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5-31 22:08
현충원을 한번 걸어봅시다. (조선일보 2010. 6. 4)
 글쓴이 : …
조회 : 496  
ESSAY] 이번 6월엔 현충원을 한번 걸어봅시다. (조선일보 2010. 6. 4)

▲ 권혁세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기에 몸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그대 흘린 피 이 땅 적셔 흐르리

통일 꿈 이뤄져 평양 가는 첫 기차
기적 울릴 때 무덤 헤쳐 일어나소서

순국선열 무명용사 묘비 앞에 서면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들의 묘소를 참배하며 묘비에 새겨진 추도문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해지고 애틋함이

치밀어오른다. 조국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비문 가운데 모윤숙 시인이 쓴 고(故) 육영수 여사의

묘비 글은 수려하면서도 장엄하게 느껴진다.

'당신의 장미는 아직 시들지 않았고 뽕을 따서

담으시던 광우리는 거기 있는데…. 홀연 8월의 태양과

함께 먹구름에 숨어버리신 날 우린 한목소리 되어

당신을 불렀습니다. 비옵니다. 꽃보라도 날리신 영이시여!

저 먼, 신의 강가에 흰새로 날으시어 수호하소서,

이 조국 이 겨레를.'

비문을 읽으면 마치 고인의 살아생전의 체취가 되살아나는 듯

느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듯 슬픔이 밀려온다.

한솔 이효상씨가 쓴 고 이인호 해병소령의 추모 글은 쉽게

잊히지 않는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기에 청춘도 정든 임도 모두

버리고 그대 몸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피는 흘러 이슬이

되었거니 그대 흘린 피! 이 땅 적시어 생명되어 흐르리.'

1983년 10월 북한의 미얀마 랑군 테러로 희생된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순국 외교사절의 묘역에 들어서면 이역만리 먼 곳에서 국가

동량재를 잃은 안타까움과 분노가 솟구친다.

'살아서는 향기를 멀리멀리 풍기고 맑음을 날로날로

더해가던 그대…. 그대는 총명했기에 그대가 아쉽고…'

라며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김재익 경제수석 묘비 글은

가슴을 치게 한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고향 선배인 이범석 외무부 장관에게

바친 묘비 글에선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어느 날 통일의 큰 꿈 이뤄져 평양 가는 첫 기차 서울

떠나는 기적소리 울릴 때 임이여 무덤 헤치고 일어나소서.'

굳이 누가 일깨워주지 않아도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그래야만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말없이 산화(散華)해간 수많은 호국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묘비를 한자 한자 읽으면서 문득 천안함 장병들의 죽음이

떠올라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들도 생전에 누구보다

소중한 부모의 자식이었고 사랑스러운 아내의 남편이었으며

귀여운 자식들의 아버지였다. 그러기에 이 땅에 살아남은

우리들은 그들의 죽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 우리

국민들의 70% 이상은 6·25를 겪지 않은 세대로 전쟁의 참상을

잘 모른다. 안보(安保)라는 것이 공기 속의 산소처럼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 젊은 세대들이 "북한보다 미국을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국립현충원 안에 안보 박물관이 있으면 좋을 듯하다. 오

늘의 나를 있게 만든 나라,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호국

영령들의 생생한 역사를 기록해 둬야 한다. 그들이 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를 후세가 널리 기억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현충원의 순국선열 묘비 글을 차근차근

읽어보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생생한 교육이 될 수 있다.

아카시아 향기가 가슴을 아리게 하는 이번 6월에는 자녀들을

데리고 현충원 산책로를 한번 걸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