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는 매주 목요일 마다 열리는 아파트 단지 내 알뜰 시장에서 무엇이든 한 두가지 씩은 꼭 사온다. 어제는 또 누런 호박 한 덩이를 샀다고 무거우니 나더러 들고 가란다. 자기가 무거우면 나는 안 무겁나.. 현장에 도착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크기가 절구통 보다 커 보인다. 배달 시키면 될 것인데(파장 이후 배달해 준다) 굳이 나더러 들고 가라니..그 속내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직고 내가 힘께나 쓴다고(?) 여기고 있는 모양.. 그러다가 지 영감 허리 부러지면 어떻할라꼬.. 그런데 이상하다. 이렇게 큰 누런 호박이 어찌 벌써 시장에 나왔을까.. 아직 철이 이를 터인데.. 하기사 요즘 제철이 어디 있으랴.. 하우스에서 사시 사철 길러내니.. 힘겹게 가져온 호박은 워낙 크고 무거워 건드리기에 기가 질려 자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차일 피일 하다가 어제 마음먹고 칼을 대고 힘껏 쪼겠다. 4등분을 하고 껍질을 벗겨 푹 삶은 후, 찹쌀과 녹두 그리고 꿀과 소금으로 단 맛과 간을 친 호박죽을 쑤었다. 적당한 찰기에 달고 깊은 맛은 시중에서 파는 여느 호박죽에 비할 바 아니다. 목요일 저녁 KBS에서 방영하는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은 매주 기다리며 시청하는 프로다. 질그릇 같은 인상과 수수한 차림 그리고 겸손하면서 구수한 언변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으로 언제나 친근하게 다가 왔다. 그런데 오늘은 늙은 호박에 얽힌 밥상에 대하여 방송했다. 그 시간 마침 식탁에서 호박죽을 먹는 나에게 최씨가 호박죽에 대해서 잘 알기나 하고 먹으라는 듯 호박으로 이름 난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며 분위기에 맞는 내레이션을 이어 가고 있었다. 우선 늙은 호박에는 '베타카로틴'성분이 많아 이뇨작용을 도우므로 몸의 부기를 빼 주며 철분, 칼슘과 칼륨이 풍부하단다. 전남 해남에서 많이 생산되며 아무데서나 잘 자라 손이 자주 가지 않아도 되는 작물로 가난한 시절 죽이나 물엿, 호박떡(범벅)으로 우리의 허기를 채워 주던 고마운 식자재였다고 한다. 그런데 칠순 중반이 넘은 최씨는 한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뀜에 따라 따가운 햇볕과 비바람을 마다 않고 맞아 가며 푸른색에서 누렇게 변한 호박을 '익은 호박' 이라 불러야 하는데, '늙은 호박' 이라고 하니 참으로 섭섭하다고 하였다. 늙은이의 괜한 투정이 아니라 누구나 겉모습은 변해도 속마음은 청춘임으로 늙었다고 하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고 하였다. 더구나 그는 자신은 몰라도 남이 늙었다고 하는 말이 다소 억울했는지 다음과 같은 말로 늙음을 풀이하면서 근사하게 마무리 지었다. "늙어지면 세상사가 간단명료해진다." "젊었을 때는 사물을 배우나 늙어지면 그것을 이해한다." "늙은이는 젊음을 알지만 젊은이는 늙음을 겪어 보질 않아 모른다." "늙었다는 것은 치열하게 살았다는 반증이다." ^^ (2015..어느 일상에서..)