역관,서기,근위병,시종무관 등 여러 직분으로 고려에 공식 파견되었다.
그밖에 상인이나 민간인들도 다수 고려에 왔다.
그들중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고려에 잔류하여 귀화하고 동화한 자들도 있었다. 이 무슬림들은, 특히 귀화무슬림들은 중세 한반도 무슬림들의 비조가 되고 이슬람의 정초자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일례가 삼가(三哥)장순룡(張舜龍)이다.
삼가는 1274년 고려 충렬왕의 몽골비(妃)인 제국(齊國)공주(원 세조의 딸)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다.
원래 삼가는 원나라에 있을때도 고관직을 제수받은 인물로,비록 공주의 사속인으로 고려에 왔지만 곧바로 벼슬이 낭장에서 장군을 거쳐 '첨의참리'까지 올랐다.
그는 덕수현(德水縣 ,현 북한 개성직할지 개풍군)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고려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남기고 44세에 별세하였는데, 후손들은 본관을 덕수로 하고 그를 덕수 장씨의 시조로 모셨다.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선위하고 순룡의 자택에 이사와서 기거하며 그 집을 덕자궁(德慈宮)으로 불렀다고 하니 순룡에 대한 왕의 두터운 신임과 그가 누렸을 권세를 가히 짐잘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12종파 25대로 이어져내려온 덕수 장씨의 문중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많은 명인들을 배출하였다.
순룡의 맏아들 양(良)은 판사(判事)를 지냈고,8대손인 정(珽)은 연산군 때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했다.
특히 12대손인 장유(張維)는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우의정까지 올라 명성을 날렸으며,'계곡집(谿谷集)'같은 명문집을 남겼다.
지금도 명문대가로 그 후예들이 선조의 종묘가 모셔져 있는 평택을 중심으로 하여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삼가의 귀화후 일족의 신앙생활은 밝혀진바 없으나, 적어도 몇세대까지는 무슬림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덕수장씨의 후예들은 남한에만 총 4554가구에 1만 9366명이 살고있다.(다음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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