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마트는 항상 손님이 많아서 혼잡하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야채가 싱싱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곳 한 계산대에서 캐셔로 일하고 있는 나이가 50대 초반 쯤 되어보이는 어느 한 아주머니..
밀려드는 손님이 짜증 날만도 할텐데 물건을 계산대에 올려놓는 손님들 누구에게나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물건을 많이 산 손님에게는,"집에 잔치가 있으신가봐요.."하고
어떤 손님에게는 "아유..싱싱하고 좋은 것으로 잘 고르셨네요.." 등 등으로..
그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피부가 유난히 희고 깨끗한데
전혀 고생을 하고 살아온 사람 같지 않아 보인다.
손 놀림이 좀 서툴러 보이지만 행동거지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일한 지 오래 되셨어요?" 하고 물었더니 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아니요..제가 많이 서툴지요" 했다.
나는 내 의도와 달리 여자를 당황스럽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계산을 끝내고 돌아섰다.
그런 일이 있은 며칠 후 마트에서 생활용품 한 가지를 사려고 서성이고 있는데,
웬 여자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기에 쳐다보니 그 여자였다.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어서인지 전혀 딴사람 같아 보였다.
여자는 곁에 서 있는 딸을 내게 소개하면서
오늘은 비번이라서 딸과 함께 장을 보려고 나왔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여자와 나는 안면을 트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쯤 그 마트에 들리는 나는 계산을 할 때마다
그 여자가 일하고 있는 계산대를 찾아다녔다.
쇼핑으로 피곤한 몸과 마음을 그 여자의 친절한 미소가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달 쯤 지난 어느 날..
나는 푸드코트에서 그 여자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할 기회가 생겼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그 여자는 자신이 마트에서 일하게 된 사연
을 들려주었다..
대기업 임원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54세에 조기퇴직을 했다.
명예퇴직으로 물러나는 형식이어서 퇴직금은 상당했지만,
남편의 예상치 못한 조기퇴직은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있는 그 여자는 큰 아들이 1년 전 취직을 해서
직장에 다니고 있고, 둘째 아들은 대학 졸업반인데 거의 직장이 확정된 상태여서
안심을 하고 있다며 대학 2학년인 막내 딸만 졸업시키고 나면 걱정거리가 없다고 했다.
여자 말에 의하면, 명퇴를 한 남편이 한동안 집에서 말 한마디 없이 지냈다고 한다.
과묵하고 자존심이 센 남편이 조기퇴직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 같아서
여자는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무척 신경을 썼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마음도 몰라주고 아무것도 아니 일에도 버럭버럭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련서 집안에 냉기가 돌았다.
남편은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도 일체 받지 않고 대인관계를 끊고 지내면서
간간이 혼자서 등산을 다녀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찮은 일이 발단이 되어 부부싸움을 하다가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이혼하자.'는 말까지 터져 나왔다.
속이 상한 여자는 친한 친구를 만나 하소연을 해봤지만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빠 집에 살고 계신 친정어머니를 찾아가 울고 불고 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며칠 째 딸과 함께 자면서 남편을 멀리 했다.
혼자서 찜질방도 가고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면서 남편과 냉전을 계속했다.
여자는 그날도 친구들과 헤어진 뒤 집에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아
목적 없이 버스를 잡아타고 한참을 가다가 재래시장 앞 정류장에서 내려
시장골목을 헤집고 돌아다녔다.그러다 배가 고파 조그만 백반집을 찾아 들어갔다.
이른 저녁시간이어서 그런지 식당 안에는 손님이 한명도 없었다.
여자는 회냉면과 평소에 입에 대지도 않던 소주 한 병을 시켜서 눈 딱 감고 마시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애들 다 키워 놓았겠다.걸릴 것이 뭐 있어?.... 그래 이혼해..이혼하자고..
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다고 매일 같이 사람을 볶아대...나도 이대로는 못 살아..'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데,홀서빙을 하는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술 안주로 콩나물 무침을 상에 내려 놓으며,
"속상하신 일이 있나봐요?" 했다.그래서 여자는,
"아줌마, 일하는 거 재밌어요?" 하고 물었다.
"예, 재밌어요. 재미있게 생각하면 한없이 재미있고, 짜증스럽게 생각하면
더 짜증스럽지요....., 건강하니까 일도 할 수 있고,좋잖아요?" 했다.
"아줌마, 행복해요?" 하고 물었더니,
"그럼요, 행복하지요."
"애들은 몇 인데요?"
"아들 하나,딸 하난데 애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애들 학비 주고
그럭저럭 살 수는 있지만, 집에서 손 놓고 놀면 뭐해요. 괜히 짜증이나 내고
남편하고 싸우기나 하고, 헛된 생각이나 들고...,지지고 볶는다고 인생이 달라지나요?
몸에 병이나 생기지....,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마음이 지옥이면
지옥에서 살다 죽는 거지요." 하며 돌아서서 갔다.
'그래, 그래,맞아...'
여자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밤새 궁리를 하다가 다음 날 집 가까이에 있는 H마트에 들러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리고 한달여 기다린 끝에 캐셔로 취직을 했다.
남편은 마트에서 캐셔로 일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미쳤냐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답답해서 그러니 말리지 말라."며 강경하게 나오자 수그러들었다.
여자는 밖에 나가 일을 해보니 힘은 들지만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서 일부러 버스를 타지 않고 30여 분을 걸어서 출근했다.
축 늘어져 지냈던 예전과 달리 발걸음에 활기가 느껴졌다.
그러면서 밖에 나가 돈 버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것인지 알게 되었고,
남자들이 직장에서 겪는 고생을 눈으로 보면서 남편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다.
20여년 이상 동안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온 자신을 볼 수가 있었다.
여자는 마트에서 첫 봉급을 받은 날 저녁, 남편과 함께 외식을 하면서
10만 원짜리 수표가 든 봉투를 남편엔게 내밀며,
"여보 내가 결혼해서 25년만에 처음으로 번 돈이니 액자에 넣어 소중하게 보관합시다."
했더니 남편이 픽 웃더라고 했다.
여자는 자기가 번 돈을 매달 저축해두었다가 내년 봄에 둘째가 대학을 졸업할 때
가족 모두 동남아로 축하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남편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짜증도,벌컥벌컥 내던 화도 내지 않더니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니
남편이 저녁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속으로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싶었는데 남편은 게면쩍어 하면서,
"해봤더니 어려운 일도 아니던데 뭘.....,여자들 엄살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했다.
그날 이후 남편이 저녁상을 차려놓고 기다려주는 날이 한동안 계속되자,
여자는 남편이 전업주부가 되기로 작정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저녁을 먹으면서,
"여보,나 내일부터 출근해." 했다.
남편은 후배에게 부탁을 해서 오피스텔 관리소장으로 취직이 됐다며,
"캐셔 아내에, 관리소장 남편이라...,환상의 커플이다."면서 껄껄 웃었다.
농담이라고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던 남편이었는데,.....
여자는 눈물이 핑돌더라고 말했다.
나는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온 두 사람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퇴직자 아내들은 남편을 바라보는 마음자세를 예전과 달리 해야 한다.
수십 년 몸담아온 직장에서 물러나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는 은퇴한 남편들...,
평생을 한눈 팔지 않고 온갖 수모를 견뎌가며 가족들을 위해 죽을 둥 살 둥
일에 파묻혀 살아온 남편이 편안하게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은 포근한 둥지인
아내의 품속 뿐이다. 부부란 그런 것이다.
남편들은 그동안 눈만 뜨면 밖에 나가 생활을 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가족들과 어울리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들이 스스로 새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아내의 배려와 따뜻한 하마디 말이 남편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준다.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권위를 세워줄 수 있는 사람은 아내밖에 없다.
남편의 권위가 바로 서야 자신의 권위도 바로 서고,
가정도 바로 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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